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 哲學, 동양철학

識의 흐름과 氣의 흐름

장백산-1 2013. 2. 27. 01:51

 

불교 / 識의 흐름과 氣의 흐름  

 

김성철 / 동국대, 중앙승가대 강사

 

Contents

氣一元論과 華嚴學


한의학의 氣와 十二處


理氣論과 名色

 

‘불교와 氣’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氣功으로 단련된 스님이 등장하는 쿵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불교의 根本 가르침과 그런 종류의 氣는 별 關係가 없다. 간혹 氣工 修練을 하는 스님들이 있긴 하지만 이는 健康을 지키기 위한 方便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이 佛典에서 ‘氣’라는 用語는 거의 發見되지 않는다. 潛在된 習慣을 의미하는 ‘習氣va-sana-’라는 번역어가 있으나 그 意味는 본 글의 주제와는 無關하다. 氣에 대해 佛敎的으로 眺望하기 위해서는 氣에 對比될 수 있는 槪念을 불교적

世界觀 內에서 추출해보는 수밖에 없다.

 

中國文化圈에서 말하는 氣 역시 다양한 맥락에서 쓰인다. 一元論的인 氣 哲學에서 말하는 氣,

한의학에서 말하는 人體의 經絡을 循環하는 氣, 성리학의 理氣論에서 말하는 氣. 모두

氣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各各이 意味하는 바는 다르다.

어떤 文化圈에서 쓰이는 槪念을 다른 世界觀을 通해 解析해낸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牽强附會로 因한 知的인 罪惡intellectual sin을 저지를 危險을 감수해야 한다.

 

氣一元論과 華嚴學

 

불교에서는 自我의 存在를 認定하지 않는다. 이 世上은 끊임없이 明滅하는 刹那의 連續일 뿐이다.

이를 끊임없는 氣의 흐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世上의 참 모습이다.

時-空的 延長extension이 있다는 生覺은 찰나적 變化를 看過한 錯覺이다.

 

南方 상좌부의 위빠싸나vipassana- 觀 수행에서는 수행자로 하여금 自身의 心身에서 일어나는 瞬間的인 事件의 흐름을 注視하도록 한다. 卽, 每瞬間 明滅하는 觸感과, 意識의 흐름 등을 注視하게 한다.

世上에서 發生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存在한다’거나,

‘내가 世上에서 살아간다’는 굵은 生覺들이 錯覺이었음[無我]을 自覺케 한다. 그 結果

‘내가 實在한다’는 生覺에 입각하여 形成되었던 貪慾과 憤怒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形而上學的 疑問은 물론 죽음에 대한 恐怖까지 모두 虛構였음이 自覺된다.

 

나의 삶은 그렇게 刹那마다 明滅하는 點들의 集積일 뿐이다. 불교의 唯識學에서는 그 한 點을 ‘識’이라고

命名한다. 즉, 이 世上은 그렇게 點滅하는 의 흐름이다. 굳이 말로 表現하자니 그것을 흐름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흐름이라고 해도 좋다. 主觀과 客觀을 分轄하고, 나와 世上을 分轄하며, 精神과 肉體를 分轄하는 二分法的 世界觀을 打破하기 위해 識一元論이라는 假說을 내세운 것일 뿐이다. 二分法만 打破된다면 氣一元論이라고 命名해도 무방하다. 이를 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즉, 오직 識의 흐름만 있을 뿐이지

對相으로서의 客觀世界는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觀念論은 아니다.

 

 

唯境無識이라고 뒤집어 理解해도 그 취지는 같다. 오직 客觀世界[境]만 存在할 뿐 主觀[識]은 없다. 모든 것은 風景일 뿐이다. 主觀的 現象으로 간주되던 나의 感情이나 妄想들도 모두 예기치 못한 風景일 뿐이다. 마치 갑자기 날아가는 까마귀의 모습과 같이. 精神과 肉體를 分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唯識學의 識一元論과 氣哲學의 氣一元論은 一脈相通한다.

그러나 佛敎的  識一元論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主客 二分法을 打破하기 위해 唯識學에 의해 設定되었던 刹那的으로 明滅하는 無味乾燥한 한 點의 華嚴的 世界觀에 의해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한 點에서 살고 있다. 나는 空間的으로는 한 點 먼지만한 자리에, 時間的으로는 한 刹那 속에 存在할 뿐이다. 분주하게 搖動치는 나의 ‘注意力’이 머무는 刹那的인 바로 그 한 點 속에 내가 存在할 뿐이다. ‘나’라는 말을 붙일 것도 없다. 實際로 存在가 確認되는 것은 그 한 刹那 한 點뿐이다. 그러나 그 한 點은 무미건조한 無形의 한 點이 아니다. 華嚴學에서는 그렇게 微分의 極限에 位置한 한 刹那의 時間 속에서 過去, 現在, 未來의 모든 事件들이 펼쳐지고[一念卽是無量劫], 그 한 點의 空間 속에 온 宇宙가 빠져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선언한다. 예를 들어, 부두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望望大海를 바라보고 있어도 그것은 내 눈동자에 뚫린 한 點의 구멍 속에 빨려든 모습일 뿐이고, 數十 年 數千 年의 歲月을 回顧하고 있어도 그것은 이 瞬間 한 點에 불과한 生覺의 붓끝으로 그려낸 모습들일 뿐이다. 나는 한 點일 뿐이다. 매 瞬間 注意力이 머무는 그 한 點 속에 모든 空間과 모든 時間이 담겨 있다[一中一切]. 라이프니츠Leibniz의 單子Monad와 달리 華嚴의 一微塵은 이렇게 온 空間과 온 時間을 向해 窓門을 열고 있다.

