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영원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장백산-1 2013. 5. 24. 14:50

영원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소리도 없고 형상도 없다 
 침묵(沈默)과 적조(寂照)의 미, 그것은 아마도 불교미(佛敎美)의 최상일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장엄하며 평화스러운 미(美)라고 생각한다. 색깔로 치면 무채색의 은은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은 칼라풀한 다채색의 강렬한 아름다움보다 훨씬 인간을 평화롭게 하며 내면으로의 자기를 반조케하는 숙연함이 있다.아마 그것은 영원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속성을 군더더기 없이 말쑥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영원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처님이다. 비로자나불은 『법화경』에서 대략적인 묘사만 했을 뿐이고『화엄경(華嚴經)』에 이르러 영원한 부처님인 법신불을 침묵의 부처님, 광명의 부처님으로 언급하면서 비로자나불을 전면에 내세운다.

비로자나불의 산스크리트 표기는 바이로차나 붓다(Vairocana Buddha)이다. 바이로차나는 태양이 모든 곳을 밝게 비추는 특징 내지는 태양 자체를 이름하는 것이다. 원래 '골고루'라는 뜻의 부사 '비(vi)'와 '빛나다'라는 뜻의 동사 원형 '루츠(ruc)'에서 파생된 것으로 불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달을 지칭하기도 했다. 여하튼 태양의 빛이 만물을 비추듯이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일체를 비추며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이 법신불에는 형상이 없고 소리도 없다. 그래서 전혀 설법을 하지 않는다. 다만 법신불의 미간(眉間) 백호(白毫)에서 광명이 터져나와 시방 세계의 모든 나라를 드러낸다. 그래서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혹은 적광전(寂光殿)이라 하며 그 부처님 이름을 따서 비로전(毗盧殿) 이라 칭하기도 한다. 불국사에는 법을 설하는 강당 무설전(無說殿)이 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로자나불이 빛을 발하자 그곳에서 무수한 불 보살이며 신들이 나타나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찬탄하고 그 대지를 아름다운 연꽃으로 꾸미며 부처님 대신 설법한다. 바로 화엄(華嚴)의 바다가 펼쳐진다.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한 떨기 연꽃으로 피어나 조화를 이루며 세계를 아름답게 장엄하니 바로 연화장(蓮華藏)의 세계인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모든 악기가 각기 제 목소를 내더라도 하나의 화음을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를 일컬어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法界)라 한다. 그래서 그러한 통일의 원리,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인격화해서 법신불이라고도 했다.


비로자나불, 인격화된 공(空)의 모습
법신불은 법, 즉 공의 인격화된 보습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공의 의미를 살펴보면 비로자나불의 특징이 좀더 확연히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4항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좀더 세분화하여 자세하게 이 공에 대해서 묘사해 보겠다. 교토학파의 일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의 「동양적 무의 성격」에 그러한 공의 특징이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을 요약한다.

첫째, 무일물성(無一物性)이다. 무일물이란 단지 한 물건도 없다는 부정적 표현이 아니라 어떠한 집착의 흔적조차 없다는 뜻이다. 내외의 대상을 전부 끊어버리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둘째, 허공성(虛空性)이다. 이 허공에는 열 가지 뜻이 있다. ⑴ 무장애(無障碍)이다. 말 그대로 어떤 것에도 장애를 받지않는다는 의미이다. ⑵ 주편(周遍)이다. 허공은 모든 곳에 널리 퍼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은 심적인 곳까지 미치므로 사실 허공보다 더 그 범위가 넓다. ⑶ 평등이다. 취하고 버리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선이거니 악이거니 관계없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받아들인다. ⑷ 광대(廣大)이다. 타자로부터 한정되지 않으므로 한계가 없이 광대무변하다. ⑸ 무상(無相)의 뜻이 있다. 외형상으로나 내면상으로 어떤 모습이 없다. ⑹ 청정(淸淨)의 뜻이다.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푸르른 벽공(碧空)을 떠올려 보라. 육체적으로 청정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명경지수처럼 청정하다. ⑺ 부동(不動) 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불생불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고정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동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부동이 아닌 것이다. ⑻ 유공(有空)의 뜻이다. 자로 재거나 기하학적으로 측량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참이라든가 미 등으로 헤아리기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⑼ 공공(空空)이다. 공이라 해도 단순한 무가 아니라 유무도 초월하여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무적 주체를 말한다. 공에 대한 머무름 또한 공에 대한 집착이므로 그러한 공마저 끊어버린 대 자유이다. ⑽ 무득(無得)의 뜻이 있다. 어떤 소득도 없다. 다른 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소득도 전혀 없다. 그래서 불가득(不可得)이고 무탐(無貪)이며 적빈(赤貧)이라는 의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셋째, 즉심성(卽心性)이다. 허공에는 생명이 없으나 공에는 마음이라는 포근한 생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생명이나 마음이 아니다. 허공과 같은, 그렇치만 생명이 있는 진짜 마음으로 진정한 생명과 자각이 흘러 넘치고 있다. 바로 무념 무심한 마음이요 무각(無覺)의 각(覺)이 공에는 서려있는 것이다.

