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십악참회/신업

장백산-1 2014. 10. 4. 02:18

 

 

 

 

법상스님의 천수경 강의 제10강 - 십악참회(신업)|영상법문 녹취록

 

네 반갑습니다. 오늘은 이제 일요일이 끼여있는 초하루네요.

그래서 오늘은 보통 초하루 보름 기도때 천수경 강의를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천수경 강의 하던 부분을 계속해서 하도록 하겠는데요.

오늘은 뭐 간단한 부분입니다. 十惡懺悔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殺生重罪今日懺悔부터 나오는 부분을 이제 공부할 차례이고

 

 

십악참회 기도를 어떻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열가지 중죄라고 부처님께서 얘기한 부분,그리고 열가지 중죄를 참회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열가지 중죄가 어떤 것인줄 알고,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참회하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가지 참회해야 할 것, 즉 열가지 죄라고 알려져 있는,

열가지 악업이라고 알려져 있는 열가지가 있는데요.

대표적인 열가지인데 그게 身口意 三業으로,우리가 業을 짓는다고 그러는데,

선업을 짓고 악업을 짓는다 말이죠. 그래서 으로도 선,악업을 짓고, 으로도 선,악업을 짓고, 

생각으로도 선업과 악업을 짓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으로 짓는 악업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가장 안좋은 가장 우리가 짓지 말아야할 세가지를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셨던거죠. 그게 殺生과 偸盜와 邪陰이구요.

으로 짓는 악업 가운데 네가지 망어, 기어, 양설, 악구

그리고 생각으로 짓는 세가지 악업이 貪心과 瞋心과 癡心이라고 해서

그렇게 열가지 악업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신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몸과 말과 생각으로 악업을 짓는데,

이라는말은 우리가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하는 行爲잖습니까? 행위, 움직임.이런것들을 전반적으로

이라고 하는데, 이라는말이 固定된 實體가 있어서 우리가 하나의 行爲를 하면,

그 行爲가 絶對的인 惡이라는 行爲가 있어서, 또 善이라는 行爲가 있어서,

惡行을 했을때는 절대적인 죄악이 되고 죄악이라는 실체로 남게 되어서,그것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거나

또 선업을 지으면 그 선업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 業報을 반드시 받게 되거나 뭐 이렇게 우리는

보통 알고 있는데, 아~ 그런것이 아니다. 이제 선업과 악업이라는  또힌 우리가 마음으로 지은 것이고,

마음으로 무너뜨리고 만들고 하는겁니다.

 

이 三業이라는 것이 全部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固定된 實體가 딱 定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우리는 나쁜 일이 생길 때, 괴로운 일이 생길 때, 보통 내가 前生에 業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이렇게 불자들이 많이 알고 있는데,  그건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초기불교 부처님 생생한 법음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 가르침에 보면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크게 일곱가지 이유로 일어날수 있다고 그래요. 그 중에 일곱가지 중에 한가지가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곱가지 理由 중 한가지가 인데  그 일곱가지 理由를 全部 다 業으로만 生覺한다

말입니다. 안좋은 일이 일어나는 理由는 全部 다 業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일어나거나, 뭐 다양한 어떤 理由를 가지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반드시 그것은 無條件 다  業때문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業障이 많은 사람만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이 말이 절대 아닙니다.내가 業障이 많기 때문에

내가 가난하게 태어났다. 業障이 많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태어났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善業을 많이 지은 사람도 스스로의 選擇에 의해서 또는 어떤 깨닫고자 하는 스스로의 어떤 용기있는

選擇에 의해서 좀 힘든 與件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또 많은 세월 좋은 여건과 워낙 복을 많이 짓다 보니까 좋은 여건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던 사람이

내가 삶의 均衡을 잡기 위해서, 혹은 多樣한 삶의 經驗과 體驗을 通해서 삶을 배우고 깨달아 가려고

일부러 스스로 選擇해서 苦痛스러운 狀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分別만 하지 않으면 事實은 善業,惡業이라는 말도 우리의 觀念에서 만들어진거지,

本來 이 世上에는 善業도 없고 惡業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요즘의 日常은 좀 살만하다. 요즘은 좀 괴로운 일이 많다.

이렇게  머리 속에서 生覺해서 알음알이로 分別하는 마음일 뿐이지,

事實은 여러분의 요즘 日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生覺으로 좋다 나쁘다 判斷 했을 뿐이지, 그게 진짜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새옹지마라는 말에서도 볼수 있듯이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判斷 할 수가 없는겁니다.

 

그리고 存在의 根源에서 判斷을 하지 않는다면, 分別하고 解釋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그것 自體로써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써 완전하고 

완벽한 삶이 피워나고 꽃 피워나고 있는 것이다.

 

어두울 때 어두운 밤에는 아주 깜깜한 暗黑속에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하얀색도 안 보이고 빨간색도 안 보이고 파란색도 안 보이고 전부 다 검은색으로만 보이잖아요?

전부 다 검은색으로만 보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아름다운 풍경, 안좋은 풍경 이런 分別이 없어요.

시체를 보든 아니면 아름다운 여인을 보든 아무 差異가 없습니다. 그냥 온통 검을 뿐이지.

그런데 하늘에서 햇빛이 탁 비추면 혹은 성냥불이라도 하나 딱 켜면 갑자기 일순간에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 잘나고 못난 것, 크고 작은 것, 온갖 分別이 갑자기 생겨나지 않습니까?

 

本來는 그런 分別이 전혀 있지 않다 말이죠. 그런데 켜진 빛은 빛이라는 것은 분별이 있겠습니까?

불이 딱 켜졌을때, 잘났다 못났다 분별이 빛에게 있겠어요? 빛은 그냥 비출 뿐이지.

