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장소멸하는 방법은 / 서진스님
業障消滅이란 지금까지 지은 業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業을 짓지 않음으로써 可能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業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業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은 業을 消滅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없다.이를테면
善業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善業關係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그 關係란 恩惠를 입었기에 그 恩惠를 갚아야 하는 關係와,
恩惠를 베풀었기에 恩惠를 받아야 하는 關係일 것이다.
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하여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善業關係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緣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恩惠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恩惠를 갚기 위하여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生覺해 보면 그를 돕는다는 것은 전생(前生)에
自身이 지은 善業關係를 消滅시킨다는 것을 意味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德分에
나는 前生에 지었던 善業을 하나 消滅시키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善行을 베풀었다고 生覺한다면,
그 마음은 善行을 했다는 마음이 남게 되어
새로운 善業을 다시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 德分에 나는 善業을 하나
消滅시킬 수 있었다고 生覺한다면 善業은 받았으나 새로운 善業을
짓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業障消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行爲가 바로 功德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더라도 그 關係는 前生에 내가
도와주면서 만들어진 善業을 받아 消滅시킨 것이니
그 또한 나의 業障을 消滅시켜 주신 그러한 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感謝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신세를 졌어도 그분에 對하여 感謝하기 보다는
業障消滅이 되어 버린 것에 對한 感謝함과 함께 내가
지금 신세 지은 것과 같이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을
도우려는 나의 마음 그것 또한, 善業을 받았으되
새로운 善業을 짓지 않는 行爲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功德이 되는 것이다.
惡業關係 또한 그러하다.
내가 그에게 怨恨을 가졌는지 아니면 그이가 나에게 怨恨을
가졌는지 이 두 가지 惡業關係에 의하여 만날 것이다.
相對가 나에게 怨恨을 가졌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잘 해주려고 하여도 그 結果는 나에게 被害를 주는 關係가 될 것이다. .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惡業을 消滅시켜 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 또한 感謝할 일(事)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怨望과 憤怒 속에서 그를 본다면 이것 또한
惡業을 받고 또 惡業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 眞實은 밝히려고 할지언정
누가 그르네, 누가 옳네 하는 是非를 가려서 怨望과 憤怒 속에서
살지 말고 感謝의 마음으로 그 苦痛을 받아들일 때에
惡業을 받았으되 새로운 惡業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그 다음 내가 아무리 잘 해주려고 했어도 그 結果가 그에게
커다란 被害를 주고 그에게 怨望을 사게 되었더라도
自身의 마음을 몰라주고 怨望만 한다고 억울해 하고 그를 미워만 한다면
그것 또한 惡業을 받으면서 또 새로운 惡業을 짓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輪回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 또한 業障消滅을 시켜준 感謝한 因緣이라고 生覺하여
그의 憤怒와 억울함을 同情할 줄 알고 感謝로써 懺悔하는 것,
이것이 業障消滅하는 功德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業障消滅하는 마음가짐과 行爲를 우리는 功德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功德이란 우리들이 모든 것에 執着하지 않는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行爲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執着하지 않는 마음이란
單純하게 執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感謝와 懺悔의 마음,
이것이 곁들여져야만 그 行爲가 功德이 되는 것이다.
過去에 지은 業을 消滅함에 있어서는 그 業이 찾아왔을 때
피하지 않고 받아서 消滅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根本이며
그 以外에는 다른 方法은 없다.
그것을 잘 가르쳐 주는 말이 바로 부처님의 三不能이다.
이것은 부처님도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첫번째는 정해진 중생의 業障을 消滅시켜 줄 수 없으며,
둘째는 緣이 없는 중생을 求援할 수 없으며,
세째는 三界를 다 求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이것을 자세히 설명해 보면
첫째. 정해진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없다는 말은 배가 고픈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대신 밥을 먹어 줄 수 없고,
病든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病이 들 수 없듯이
業을 받는 중생을 代身하여 부처님이 業을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배고픈 아들을 代身하여 어머니가 밥을 먹어 줄 수 없지만
배고픈 아들을 代身하여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주고,
病든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病이 들 수는 없지만
病든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듯이,
부처님도 業을 받는 중생을 代身하여 業을 받아 줄 수 없어도
業을 받는 衆生과 恒常 함께 하면서 그를 보살피는 것이다.