 

 

華嚴學에서는 이러한 世界象을 帝釋天(Indra神)의 그물에 비유한다. 제석천의 그물은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달려 있는데 구슬 하나 하나마다 다른 구슬의 모습들이 重重無盡하게 모두 비쳐 보인다. 따라서 어떤 구슬 하나에 검은 點을 찍으면 瞬間的으로 다른 구슬 모두에 검은 點이 나타난다.

이를 ‘因陀羅網境界門인다라망경계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華嚴的 世界觀은 波動的 見知에서 構築된 것이다. 이 世上에서 發生하는 모든 事件은 두 가지 側面을 갖는다.

粒子的 側面과 波動的 側面이다.

粒子的 側面이란 局所的 側面이라고 부를 수 있고 波動的 側面이란 遍在的 側面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커피잔의 모습이 책상 위에 存在한다는 一般的 觀点은 局所的 側面에 對한 眺望일 뿐이다. 그 커피잔의 모습이 이 방안에 꽉 차 있다는 遍在的 側面에 對한 眺望 역시 可能하다. 그리고 이러한 遍在的 側面에 對한 眺望이 바로 華嚴的 觀点이다.

 

月印千江―南山 위에 걸린 달 하나가(局所性) 千 곳의 江에 비친다(遍在性). 千 곳의 江뿐만 아니라 온 虛空을 가득 채우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의 망막에 同時에 달의 映像이 맺힐 수 있는 것이다. 비단 커피잔이나 달의 모습뿐만 아니라 지금 存在하는 모든 것은 그 모습이 虛空에 遍在한다. 눈에 보이는 모습들뿐만 아니라 소리와 냄새도 遍在性을 갖는다. 따라서 산란 장소로 回歸하는 연어의 神秘, 비둘기와 철새의 回歸 등도 華嚴的 世界觀에 비추어보면 不可思議한 일이 아니다. 마치 눈을 가리고 鐘소리의 發源地를 찾아낼 수 있듯이 온 空間에 遍在하는 情報들 中에서 自身이 目的하는 情報의 强度가 擴大되는 方向으로 進行하기만 하면 目的地에 到達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情報가 온 宇宙空間에 遍在하기에 나의 注意力이 머무는 어떤 하나의 點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온 宇宙에서 發生한 모든 情報들이 無限히 重疊되어 담겨 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風景뿐만 아니라, 소리, 냄새는 물론이고 全世界 수천, 수만 放送局과 모든 핸드폰에서 送信한 電波, 온 宇宙에서 發生하는 모든 별들의 情報, 또 모든 意識의 波動 등 모든 것이 나의 注意力이 머무는 한 點 먼지만한 空間 속에 겹겹이 담겨 있는 것이다. 一微塵이 十方(온 宇宙)을 담고 있다는 華嚴的 선언은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고 嚴然한 事實이다. 화엄학으로 해석된 刹那的인 氣의 흐름은 ‘창문 없는 單子’의 흐름이 아니라, 이렇게 온 宇宙를 머금고 있는 一微塵들의 흐름인 것이다. 그러나 迷妄에 덮인 나는 그 중에서 내 認識의 거름종이를 거친 하나의 情報만 파악할 뿐이다.

 

한의학의 氣와 十二處

 

우리는 시각[眼], 청각[耳], 후각[鼻], 미각[舌], 촉각[身] 器管이라는 五官과 意識[意]을 通해,

各各 形像[色]과 소리[聲]와 냄새[香]와 맛[味]과 感觸[觸]과 生覺[法]을 파악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十二處’라고 부른다. 十二處는 ‘存在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불교적 분류 방식 中의 하나이다. 십이처설의 취지는 그런 열 두 가지 영역 中의 그 어디에도 永遠하고 自己同一的이며

自發的인[常一主宰] 自我는 存在하지 않는다는 無我의 理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 世上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열두 가지 領域으로 分析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사과의 경우 그 모양과 색깔은 눈에 보이며, 씹히는 소리는 귀에 들리고, 향긋한 냄새는 코를 통해 들어오며, 새콤한 맛은 혀에 느껴지고, 그 단단한 육질의 감촉은 입술과 볼을 누르며, 그것이 사과라는 生覺은 意識에 떠오른다.