 

그 빛을 딱 비췄을때 우리 사람들이 갑자기 이걸 보고서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이걸 판단하는 것 뿐이지. 언제나 빛은 비치는 겁니다.그래서 事實은 根源에서는 世上도, 삶도,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錯覺하는 게 이겁니다.

 

마음이라고 우리가 通稱해서 말하는데, 우리가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그 마음을

佛敎에서는 마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意識이라고 부릅니다. 意識. 卽 眼耳鼻舌身意할 때 意識입니다.

意에서 일어난 識이라는 말이죠. 알음알이 分別心/分別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알음알이 分別心은 빛이 비추는데서 모든 것을 다 差別해서 알아차린단 말이예요.

나와 너를 差別하고  뭔가 알아 들었다 하면 벌써 差別심 아니겠습니까?

너와 나를 分別하고 너와 나를 差別해서 이건 좋은거 저건 나쁜 것 하고 알아들었으니까,

이건 다 差別心으로 알아듣는다 이 말이예요.

 

그런데 우리의 根源性稟, 本來性稟, 佛性이라고 말하는, 本來자리라고 이름하는 本然의 이 性稟은

差別해서 알아 듣는 性稟이 아닙니다.그냥 이 世上 모든 것을 그냥 그저 비출 뿐이지. 햇볕처럼...

 

햇볕은 모든 世上을 비춰서 世上 萬物이 드러나게 하잖아요.

우리가 分別하기론 잘났고 못났고 온갖 사람들을 生覺으로 만들어 내지만,

太陽은 그런 걸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냥 세상 모든것을 비춰냈을 뿐이지.

비췄을 때 모든 것이 그냥 하나로 그냥 分別이 하나도 없죠.

 

그런데 빛을 딱 비추면서도 太陽은 빛을 비출 뿐인데, 비추고 있을 뿐인데,

우리가 生覺으로 意識으로  그것이 맞느니, 틀리느니, 좋으니, 나쁘니 하면서

내 人生이 힘들느니 괴롭다느니 이렇게 끊임없이 분별 解釋하는 것 뿐입니다.

해석만 하지 않으면 분별만 하지 않으면 우리 삶에는 善業과 惡業이 따로 없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따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善業과 惡業이라는 말도 事實은 꿈과 같은 환상속에서 일어나는

우리들의 觀念이 만들어낸 幻想일 뿐입니다. 선업의 果報를 받고 있다. 악업의 果報를 받고 있다.

이 말도 다 幻想일 뿐이예요.

 

즉 꿈꾸고 있는 사람이 꿈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는  意識이 만들어 낸 觀念 아니겠습니까?

꿈이라는 自體는, 꿈이라는 世上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꽃도 있고, 바람도 있고,

풍경도 있고, 모든 게 다 나퉈지지만 그런 것들이 따로 따로 다 있는게 아니고

意識이 만들어낸 幻想의 꿈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아니겠습니까?

 

꿈속에서 좋은 꿈을 꾸고, 좋은 業을 짓고 좋은 果報를 받고,

나쁜 業을 짓고 나쁜 果報를 받더라도 그건 다 意識의 장난일 뿐이지. 本質에서는 아무 問題도 없죠.

꿈을 딱 깨고 보면 악몽을 꿨어도 꿈을 깨고 일어나서 아이구 이거 악몽이였구나 하면 安心이 되고

그 악몽에 끄달리지 않죠. 아이고 이게 實際가 아니었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安心을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좋은 일이 있었어도  꿈깨고 나서는 이건 꿈이였구나 하고 털어버리고 말지.

 꿈에 우리가 얽매여서 괴로워하고 執着하지 않는다 이 말이예요.

 

이 꿈 속 일들 처럼 우리 삶에 등장하는 모든 일들, 어떤 괴롭다 즐겁다 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렇게 꿈과 같이 우리의 本來의 마음이 비추어 낸 것일 幻影일 뿐입니다.

그냥 비추어 낸 그림자일 뿐인데 우리들의 알음알이 分別心이 衆生心이 世上 모든 걸 나누는 거예요.

分別하는 거예요. 좋다 나쁘다 내 人生은 비참하다.내 인생은 괴롭다. 내 자식은 잘하고 있다.

내 자식은 못하고 있다. 이렇게 分別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언제나 완전하게 아름답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 애들이 제대로 못살고

있다고 生覺해서 막 억지를 부리고 막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너는 공부를 안하냐? 너는 자꾸 왜 떠드느냐? 너는 왜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뛰어 다니느냐?고 그러는 것이죠

지극히 당연한 애들의 삶을 내가 자연스럽게 내버려뒀을 때는 당연한데,

 

이런 자연스런운 것을 자꾸 막으려고 들면서 어른들이 그러면서 그런 아이들의 自然 性稟은 문제고

내가 生覺했을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는 조용해야 되고 뛰면 안되고 무조건 공부를 해야되고

게임하면 안되고 뭐 이런 것들 옳다 그르다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딱 맞으면 얘는 착한 아이,

이 틀에 안 맞으면 얘는 나쁜 아이, 바꿔야 될 아이. 이렇게 내가 분별하지만 않으면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自己個性이 있을 뿐이지,

옳고 그른건 없어요. 옳고 그른 사람은 없단 말이예요.

自己 나름대로의  自己다운 삶의 性稟대로 自己다운 어떤 빛깔대로 살고 있는 겁니다.

 

꽃이나 나무나 풀들이 저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듯이, 단 하나도 같을 수 없듯이,

같은 나무라 할지라도 같을 수 없듯이, 사람도 저마다 各者 自己 個性이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가 이거는 잘하는데 저거는 못해요. 이거는 성적이 좋은데, 저거는 성적이 안좋아요.