어떤 衆生이 地獄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苦痛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苦痛 속에서 自身의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든데
사람인지 짐승인지 分間하기조차 힘든 피투성이가 된
生命體가 自身의 옷자락을 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生命體를 보고 외쳤다.
"도대체 너는 누구인데 남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거야.
이 地獄의 苦痛에서는 나의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든데 왜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거야. 놔!" 그러자 그 生命體가 對答하였다.
"나는 너의 옷자락을 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求濟하여야 할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놀라서 물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부처라면 나를 求濟해야지 그 몰골을 하고
어떻게 나를 求濟한단 말이야" 그러자 그 生命體가 말했다.
"내가 너를 업고 저 業障消滅의 길로 가는데 내가 가자고 하는 길은
네가 業障을 消滅하여야 할 길이기에 險難해 보이고.
地獄의 길은 휘황찬란하게 보이니까
너는 내가 너를 地獄으로 데리고 가려는 줄 알고 나를 惡魔 取扱하여
두들겨 패서 이와 같은 피투성이로 만들지 않았느냐.
하지만 나의 生命은 너를 求援하는 것이기에
내가 만약 너를 抛棄하게 되면 나도 죽게 된다.
이렇듯 내가 잡고 있는 너의 옷자락은
나의 生命줄이기에 너의 옷자락을 놓을 수 없다"
마치 불에 타는 집에 있는 이를 求濟하기 위하여 불 속에 들어간
구조대가 그를 업고 나오면서 그가 겪는 뜨거움을 代身할 수 없듯이,
業障의 불길에 휩싸인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衆生을 求濟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로 부처님이 뛰어들어 오셔서 衆生을 업고 나가면서
그가 겪어야 할 業障의 苦痛을 부처님이 代身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衆生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겁내지 마라. 내가 있다"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三不能의 첫번째인,
정해진 업은 소멸시켜 줄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다음 둘째,
因緣없는 衆生을 求援할 수 없다는 것은 부처님은 그 衆生이
因緣이 없다고 抛棄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因緣이 있을 때까지
때를 기다리시며 버리시지 않는다는 意味이다.
또 單純하게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方便을 사용하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因緣을 成熟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方便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째,
삼계의 중생을 다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부처님의 生命은 衆生求援에 있다.
그렇기에 衆生이 다 求援되어 더 以上 求援할 衆生이 없게 되면
부처님의 生命 또한 끝인 것이다.
삼계에 있어서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어야
부처님도 이 사바세계에 함께 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삼계의 중생을 다 구원할 수 없다는 뜻은
부처님은 이 사바세계에 계시면서 마지막 한 명의 중생까지
다 구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불자가 있었다.
절을 창건할 정도로 신심도 대단하였고 법회에는 반드시 참가하여
기도도 열심히 하는 불자였다,
이 불자가 病이 들어 臨終을 맞이하게 되자 카톨릭을 믿는 아들이
"어머니. 永世를 받으셔야 天國에 갑니다" 하며
간곡하게 권하자 영세를 받고 임종을 하였다.
그런데 이 불자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돼서 불자의 남편이
病을 얻어 누워 있다 3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그리고 葬禮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永世를 권하였던
아들도 교통사고로 命을 달리하였다.
그러면서 집안의 家勢는 기울기 始作하였다.
그러자 가족들은 "어머니가 불교를 믿었는데 영세를 받으셔서
그렇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평소에 다니시던 절에 가서
천도제를 지내드리자"고 의견을 모아 천도제를 지내드렸지만
집안의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地境에 놓이게 되면 누구나 이 집안의 가족들처럼
부모님이 좋은 데로 못 가셨기 때문이거나 어머니가
다른 宗敎를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집안의 家勢가 기울고 事苦가 發生한 것은
그러한 理由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일(事)들이 發生하게 된 原因은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宗敎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自身이 죽은 後에
가야 할 곳이 確實하게 結定되어져 있음을 意味한다.
하지만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종교를 바꾼 이 불자님의
信仰生活은 뭔가 疑拘心을 가지게 한다.