 

이렇게 五官과 意識을 通해 認識된 것에 對해 우리는 그것이 存在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經絡을 따라 흐르는 氣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사과를 먹는 경우는 위에서 보듯이 十二處가 모두 動員 可能하다. 그런데 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면 의 存在는 虛構인가? 그러나 이 世上에 存在하는 事物이나 現象 모두가 十二處 全切와 關係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림자’의 경우 눈에 보이고 意識에 포착되기는 하지만 소리도 없고 냄새나 맛, 촉감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의 경우는 들리기는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고 맛도 없다. ‘바람’의 경우 그 감촉이 느껴지고 意識에 포착되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나 맛도 없다. 幾何學에서 定義하는 엄밀한 의미의 ‘點’이나 ‘直線’ 등은 具體的인 視覺의 世界에는 存在할 수 없지만 意識 內에는 存在한다.

 

는 어떠한가? 한의학에서 말하는 ‘氣’란 經絡이라는 通路를 따라 흐르는 것으로 觸覺에 依해 그 存在가 確認될 뿐이다. 즉, 經絡을 따라 흐르는 ‘氣’란 十二處 中 觸覺과 意識의 世界에만 存在하는 現狀이다. 그리고 鍼灸術을 통해 그 氣의 흐름을 調節할 경우 우리 몸에 身體的인 變化가 일어난다. 마치 그림자가 感觸되지 않는 것이지만 햇볕을 가림으로써 熱을 식히는 作用을 하듯이.

 

西洋文化는 視覺中心的oculocentric이다. 따라서 視覺의 世界로 換元될 수 있는 것만을 客觀的 事實로 認定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는 醫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체를 해부하여 병소를 확인하고, 현미경을 통해 그 형태적 특질을 끝까지 추구하는 서양의학적 접근법은 視覺의 世界만을 客觀的 公論의 場으로 認定하려는 그들의 文化的 獨特性에 기인한다.

 

그런데 한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視覺의 영역보다 觸覺의 영역이 더 중시되어 왔다. 觸覺을 통해 相對의 신체적 變化를 진단하는 맥진법, 촉각에 의해 발견된 경락의 세계. 따라서 한의학을 객관적 의학으로 정립한다는 미명하에 촉각의 논리로 구성된 침구학 등의 원리를 모두 시각적 원리로 환원하려는 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몸에 느껴지는 바람과 같이 絶對 視覺化될 수 없는 無窮無盡한 觸覺의 領域이 存在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한의학을 所謂 客觀化하는 過程에서 放棄되었던 無數한 觸覺의 영역을 더욱 開發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觸覺의 論理, 卽 의 論理를 發見해 내는 것이 한의학자의 課題가 되어야 할 것이다.

 

理氣論과 名色

 

朱子가 말하는 는 서양철학적 개념으로 各各 形象과 質料, 普遍과 特秀 또는 理性과 感性에 對比된다. 自然物은 물론이고 人工物조차 理와 氣를 갖는다. 주자에 의하면 계단의 돌은 그 돌의 理를 가지며 대나무 의자는 대나무 의자의 理를 갖는다. 란 事物을 生産하는 根本이고 란 사물을 생산하는 材料이다. 란 觀念的, 精神的, 抽象的 영역에 속하고 란 物質的, 肉體的, 具體的 現狀을 지칭한다. 그리고 萬物을 포괄하며 萬物에 內在하는 最高의 理로서 太極이 설정된다.

 

이런 意味를 갖는 理氣에 대한 불교적 對應 개념을 구태여 찾아낸다면 名色na-ma-ru-pa을 들 수 있을 것이다. 現象의 精神的 側面을 지칭하는 名은 대개 理에 해당되고 物質的 側面에 해당하는 色은 氣에 해당된다. 그리고 色은 地大, 水大, 火大, 風大의 네 요소[四大]로 세분된다. 地大는 견고함을 그 특성으로 삼고, 水大는 축축함(또는 유동성), 火大는 따뜻함, 風大는 움직임을 그 특성으로 삼는데, 이런 四大의 造性 比率에 따라 具體的인 事物의 모습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에 대해 名이 부여됨으로써 하나의 現象이 成立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窮極的인 見知에서 본다면, 이렇게 名으로서의 理와 四大로서의 氣의 組合에 依해 構成된 事物의 實在性은 認定되지 않는다. 그래서 《般若心經》에서는 그런 모든 것들이 空하다고 선언한다.

佛敎的 理氣論 卽, 名色論은 理의 極端에 位置한 無極으로서의 太極, 空性의 自覺을 위해

잠정적으로 설정된 道具的 敎說일 뿐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생활 · 운동 자연치유 연구소
|
글쓴이 : 이현수|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