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도가 왜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웠을까 ? [기사 펌] [43]
- Kendall nic***
------------------------------이장무 서울대 총장에 대해
그러면 매국형 친일파 중 당대에 쌍벽을 이루며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이완용의 후손은 어떻게 지낼까.
구한말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은 병탄 후 중추원 고문으로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 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 비난 담화를 발표해 그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작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한 후 귀족 작위와 재산은 손자 병길이 습작했다.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 종손인 이윤형씨가 상속권자다. 일제 때 일본인 고위 관료 자녀의 교육기관이던 경성제1사범대 부속학교를 거쳐 동성고교와 홍익대를 나온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 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 뒤 17년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 뛰어들어 한때 승소 판결로 수십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한편 이완용의 셋째 손자(이병길의 동생)인 이병주씨는 1962년 9월21일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정부에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화시키고 환대했다. 일본에 귀화한 이병주의 아들 이석형씨는 1979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있던 이완용 부부의 묘를 파내 화장해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일왕이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가 이 관 뚜껑을 인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해 한동안 역사 자료로 소장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내려와 원광대 총장을 설득해 가져다 태워버린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친일 사학자라고 비판받던 고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과 우봉 이씨 집안 친척이다. 고 이병도씨의 두 아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의 오랜 땅찾기 작업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국가 귀속 조처로 현재는 주춤한 상태다.
친일파 후손의 사회 진출에서 특징은 학계·경제계·관료·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이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 진출도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이는 후손이 선거운동 등에서 자기의 집안 내력이 노출되는 정치권 진출을 꺼렸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이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잘나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조상의 친일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 비해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 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친일파 후손까지도 경제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아직도 조상이 친일 대가로 조성해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광복 63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민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희상 기자·이재덕 인턴 기자 /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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