역으로 헤아리면 보인다.
여권이 로텐더홀을 먼저 ‘접수’하려는 이유를 살필 수 있다.
직권상정을 하려면 심사기일을 지정해야 한다. 이게 문제다. 심사기일을 지정하는 건 곧 직권상정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민주당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보좌진과 당직자를 총동원해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는 의원들을 엄호하려 할 것이다. 본회의장 바로 앞의 로텐더홀에 인력을 증강배치해 직권상정 길에 바리케이드를 치려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심사기일을 지정하기 전에 로텐더홀을 먼저 ‘접수’해야 한다. 그래야 심사기일 지정과 직권상정 사이의 시간적 간극과 물리적 마찰을 최소로 줄일 수 있다.
여권의 흉중이 이렇다. 작심한 것이다. 직권상정을 통해 85개 중점법안을 강행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궁금하다. 왜 이리 강수를 두는 걸까? 여야 원내대표가 이룬 ‘가합의’를 한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든 이유가 뭘까? ‘가합의’를 잘 손질하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모양새 좋게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데도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뭘까?
물론 간단하다. 강경파가 득세했기 때문이다. 이명박계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가합의'를 일거에 내쳤기 때문이다.
관심사는 이런 현상이 아니다. 강경파가 무리수를 감수하면서까지 '가합의'를 부정해야 했던 이유, 이게 궁금하다.
시간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들은 시간을 질질 끌 만큼 여유롭지가 않다. 오히려 절박하다. 그래서 다급해하고, 그래서 경직되는 것이다.
몇 개의 어록에 새겨져 있다. 여권의 다급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정길 대통령실장 - 내년 2월이 되면 대졸 실업자들이 쏟아지고, 3~4월이 되면 많은 중소기업들이 부도가 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상황을) 구조적 문제로 돌리게 되면 현 정부나 체제에 대한 위협세력이 될 수 있다. (12월 1일, 박근혜계 의원들과의 만남에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 (한미FTA)문제가 새해로 넘어가 3월에 춘투와 결합이 되게 되면 소위 FTA 문제를 중심으로 반대세력들이 결집하고 또 3월 춘투상황과 같이 뭉치면 국가 경영하는데 굉장히 어려움이 온다. (12월 23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박종희 한나라당 의원 - (민주당 의원들은)시간 끌어서 이명박, 한나라 아무것도 못하게 해서 4월 춘투로 모티브를 잡겠다는 것이다. (12월 31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청와대와 한나라당 공히 걱정한다. 올 봄에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져나오는 걸 우려한다. 제2의 촛불이 켜지는 걸 극도로 경계한다.
여야 원내내표가 ‘가합의’한 대로 쟁점법안 처리를 미루면 갈등이 ‘봄’을 관통한다. 단순히 스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봄 정국에 기름을 붓는다. 그래서 차단하려는 것이다. 무리수가 따르더라도 이번 임시국회 회기 내에 쟁점법안 처리를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쟁점이 뇌관이 되는 일을 방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봄’을 통제하는 법적 장치를 완비하려는 것이다.
결국은 이런 것이다. 체념을 강요하고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쟁점에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자포자기의 심정을 유발하고, 그래도 불복하는 사람들은 억누르려는 것이다.
잘될까? 여권의 이런 셈법이 먹혀들 수 있을까?
그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게 아니라 앞서 복기한 어록이 가능해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정길 대통령실장 말에 따르면 문제의 근원은 ‘구조’에 있다. 법안이 아니라 먹고살기가 어려워지는 ‘민생구조’에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와 박종희 의원의 말에 따르면 법안 강행처리에도 불구하고 ‘상수’는 엄존한다. 한미FTA는 먹고살기에 근본적 의문을 던지는 ‘상수’로 기능하고, 춘투는 생존권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분명하다. 여권 인사들의 진단에 따르면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85개 법안과는 무관하게, 직권상정과는 무관하게 ‘속불’은 계속 타들어가게 돼 있다.
강행처리가 자포자기의 정서를 유발할 것이라는 전망 또한 어설프다. 객관적 판단보다는 주관적 희망에 경도돼 있다. 85개 중점법안을 기정사실로 만들면 오히려 공분과 결기를 강화시킬 수 있다. 차라리 현재진행형의 ‘쟁점’으로 남겨두면 타협의 여지에 주목한 국민들을 방관 지대에 머물게 하련만 과거완료형의 ‘현실’로 굳혀버리면 배수진을 친 극한적 반발을 부를 수 있다.
여권 내 온건파가 그토록 우려했던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파동과 같은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권 입장에선 이런 부작용을 감안해도, 이런 부작용이 우려돼도 어쩔 수 없다.
멈칫 대면 뒤에서 공격당한다. 보수 지지층으로부터 ‘물 정부’라는 비난을 받아야 하고, 떠나는 보수 지지층을 속절없이 배웅해야 한다.
이럴 바에는 밀어붙이면서 상황을 관리하는 게 낫다. 일단 85개 법안과 ‘봄’의 연결선을 끊고, 개각과 같은 국정 이벤트를 펼쳐 상황을 희석시키는 게 낫다. 사태를 예의주시하다가 불복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이른바 ‘사회질서법’을 앞세워 통제하는 게 낫다.
장사 비법은 ‘단골’ 확보에 있고, ‘단골’ 유지 비법은 ‘한결같음’에 있다.
▲사진 = 국회 경위들이 3일밤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중이던 민주당 당직자들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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