이거는 다 헛것입니다. 헛거. 우리가 그렇게 가르치는 자체가 아주 잘못된 걸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린 거는 없습니다. 그저 자기 다운 삶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지.

 

자기다운 삶의 개성과 어떤 번뜩이는 자기다운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지.

그래서 劃一的인 것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자기다운 게 아름다운 겁니다.

이맇게 딱 規範을 나눠놓고 線을 딱 그어놓고 이만큼은 問題고 이만큼은 定常이다라고 말하는 

이건 錯覺입니다.

 

精神病院에서 근무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은. 우울증이라는 것을 진단하는 것이 대개 애매하답니다. 사실상. 선이 없대요. 얼마나 어디에서 부터는 요만큼 우울증이고 요만큼 우울증이 아니다. 이런게 없답니다. 어떻게 따지면 대개분 사람들이 거의다 우울증일수도 있고 어떻게 따지면 우울증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病일수도 있고, 그런데 그 病을 우리는 진단받기를 좋아하잖아요. 뭐든지

A 아니면 B 이런 性格 自體가 分別에서 오는 그런 어떤 差別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봤을때는 열가지 중죄를 얘기를 했지만, 그 또한 사실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고,

이것 또한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非實體的인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알고 있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우서 내가 타인을 징벌할 아무런

權限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他人이 아무리 나쁜 짓을 했더라도 그 사람을 나쁘다고 할 권한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우리를 징죄하지 않는다 이 말이예요. 벌을 주고 이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因果應報라는 法則은 그냥 하나의 宇宙的 에너지均衡의 法則일 뿐인 겁니다.

 

世上이 均衡 있게 돌아가는 均衡이 깨지면 均衡을 맞추려고 하듯이

에너지균형이 깨지면 에너지균형이 맞아야지 되지 않습니까? 그냥 지극히 당연하 이치잖아요?

두개의 에너지가 탁 깨지면 다시 맞추려고 하잖습니까? 그것과도 같은 自然스러운 理致일 뿐이지,

그걸 부처님이 주관하거나, 신이 주관하거나 그런게 아닙니다.

 

신이나 부처님이 죄 지은 사람 지옥에 보내고 이런게  전혀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벌일 뿐이지.

그리고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그 누구도 벌 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벌 줘서도 안되고.

그것은 벌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 하나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게 오른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말입니다. 오직 모를 뿐이지...

 

어떤 것 한가지를 이게 우리가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뚜렷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안다고 錯覺할 뿐이지. 내가 똑똑하게 많이 알고 있다고 錯覺 하는 것 뿐이지.

어쩌면 우리보다 저 아이들이 우리가 아이들이 비정상이라고 여기고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뭘 모른다고

여길 뿐이지. 사실은 그 아이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깨어 있고 지혜로운 건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은 아이로 있다가 어른이 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걸 배웠다가 괴롭거든요.

내가 판단하고 분별하니까 내가 만들어 놓은 괴로움 때문에 스스로 괴롭거든요.

그러니까 괴로움을 없애고 싶어서 절에 나와서 수행을 한다 말이예요.

수행을 하다가 나중에 탁 깨닫고 보면 다시 어린애가 돼버리는 겁니다. 分別없는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봤을 때 깨달은 者는 어찌 보면은 좀 危險할 수도 있죠.

뭐 計算하고 따지고 이러지 않으니까, 나다 너다가 없으니까. 내가 누구한테 잘 보였겠다는 이런 마음도

없고 그러면 어쩌면 우리가 잘못하는 것을 우리는 情에 얽매여 있으니까,좀 둘러서 둘러서 얘기 하잖아요? 그런데 뭐 그냥 둘러서 얘기 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죠. 그냥 바로 얘기 할 수도 있겠죠.

 

부처님의 어떤 일생을 보면 때로는 조금 우리들이 알음알이로 머리 굴러서 이해했을 때 이해 안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아무 分別心이 없는 겁니다.

오직 한 마음 중생 구제 하겠다라는, 지혜를 전하겠다라는 그 한 마음으로 모든걸 하니까,

誤解 받는 일도 많이 생길 수 있단 말이죠. 分別이 없으니까,

우리가 아이들을 그렇게 分別 하듯이 부처님을 分別해서 알아차리면 안된다 말이예요.

 

그래서 이 열가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참회를 하라고 하는 이유는 뭐냐면?

지금 이 자리에서 참회를 하면 그 모든 것은 罪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참회는 무조건 용서될 수 밖에 없다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열가지 罪는 本來 罪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罪라고 錯覺 하는 것일 뿐이지,

本來 罪가 아니고  단지 꿈 속에서 일어난 虛妄한 意識의 림자 일 뿐이지. 業의 그림자일 뿐인 거예요.

 

業이라는 그 自體의 그림자가 뭐겠습니까?  우리가 그림자자 지 혼자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이나 막대기나 나무나 뭔가가 실체가 그림자를 만들게 할 만한 뭔가가 있어야지만

그 因緣따라 그림자가 만들어지잖아요? 獨者的으로 實體的으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예요.

 

이런거 모든 것이 실체적인 게 아닙니다. 죄를 지었어도 그게 실체가 아니다.

그것 자체로 힘을 가지고서 뭔가 내가 죄인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느냐?

그게 아닙니다. 그냥 業의 그림자일 뿐이다.

業이 비춰낸  業이나 因緣따라 비춰내서 만들어 낸 그러한 虛妄한 分別心일 뿐이란 말이죠.

그러니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불교에 오면 부처님 가르침에 오면 이 법당이란 곳에 오면 그 누구도 罪人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데 누가 죄인이겠어요.