넷째, 자기성(自己性)이다. 이는 주체적 마음을 말한다. 그것은 대상적으로 보이는 마음이 아니다.

나아가 주객으로 나누어진 이후의 이분법적인 자기가 아니라 주객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주체적 자기를 말한다.

다섯째, 자재성(自在性)이다. 공은 주체적 주체일 뿐더러 완전히 자재한 주체이다. 어떤 대상, 심지어 부처님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진실로 자유로운 경계를 말한다. 불교의 진정한 해탈은 이러한 자재성이 철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집착하거나 걸림이 없이 즉각적으로 상황에 응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유희 삼매의 경지이다. 이를 인격적으로 일러 무위 진인(無位眞人) 또는 무의 도인(無依道人)이라 한다.

여섯째, 능조성(能造性)이다. 바로 창조성을 말한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찬란한 인류 문명을 형성해 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인간에게 유용한 물건들을 만들어냈어도 생명만은 창조할 수 없었다. 즉 인간의 창조성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모든 생명까지 만들어 낸 전지전능한 창조자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실증되지 않은 신화에 불과하며 단지 그렇게 믿어질 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유심(唯心)의 실증이다. 이러한 마음은 물과 같아 거기에서 물결이 수시로 일어나고 이윽고 사라지되 물 자체는 불기불멸(不起不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을 바탕으로 무수한 물결이 생겨났다 사라지듯 공으로부터 숫한 사물들이 창조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은 광대무변하고 못 미치는 데가 없으며 모든 생명의 바탕이요 창조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 공의 인격화인 법신불 비로자나불을 가리켜 '변일체처(遍一切處)요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한다. 구체적으로 원효(元曉) 스님은 이 비로자나불의 특징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⑴ 크나큰 지혜요 광명이다(大智慧光明)
⑵ 세상의 모든 대상계를 두루 비춘다(遍照法界)
⑶ 진실 그대로를 아는 힘이 있다(眞實識知)
⑷ 깨끗한 마음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自性淸淨心)
⑸ 영원하고 행복하며 자유로우며 깨끗하다(常樂我淨)
⑹ 청결하고 시원하며 언제나 변함이 없이 자재하다(淸凉不變自在)

바로 무에서, 그 고요한 침묵에서 이 모든 삼라만상이 꽃을 피우고 열매을 ?으며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그것이 화엄(華嚴)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이 화엄의 비로자나 부처님을 극진히 섬겨왔다. 신라는 그 삼국 통일의 원리를 이러한 화엄의 사상에서 빌어왔다. 해인사, 부석사, 범어사를 비롯한 전국의 유수한 사찰이 화엄의 세계관 위애 중중무진 꽃을 피운다. 거기 비로자나 부처님이 지권인(智拳印)을 한 모습으로 침묵의 미소를 보내고 있다. 보림사나 도피안사의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도 그렇게 천년을 훨씬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미소짓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서양적 사고 방식에 세뇌당하여 이러한 무를 등안히 하고 너무 유 내지는 존재에만 치우쳐 왔다. 그러나 그 존재의 세계는 한계가 있는 세계이고 때가 낀 세계이며 오히려 어두운 세계이다.

 
☞ 출처 : 조계사


출처 : 까치
글쓴이 : 희작(喜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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