즉 바른 신앙생활이었다기 보다는 迷信的인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하게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卽, 우리가 이 世上에 태어났을 때는 善業과 惡業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善業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백배 천배 努力해야 할 일도
나는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惡業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손쉽게 하는 일도 나는
백배 천배 努力을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卽, 善業을 받을 때에는 幸福이 찾아오고,
惡業을 받을 때에는 不幸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善業이든 惡業이든 다 받아서 消滅시켜야 한다.
人生이란 善業이 끝났으면 惡業이 찾아오고
惡業이 끝나면 善業이 찾아오는 것이 人生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자님은 善業만 받고 惡業은 받지 않기 위하여
점을 쳐서 미리 악업이 찾아올 것을 알아 부적이나 쓰고,부처님 전에
"우리 男便, 우리 子息 便安하고 幸福하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빌 줄이나 알았지 惡業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불자님의 一生은 善業을 지으면 짓는 즉시 다 받아 없애면서,
惡業은 蓄積하여 사는 一生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業에는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이란 것이 있다.
共業은 環境과 만나는 因緣을 結定시켜 주는 業이며
不共業은 自身을 結定시켜 주는 業이다.
卽, 가족은 가족으로서 共業이 있기에 만난 것이고,
서울에 같이 사는 것은 서울 사람으로서 共業을 가졌기에
서울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한국사람으로서 共業을 가졌기에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地球에 같이 사는 生物은 지구에 산다는 共業을 가졌기에
地球에 태어나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太陽界에 태어나서 같이 사는 生物들은 모두가 太陽계라는
共業을 가졌기에 같이 모여 사는 것이다.
이렇게 共業은 自身의 탄생 또는 環境을 結定시켜 준다.
그리고 不共業은 自身의 肉身을 結定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共通된 業이 가장 많이 包含된 것은
아버지일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病患으로 누우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共業은 가장 孝心이 깊은
아들에게 돌아가게 된다,그 아들이 돌아가시려는 어머니에게
영세를 받도록 도와드린 그 아들일 것이다.
卽, 眞心으로 어머니가 천국에 가시기를 바라는 孝心에서
어머니가 영세를 받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業은 그 아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교통사고를 당해 命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점이나 부적을 쓴다거나 祈福的인 신행생활은
중생들에게 커다란 苦痛의 結果를 가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業이란 것은 自身의 環境과 肉身만을 結定시켜 줄 뿐
自身의 意志까지도 結定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卽, 지금의 自身의 環境과 肉身 또는 모든 因緣은 前生이나 過去에
지은 業에 依하여 結定되었다 하더라도,
自身의 未來는 지금의 自身이 그 環境을 어떻게
克復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自身의 意志가 業에 依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은 運命的인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自身의 意志가 業에 依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해낸다면 그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아니라
얼마든지 開拓되어질 수 있는 삶이다.
미래의 예언자, 다시 말하면 사주팔자나 점쟁이들이 말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의 삶은 별볼일 없는 삶이 된다.
業을 극복하는 삶이란,
다시 말하면 業障을 消滅시키는 삶이란 四柱八字를 바꾸고
점쟁이들의 점괘가 맞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가 점을 부정하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점쟁이들의 점괘나 토정비결 같은 것들이 맞지 않아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四柱八字를 바꾸면서 그러니까,
開拓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것들에 依持할 必要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業障消滅의 삶이란,
過去나 前生에 지은 自身의 業에 依하여 結定된 지금의 環境을
自身의 意志로 극복하여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自身의 意志가 業에 依하여 結定되어진 自身의 環境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自身에게 찾아오는 幸福은 부처님이 自身의 善業을
消滅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단약임을 알고,
自身에게 찾아오는 不幸은 부처님이 自身의 惡業을 消滅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쓴약임을 알아,
幸福과 不幸에 執着하지 않으며,
不幸이 찾아와도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幸福이 찾아와도 執着하지 않는 삶을 사는 信行生活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날 필자에게 어떤 이가 찾아와서 올해 三災가 들었으니
부적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그래서 필자는 물어보았다.
"올해 그냥 삼재를 받으시렴니까,
아니면 다음에 삼재가 또 찾아올 때 올해 것까지 다 모아서 받으시렵니까?"
우리가 부처님에게 祈禱할 때에 發願을 한다면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빌기보다는
"우리 家族이 業을 받음에 있어서 피하지 않고 받아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또 恒常 보살펴주시는
부처님이 옆에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라고
發願을 하여야 할 것이다.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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