죄 지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단 말이예요. 아무런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소금물의 비유를 통해서 罪를 아무리 지었다 할지라도

소금물은 다 먹어야 되지만 그 짠 걸 다 먹어야 되지만,

작은 잔에다 먹으면 짜지만 큰 그릇을 키우면 큰 잔에다 먹으면 맛있게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죄업을 졌어도 그 죄를 좋게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瞬間이 重要하니까,

 

그래서 뒤에 가면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해서

백겁동안 지은 죄도 한 생각에 딱 탕진 돼버린다. 끝나 버린다라는게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렇게 중죄를 금일참회 참회하는 마음을 딱 일으키는

그 한 生覺에 모든 罪業이 탁 消滅될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 열가지 죄업을 참회하는 내용인데요.

첫번째로 殺生에 대한 중죄를 금일 참회한다 하는 얘기입니다.

살생을 많이 하게 되면 이번 생에 인간으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수명이 단축되게 된다고 그럽니다.

소극적으로는 불살생을 하라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면 이것은 放生을 하라는 겁니다.

생명을 살려주는 行爲를 많이 해라.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하지 않고 살려 주는 행위를 해라.

 

그 살려주는 행위는 물고기를 갖다가 놔주는 것만이 살려 주는 行爲가 아니고,

오히려 요즘 같은 데서는 수족관에서 큰 물고기를 잡아다가 잘 살지도 못하는데,

방생해 가지고 죽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방생이 아닐 수도 있죠.

 

眞正한 放生은 오히려 나무 한 그루를 더 살리고 풀 한 포기를 더 심고

自然을 훼손 시키지 않고 生態界가 살아 있게 만들어 줌과 同時에

自然이 그대로 살게 되고 自然 萬物이 살아 나지 않습니까?

 

자연이 살아나면 인간도 살아날 수 밖에 없는 緣起的인 構造를 띠고 있기 때문에

緣起法에서 살펴봤을 때 살생하지 말라는 말은 꼭 누구가를 죽이지 마라는 것만이 아니라,

죽지않는 土臺를 만들어 주는 것, 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생명을 살리는 방생이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어떤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것도 방생이 됩니다.

불법을 공부해서 生死的 思考方式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래서 나고 죽는 죽음이 있는 사람들

난 이제 늙었으니까 곧 죽겠지.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生死가 本來 없다라는

깨달음을 주게 된다면 나고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나고 죽는 이런 어떤 것에 얽매이지 않는

이런 어떤 큰 마음을 깨닫게 되겠죠?

 

그렇게 하게 되는 자체가 놀라운 방생이죠. 그래서 사실은 不殺生의 精神은 그냥 단순하게 죽이지 말라.

이 말이 아니라. 생명을 온전히 살려주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살려 주는 것인가

이번 생에 나고 죽고 나고 죽고 반복하는 그거는 사실은 業이 投映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立場에서는 죽는 것이 일생 일대 큰 일 같지만

眞理의 立場에서 본다면 죽고 사는 건 그냥 業이 變하는 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초등학교 끝나면 중학교 올라가는 것 같은 그런 정도의 차이 밖에 없습니다. 根源에서는...

그러니 그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살생하지 마라. 방생하라는 말도 眞正으로 生命을

살려줘라. 진정으로 생명을 살려주려면 목숨 구해줘가지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목숨 구해줘도 다음 생에는 또 죽게 되고, 반드시 아무리 목숨을 열번을 구해줘도

그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될 수 밖에 없으니까.그러니까 그게 목숨을 진짜 구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있는거죠.

 

그러니까 부처님의 출가를 우리가 이렇게 받드는 理由는 어찌보면 부처님은 정말 世俗的인 觀点에서

봤을때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처럼 보이죠. 부처님이 석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리면 왕자가 없는데 임금이 없는데 그 한 나라를 버리고 떠나 갔다 말이예요.아내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떠나 갔다 말이예요.

떠나 가기만 한게 아니라, 떠나 갔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 가지고 법문을 설하면서

자기가 왕을 해야되는데 안하고 떠나갔으면 다른 아들들 다른 왕자들이라도 왕을 해야되는데,

그 왕자들까지 전부다 출가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싹 끌어 가지고 가서 출가 교단을 만든단 말이예요.

 

그 우리 세속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얼마나 못할 짓을 한겁니까? 심지어 난다는 그날 왕의 즉위식이

대관식을 하는 날이고 결혼식을 하는 날인데, 그날 바로 출가를 시켜가지고 데려 가기도 하고

 

우리가 봤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짓을 했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생각 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요?

지금 내가 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이 사람들을 지금 내가 조금 더 부강하게 만들어주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대로 살면 언젠가는 우리는 누구나 다 죽을 것 아니냐?

죽음의 어떤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아닌가?

내가 生死를 뛰어 넘는, 이 生死法을 뛰는 넘는 이 本然의 가르침을 깨달아서

일체중생을 구제해야되겠구나. 그래서 영원히 생사의 고통 속에 사로잡히지 않는그런 삶의 진정한 선물을 줘야되겠구나. 진정한 방생을 해야되겠구나.그런 마음으로 출가를 해서 法을 깨달은 것이죠.

 

그러니 우리들 生死法 안에 갇혀 있는 思考方式에서 부처님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永劫을 걸쳐서 끊임없이 反復하는 이런 모든 것에서 완전히 우리를

그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그런 삶을 사시게 된 것이죠.

 

이 불교의 불살생 계율이 지금 환경론자들 환경학자들 뭐 이런 미래학자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아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표적인 가르침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원 다닐 때 15년 전에는 불살생의 계율이 갑자기 환경론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이슈가 되면서

이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제가 좀 의야해했어요.

