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방한] 교황 "다른 이와 공감하는 것이 모든 대화의 출발점"(전문)
매일경제 입력2014.08.17 11:39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나흘째를 맞는 17일 충남 서산의 해미성지에서 亞世亞 主敎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날 자리에는 韓國 天主敎 主敎團 15명, 아시아 각국에서 온 추기경과 주교들 50여 명이 참석했다.
교황은 본격적인 만남에 앞서 강론 연설을 통해 "共感하고 진지하게 受容하는 자세로 相對方에게
우리의 生覺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眞正한 對話란 있을 수 없다"며 "따라서 自身의 正體性을 明確히
意識하고 다른 이와 共感하는 能力이야말로 모든 對話의 出發点"이라고 助言했다.
아울러 "우리의 대화가 獨白(monolog)이 되지 않으려면 生覺과 마음(心)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文化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强調했다.
교황은 또 "우리의 正體性을 確立하고 表現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니다"면서 "왜냐하면
罪人인 우리는 恒常 多樣한 方式으로 나타나는 世俗 精神에 誘惑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황은 세 가지 예를 들어 正體性 確立의 重要性을 전했다.
그는 "첫째는 相對主義라는 거짓된 빛이다. 相對主義는 眞理의 빛을 흐리게 하고, 우리 발이 딛고 선 땅을
뒤흔들며, 混亂과 絶望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狀況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며 "그저 하나의 思考體係가 아니라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正體性을 무너뜨리는, 每日의 日常에서 實踐되는 相對主義"라고
말했다.
교황은 두 번째로 被象性을 꼽았다. 그는 "피상성은 무엇이 옳은지 分別하기(필리 1,10 참조)보다는
最新의 流行이나 器機, 娛樂에 빠지는 傾向을 말한다"며 "덧없는 것을 찬양하는 문화, 회피와 도피의
길이 수없이 열려있는 文化에서는, 이런 피상성이 사목에 重大한 問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우리 삶의 原則인 眞理는 後退하고, 德行은 形式에 불과하게 되며, 對話는 한갓 協商의 形態나
서로 反對하자는 合意로 轉落하게 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誘惑을 들었다. 교황은 "誘惑도 있다. 쉬운 解決策, 이미 가지고 있는 公式,
規則과 規定들 뒤에 숨어 確實한 安全을 選擇하려는 誘惑"이라며 "信仰은 自身에게만 沒頭하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면서도 겸손하게 希望과 사랑을 증언하게 해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 강론 연설 전문.]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충실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이 곳 聖地에 함께 모인 여러분께 主님 안에서 한 兄弟로서 따뜻한 인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韓國 殉敎者들의 사랑의 證言은 비단 韓國敎會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까지 祝福과 恩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들 祈禱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靈魂들의 充實한 牧者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영 말씀을 해 주신 그라시아스 추기경님께 감사 드리며, 또한 聯帶를 이루어 각국 지역 교회의 효과적인 사목 활동
증진을 위하여 일하는 亞世亞 主敎會의 聯合會에도 感謝를 드립니다.
많은 多樣한 文化가 생겨난 이 廣闊한 大陸에서, 敎會는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對話와 열린 마음으로 福音을 證言하라는 要請을 받고 있습니다. 事實, 對話는 아시아 교회 사명의 本質的인 部分입니다
(「아시아 교회」, 29항 참조). 그런데 다른 이들과, 또 다른 문화와 對話를 試圖할 때, 무엇에서부터
始作해야 하겠습니까? 또 目標 地点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根本 基準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分明 우리의 正體性,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正體性입니다. 우리가 우리 自身의 正體性을
意識하지 않는다면 眞正한 對話를 나눌 수 없습니다. 共感하고 진지하게 受容하는 姿勢로, 相對方에게
우리의 生覺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眞正한 對話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自身의 正體性을 明確히
意識하고 다른 이와 共感하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對話의 出發点이라 하겠습니다.
自由롭게 열린 마음으로 意味있는 對話를 하려면
우리 自身은 누구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願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對話가 獨白이 되게하지 않으려면,
生覺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文化를 받아들여야만(受容/許容)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표현한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는 恒常 多樣한 方式으로 나타나는 世俗적인 精神에 誘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중 세 가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相對主義라는 거짓된 빛입니다. 相對主義는 眞理의 빛을 흐리게 하고, 우리 발이 딛고
선 땅을 뒤흔들며, 混亂과 絶望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狀況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相對主義는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도 影響을 미쳐서, 急變하는 混亂스러운 世上에도 "變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이는 어제도 오늘도 또 永遠히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 窮極의 土臺를 두고 있습니다."
(「사목 헌장」, 10항; 히브 13,8 참조)라는 事實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相對主義란 그저 하나의 思惟 體係가 아니라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正體性을 무너뜨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實行되는 相對主義입니다.