뭐 살생하지 말라는게 뭘 그렇게 대단한거길래 이렇게 얘기 했지. 이렇게 생각 했단 말이죠.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불살생의 정신은 타종교에서 말하는 불살생의 정신과 다릅니다.

사람만 죽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조차 곤충이나 짐승조차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이야기이구요.

 

또 이것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 자연 그대로 완전히 살리는 지속 가능한 우리만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모든 이들까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과 나무 한 그루와

풀 한포기와 짐승들 생태계까지 전체를 살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살려야 되는냐?

 

그 이유는 바로 緣起法이기 때문에 서로가 다 連結 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 미래의 사람이 연결되어 있고, 나와 짐승들이 나와 자연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비심이라는 거죠. 동체대비심이라는 거죠.

 

진정한 불살생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심이다.

그래서 불살생의 정신은 연기법을 깨닫는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자비심이

부처님 가르침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실천의 방법입니다.

 

그러니 이 불살생을 실천한다면, 인류의 미래가 암담할 수가 없죠.

지속 가능해질 수 밖에 없는겁니다. 그래서 불교의 불살생은 놀라운 것을 가지고 있다.

 

보통 우리가 한 사람을 누구를 죽이면 보통 그렇죠. 뭔가를 죽이면 나도 죽게 되는 과보를 받게 됩니다.

그 과보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어지간해서는 받는다 말이예요. 아라한과를 증득해도 받는다.

 

그러나 아라한과를 증득한 다음에는 받아도 받는 바가 없이 받는거죠.

그러니까 불교는 부처가 되어서 즉 깨달음을 얻었으면,

모든게 우리 세속적인 눈으로 봤을 때는 완벽한게 아닙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앙굴리마라는 구십구명을 죽였기 때문에 아라한과를 딱 증득했지만,

탁발을 나갈때마다 사람들에게 막 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곤 했단 말이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삶의 이치를 굳이 거스릴 필요를 못 느끼는거예요.

쉽게 말해서 크게 깨달은 사람은 인과를 초월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런데 굳이 애를 써서 인과를 초월할 아무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대로 자연스럽게 인과를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여도 아무런 흔적이 없으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욕을 한마디 했을때, 저 사람이 나한테 욕을 하면,

내가 마음이 약한 사람같으면 욕을 얻어 먹으면 괴롭지만,

내가 중심이 딱 잡혀 있고 힘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나한테 욕해봐야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그 사람은 욕하고 싶은 사람은 욕해도 나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작은 하찮은 微物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불살생의 정신에서는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

하다못해 집안에 들어온 모기조차도 최대한 노력을 해야됩니다.

당장 모기약을 뿌려서 죽이려고 하다보다는 최대한 노력을 해야되요.

우리가 노력을 하면 그 노력하는 마음을 이 갸륵한 마음을 우주법계는 아는 것 같아요.

 

저 옛날 같으면 모기를 손으로 잡는게 쉽지 안잖아요. 죽이지 않고 잡는게...자꾸 도망가니까, 안보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이 방안에 들어온 모기를 살려서 내보내야겠다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모기를 잡잖아요? 신기하게 모기가 손안에 탁 잡힙니다.

 

밖에 나가서 탁 내보내주면 탁 나가요. 그런데 제가 진심으로 이렇게 된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마음을 내고 나니까,진짜로 그때부터 모기들이 딱딱 잡혀요. 그때 그때...

굳이 때려 잡지 않아도 탁탁 잡혀서 밖으로 나가게 되고 그리고 어떨 때는 분명 나갈 어디 구석이

분명히 없는데, 어느 순간인가 보면 없어져 있고 이러기도 하고.

 

그런 어떤 그것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마음속에서 마음이 연습되는 겁니다.

사실은 하잖은 미물 모기 한 마리와 나와의 관계가 아니라,모기 한마리와 나와의 관계는

나와 우주법계 전체와의 관계를 대변해 주는 하나의 에피소드입니다.

 

즉 내가 모기 한마리를 이 자식 이러면서 화가 나가지고 탁 때려 죽이면

때려 죽이는 순간 이 화라는 마음이 온 우주법계 전체로 퍼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내가 이 작은 미물조차 귀하게 여기고 이 또한 생명이구나 하고 여기고

함부로 바로 죽이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내가 잘 내보내줘야지 하는 마음을 낸다 할지라도.

또 한번 모기한테 탁 물렸을때, 막 짜증을 내기 보다 야~ 나는 이렇게 한번 따끔하고 한 십분 간지럽고

말겠지만, 이 아이에게는 정말 오랫동안 못먹고 그냥 배가 고파가지고

햐~ 죽을 것처럼 배가 고프다가 이걸 한번 먹고 얼마나 달콤하고 얼마나 맛있고

얼마나 참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한번 하면 이게 뭐 아프긴 하지만 내가 뭐

보시를 실천한거니까, 행복해진다 말이예요.

 

그러니까 같은 상황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복이 지어집니다.

어차피 모기가 내 피를 물어 먹었어요.모기가 어차피 내 피를 먹었는데, 화를 내면 이건 공덕이 안되죠.

증오심 화만 우주법계로 전달하게 되는 겁니다.

 

어차히 모기가 내 피를 먹었을때, 야~ 모기에게 오늘 내가 보시를 했구나.

내가 모기에게 야~ 열마리 스물마리에게 보시를 했구나.이걸 기쁜 마음으로 생각하면

정말 한 생각 차이입니다.기쁜 마음으로 보시했다는 마음을 내면 그 마음에 보시의 마음이 쌓이는 겁니다.

증오 원망의 마음이 아니고, 보시의 마음 축복의 마음이 쌓인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방생과 같은 마음이 된다.

 

그래서 이처럼 한 생각을 가지고 사실은 살리고 죽이고 하는 거지. 실제 살리고 죽이는 이런게 아닙니다.

내가 수도 없이 길을 걷고 하면서 죽인 개미가 몇마리겠어요? 알게 모르게 죽인 개미가...

 

그래서 내가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서 그 어떤 것도 큰 業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을 금방 놓아 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그 래서 불살생의 정신에서는 그 어떤 모든 미물들도

그 모든 것들도 내가 마음을 낼 때 어떻게든 하여간 도와줘야 된다.

내가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나와 그 미물과 만의 관계가

아니라,내가 이 우주를 어떻게 보느냐? 이 우주의 생명을 어떻게 보느냐?

왜냐하면 내가 곧 우주고 내가 곧 너고 내가 곧 우주전체와 다르기 않기 때문에

내가 우주를 어떻게 보는냐의 관계, 또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는냐의 관계를 결정 짓습니다.

 

내가 하잖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면 내가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거구요.

그건 댜르게 얘기하면 우주법계가 나 자신을 귀하게 여겨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주법계가 나를 쉽게 아프게 만들 수 있겠어요?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우주법계를 죽이지 않는데, 살리고자 마음을 내는데,우주법계가 어떻게 나를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마음을 냄과 동시에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는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아픈 것도 금방 낫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금방 상처 받을 거를 나는 상처를 덜 받게 되고

나를 살리는 일들을 우주법계는 자꾸만 나에게 보내 줄 수 밖에 없단 말이죠.

 

몸도 건강해질 수 밖에 없고, 이와같이 내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이 우주법계 모든 존재에게

다가 서느냐에 따라서 우주법계가 나에게 할 것이 규정이 되고 결정이 된다.

 

이와같이 사실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나와 세상과의 모든 관계는 다 남에게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에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뭐 그런 재미나는 이야기들이 있었죠.

어린 사미가 칠일에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스승님이 부모님을 만나고 와라 이래가지고

보냈더니만 죽어야 되는 줄 알았는데 한 칠일 있다가 다시 돌아왔더라.

왜그러나 봤더니 가다가 개미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개미들을

개미들을 살려 주려고 한동안 앉아가지고 자기 옷을 벗어서 개미들을 살려

수십 수백마리 개미들을 살려 주고 집에 돌아 갔는데,

그 개미를 살려 준 그 마음이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그래서 죽는 업을 소멸시켜 준겁니다.

그래서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살게 됐다. 뭐 그런 이야기가 있거든요.

 

이것처럼 내가 어떻게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사실은 그들의 생명을 살려 준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한 가지만 더 오늘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똑같이 나와 우주법계와의 관계를 결정 짓기 때문에

그 다음 계율이 중요한 것이 불투도입니다.도둑질 하지 마라하는 계율이죠.

왜 도둑질하지 말고 남의 거를 훔치지 마라.

 

우리는 이건 이런 얘기를 오늘 법문의 주제는 불살생과 불투도다.우린 쉽게 콧방귀를 뀝니다.

아~ 저 스님 우리 수준이 있지.우리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몇 십년 불교 공부한 사람들인데,수준이 있지 어떻게 그런 기초적인 설법을 하십니까?

 

되돌아 보면 내가 불살생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가?불투도를 진정 실천하고 있는가?

가장 실천 못하는 게 이 두가지 입니다.첫번째, 두번째 지켜야 될 계율.가장 실천 못하는 있는 것.

 

하다못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 직장 생활을 하는데,

뭐 이렇게 회사에 있는 뭐 이렇게 화장실 가서 휴지를 많이 둘둘둘 말아서 쓰는 것도

어찌보면는 우리집에 거는 귀하게 아껴 쓰지만 딴 데 가서 막 쓴다.이것도 어찌보면 투도일 수가 있거든요.

 

모든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모든 것이 어찌보면 투도일 수가 있다 말이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조금 더 욕심 내는 것도 하나의 어찌 보면 투도일 수가 있단 말이예요.

이것을 내가 가만히 내 마음을 지켜보면 내가 어떻하면 조금 더 근검절약하고

조금 더 뭐랄까 나 자신에게 좀 엄격하고 그렇게 사는 것들.

 

저 또한 처음에 군에 와 가지고 연대 법당이니까 돈이 얼마나 없어요.

얼마나 가난한 절이겠어요. 왠 쵸코파이 하나 주기도 힘들어가지고,

어렵게 어렵게 하고 큰 법회 있을 때 두개 주고 그랬었는데,

그때 제 마음을 이렇게 보면서 저도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큰 대단한게 도둑질이 아니구나.

그때 제 마음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단순한거예요.

내가 아 이거는 쉽게 말해서 내 돈으로 사도 되고 절돈으로 사도 되는게 있어요.

애매한 게 있습니다. 일반절 같으면 당연히 절돈으로 다 스님들이 사죠.

 

그런데 내가 군에 와 있어 놓으니까, 이거 절돈을 쓰는게 너무 어려운거예요.

민간절이야 어차피 스님이 그냥 거기서 사니까 다 절돈이니까 상관이 없는데,

군에 와 놓으니까 내가 월급도 받을 뿐더러

애들이 이 쵸코파이를 이걸 내가 하나 사먹으면 애들 쵸코파이를 그만큼 덜 주니까,

군종병들 데리고 나가서 밥을 한끼 공식적인걸 한끼 딱 사줘도 이게 절돈으로 사줘도 사실은 된다고

하는데,절돈으로 사주면 왠지 내가 좀 꺼림직하고, 이런 좀 애매한 선들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야~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될까?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었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마음이 탁 돌이켜 지냐면은 애매하면 그냥 내가 쓰면 좋더란 말이죠.