두 번째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방식은 被象性입니다. 피상성은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기(필리 1,10 참조)보다는 최신의 유행이나 기기, 오락에 빠지는 경향을 말합니다. 덧없는 것을 찬양하는 문화, 회피와 도피의 길이 수없이 열려있는 문화에서는, 이런 피상성이 사목에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사목 활동과 그 이론에도 영향을 미쳐 信者들과의 만남을 가로막고, 특히 탄탄한 敎理 敎育과 健全한 靈性 指導가 필요한 靑年들과의 直接的이고 有益한 만남을 防害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原則인 眞理는 後退하고 德行은 形式에 불과하게 되며, 대화는 한갓 協商의 形態나 서로 反對하자는 合意로 轉落하게 됩니다.
또한 세 번째 誘惑도 있습니다. 쉬운 解決策, 이미 가지고 있는 公式, 規則과 規定들 뒤에 숨어 確實한
安全을 選擇하려는 誘惑입니다. 信仰은 自身에게만 沒頭하는 것이 아닙니다. 信仰은 그 本性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며 증언을 불러일으킵니다. 선교를 낳습니다. 곧, 신앙은 우리가
담대하면서도 겸손하게 희망과 사랑을 증언하게 해 줍니다. 성 베드로 사도께서는 우리가 지닌 希望의
理由에 대하여 누가 물어도 對答할 수 있도록 언제나 準備해 두라고 말씀하십니다(1베드 3,15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窮極的으로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과 所望하는 것을 또 우리가 믿는 그분을 우리의 모범을 통하여
보여 주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2티모 1,12 참조).
다시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살아 있는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根本的인 正體性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對話가 始作되며, 이로부터 진지하고 솔직하고 가식 없이 日常의 對話와 사랑의 對話를 나누고, 또 좀 더 公式的인 對話의 機會에 스스로 나서도록 요청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므로(필리 1,21 참조)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하여" 準備된 姿勢로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말합시다. 그분 말씀의 單純性은, 우리 삶의 單純性에서 明確히 드러나고, 우리 對話의 單純性에서 드러나며 우리 兄弟姉妹를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일의 單純性에서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의 正體性의 또 다른 側面에 對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열매 맺는 것입니다.
우리의 正體性은, 主님과 對話하고 性靈의 引導를 받는 恩寵으로부터 생겨나고 그 恩寵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正義와 善과 平和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自身의 삶에서, 또 여러분에게 맡겨진
共同體의 삶(世上)에서 맺고 있는 열매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진행되는
교리 교육이나, 청소년 사목에서 번창하는 社會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奉使에서, 그리고 사제직과 修道生活에 대한 聖所를 키워 내는 努力들에서 그리스도인의 正體性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眞正한 對話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분명한 正體性과 함께, 共感할 수 있는 能力도 요구됩니다.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말로 하지는 않지만 傳達되는 그들의 經驗, 希望, 所望, 苦難과 걱정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共感 能力은 靈的 洞察力과 改人的 經驗의 結實이며, 우리가 다른 이들을 兄弟姉妹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의 生覺을 말과 行動으로 表現하지 않는 것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傳達하고자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對話를
위해서는 우리가 眞正으로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思慮 깊은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합니다.
共感하는 能力은 眞正한 對話를 可能하게 하며, 眞正한 對話에서는 兄弟愛와 人間愛의 經驗에서 나오는
말이나 生覺 行動, 그리고 質問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眞正한 對話는 마음과 마음이 疎通하는 眞正한 만남을 이끌어 냅니다. 다른 이들의 智慧로
우리 自身이 豊盛해지며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과 함께 더 큰 理解와 友情, 聯帶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對話를 향한 우리의 投身은 降生의 論理에 그 根據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으며,
우리가 하는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아시아 교회」, 29항 참조).
다른 사람들에 對한 열린 마음으로, 저는 아직 聖座와 完全한 關係를 맺지 않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몇몇 國家들이 모두의 利益을 위하여 주저 없이 對話를 推進해 나가기를 希望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저를 형제로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활한 땅과 그 오랜
문화와 전통을 가진 亞世亞 大陸을 보면, 하느님의 計劃 안에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 共同體는 참으로
작은 羊 떼(pusillus grex)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무리이지만 그럼에도 福音의 빛을 世上 끝까지
傳해야 하는 責任을 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羊들을 잘 아시고 모든 羊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牧者,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당신의 一致, 그리고 全 世界에 흩어져 있는 당신 羊떼의 다른 모든
構成員들과 여러분의 一致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祈禱합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聖母 마리아의 全軀에 여러분을 맡겨 드리며, 또 主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恩寵과 平和의 保證으로서 眞心으로 저의 降福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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