왜냐하면 내가 그냥 쓰면 다 복짓는거고, 다 좋은 일에 다 쓰는거고,신기하게도 야~ 이거 신기하죠?

 

제가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을 하나 딱 했잖습니까?그런데 신기하게 딱 그만큼이 착착 들어옵니다.

어우 이게 대개 신기하데요.

 

이를테면 어떠 어떠한 일이 있어서 내가 예를 들어 삼백오십만원어치 뭐 어떤 일이 있어기지고,

어떻게 됐다. 그런데 며칠 안있다가 정확히 그 비슷한 액수가 갑자기 어떻게 생각지 않게

탁 들어와요. 우리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야~ 우리 여건에서는 이렇게 좋은거 아이들에게 먹일 수 없는데,

애들이 하도 막 이렇게 하니까, 그래 내가 너희들이 딴데 가면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고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가슴이 아파서 좋다! 나도 한번 줄께.맛있는 거 한번 큰 맘 먹고서 탁 주고 나면,

꼬옥 그 정도 돈이 탁 들어오거나,아니면 그 돈을 보시하겠다는 사람이 갑자기 탁 생기거나,

 

예전에 또 한번은 이게 너무 오랫동안 전방의 어떤 법당이 너무 거의 허물어져 가는 그런 곳인데,

이거 새로 좀 해주긴 해야 되겠는데, 그 당시 사단 법당도 너무 가난해가지고 돈이 너무 없었어요.

그러니 뭐 항상 돈이 없어가지고 간당간당 할 때여서,어떻할까 그래도 일단 저건 해줘야겠다.

내 거는 못해도 저건 해줘야겠다. 그래서 제가 도저히 돈을 구할 수가 없어서,

 

인터넷 사이트 목탁소리에 한번 올렸었습니다.이러이러한 불사를 하는데 좀 도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이 돈이 액수가 어느정도 드는데, 하여간 십시일반으로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했는데, 신기하게 있잖아요. 이게 천오백만원 들었다.그러면 한 천팔백, 이천정도 들어와가지고 나머지

가지고 애들 맛있는 거 사주고 이러면 좋겠는데,신기하게 어떻게 아는지 사람들이, 딱 그만큼만 들어오고 딱 말아버려요. 진짜 신기합니다. 이거 정말 신기합니다. 저는 이런 일을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네팔에도 두 달안에 우리가 회향을 하겠다.

그런데 두 달안에 이천만원을 만들어야 되는데, 이거 거의 불가능 한겁니다.

그런데 그러더라도 일단 내가 하여간 두 달안에 회향하겠다.

그래서 안되면 어떻게 내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해서 뭔짓을 하더래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고 무조건 두달안에 회향한다. 공지를 했는데,

 

그전에 삼천만원 모으는게 몇년 걸렸는데, 이천만원을 두달에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그런데 정확하게 이천백삼십만원인가 딱 들어왔어요.

그런데 백삼십만원은 뭐냐하면은 저는 못가지만 우리 운영자분들이

네팔에 학교 짓는 거 낙성식 할 때 빈손으로 가면 그렇잖아요?

한백여만원정도만 있어도 뭘 학용품 같은거 사가지고 가서 전달식도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는데

딱 그만큼만 정확히 그만큼만 딱 들어왔습니다. 딱 백일 끝나는 그날 맞춰서...

이런 일들이 신기하게 많아요. 그 뭐하여간 그런게 많습니다.

 

제가 뭐 이렇게 어디 강의를 해달라해서 해줬어요.

그런데 거기서 강사료를 얼마를 책정해서 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봤더니 그곳이 대개 뭐 가난하고 여건도 어렵고 참 그런거예요.

그런데 저한테 그런걸 다 챙겨주신다고 그래서 제가 요거는 받지 않겠습니다. 하고 탁 안 받았어요.

 

그냥 아무 별 생각이 없었는데,그 때 어느곳에서요. 뭐 무슨 CEO분들 모아가지고 강의를 한번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그 몇달 동안했던 했던 강사료 제가 못 받은 딱 그 액수를 한번에 주는 겁니다.

그래서 안줘도 됩니다. 그랬더니 우리도 정부에서 나오는 돈으로 어떻게 어떻게

하는 거기 때문에 이건 무조건 줘야되고 해야 된다고 그래서 뭐 그랬던 기억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충 나중에 와서 계산 해보니까, 여기서는 안 받았던 딱 그 금액이 탁 들어오는거예요.

그래서 야 이거 참 신기하구나. 세상 이치라는 것이...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에게 준다라는 것은 주는게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거예요.

내가 어떤 마음을 쓰는냐에 따라서 그것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소극적으로는 도둑질하지 마라는 계율이고.

적극적으로는 적극적으로 내 것을 상대방에게 보시하고 베풀어줘라.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일을 추진하고 잘하고 싶은데 일이 안 될 때는 두가지를 하면 됩니다.

 

복과 지혜. 뭐든지 뭔가 내가 원은 있는데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지지 않아요.

그러면 둘중에 하나가 부족해서 그런겁니다. 두가지 같이 부족하던가.

그게 복과 지혜입니다.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복과 지혜입니다.

 

즉 물론 첫번째는 마음의 의도가 있어야 되겠죠. 의지가 있어야 되겠죠.

즉 마음을 일으켜야 되겠죠. 마음을 일으킨다고 다 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죠.

마음을 일으켜서 딱 되는 데는 복이 받쳐주거나 지혜가 받쳐주거나. 그래야 됩니다.

 

지혜가 받쳐주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그 깨달음이 받쳐주니까, 우주법계 전체가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돈이 필요 한만큼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는.

복이 없어도.왜냐하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이것이 전체가 하나라는 것을 탁 확철하게 깨달은

사람에게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으니 부자, 가난한거의 차별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만 딱 있어도 그것 자체가 지혜가 곧 복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복이 있는 사람은 또 그 일이 된다 말이예요.

 

그래서 저 생각은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기도는 많이 하잖아요?

절에와서 아들 대학 가게 해주세요. 남편 진급하게 해주세요. 뭐하게 해주세요. 뭐하게 해주세요.

기도는 엄청 하는데, 남편 진급하게 해주세요. 해서 진급을 딱 했습니다.

진급을 하면 진급을 안할때에 봐서 진급을 하면 얼마나 큰 물질적인 혜택을 받아요. 그죠?

 

그런데 진급하게 해주세요. 하고 절에 와서 기도할때는 한 만원 내지 기도비 이삼만원 내면서

기도 하면서 막 원한다 말이예요. 제가 그게 잘못됐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쓸때, 어떻게 마음을 쓰냐면? 내가 이만한 것을 원하는 거잖아요?

우리 사업이 확장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 했잖아요? 사업이 확장되게 해주세요 라고만 기도 할 게 아니고

복과 지혜를 같이 닦아야 된다 말이예요. 기도하는 백일 기도 동안에는

내가 복과 지혜를 닦지도 않고 해주세요. 하면은 안됩니다. 그거 욕심이 되버리지...

 

지혜를 닦으면 내가 해달라는 의도는 명확하지만, 집착은 놓아지게 되요.

그러니까 집착이 놓아지는 순수한 의도는 그걸 이루어 지는 힘으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 수행을 하라는 거예요.

 

기도를 하면서 원을 세우면 그것이 기도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순수한 동기가 되기 때문에

집착이 놓여지면서 거기에 온전한 힘이 붙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 그러면서 기도비를 모아서 회향하라는 겁니다. 이것 뭐 또 절에만 하라는 거 아닙니다.

힘든 사람에게 돕고 뭔가 복을 짓는 거예요. 어려운 양로원에도 갖다 돕고,

뭔가 내가 베풀고 복을 짓게 됐을 때, 그 순간 내 안에 복이 쌓이게 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복을 짓게 되면, 쉽게 말해서 우리일들이 그런 것들이 있단 말이예요.

 

내가 진급을 하고 싶은데 아니면 내가 사업을 이만큼 키우고 싶은데,

돈을 이건 이만큼을 벌고 싶은데 이게 되냐 안되냐의 문제는

예를 들어 사업이 확장 되느냐 안되느냐 저 사람과 큰 딜을 하고 있는데

몇백억짜리 사업을 딜을 하고 있는데 이게 되냐 마냐에 따라서 내가 대그룹으로 가느냐,

중소기업으로 남느냐에 차이가 있거나

 

진급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서 내가 평생 돈을 얼마 더 쓸 수 있느냐

이정도에 엄청나게 좌우 돼잖아요. 그런데 아쉬운 이런게 있죠.

내 복력이 여기서부터 요만큼만 넘어 가버리면 이 사업이 될 수가 있는데,

복력이 요만큼만 남아가지고 정말 백지장 차이로 아깝게 아깝게

복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그게 안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지혜가 내가 집착만 조금만 놓아 버려도, 집착만 조금만 놓아 버렸어도

우주법계에서 그걸 탁 도와 줄 수 있는 힘을 딱 받을 수 있었을텐데

그 지혜가 조금 부족해서 그 일을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기도와 복덕을 같이 지으면서 나아갔을때,모든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이건 다 꿈과 같은 거거든요. 세상에서 成功하는거 이거 다 꿈과 같은겁니다.

꿈은 뭐예요. 마음 먹은대로 꿈은 꿀 수가 있어요.

이 自覺夢을 꾸는 사람은 마음 먹은대로 뭐든지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도 그 꿈과 같습니다. 실체가 아니예요.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견고한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지만 견고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은 내가 억만장자 되는건 절대 안돼.나는 할 수가 없어.

이렇게 믿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믿냐하면?이건 견고한 실체라고 생각해요.

부자 되는거 견고한 실체기 때문에 내가 이거 할려면 엄청난 노력이 드는거야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견고한 실체가 아닙니다.한 생각에 이루어 질 수가 있는거예요.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은 꿈과 같은거기 때문에 꿈을 조작하는거야 뭐 쉽죠.

幻影을, 幻想을 造作하는거야 뭐 어렵습니까?

이게 진짜라고 生覺하고 實體라고 生覺하니까 이게 내 마음대로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方法만 알면 복과 지혜를 닦아 갈 수 있다면, 복과 지혜만 닦아 갈 수 있다면

사실은 세간적인, 세속적인 원하는 바를 이루는 거는 사실은 이거는 뭐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힘든 것도 아니고 할려면 실컷 할 수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智慧를 점점 증득하다 보면 굳이 그걸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뿐이지.

부처님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말해서 인류의 최고 가는 부자가 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런데 굳이 그걸 뭐 아무 意味가 없는거니까 굳이 그걸 할 필요가 없어지는거지.

마음만 내면 뭐든지 할 수가 있는겁니다.

 

그러니 사실은 내가 부자가 되는 거, 성공하는 거 이것도 사실은 마음만 내면 할 수가 있어요.

다만 불교에서는 그렇게 그거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면서 어떻하면 된다라고 시크릿에서 얘기 하듯이

그렇게 과도하게 얘기 안하는 이유는 그런 얘기도 해줄 수 있죠.그러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거기에 너무 얽매이고 집착하게 되는 우를 범하기 쉬우니까,그런데 그런 얘기들를 안해도 많은 사람들이

전부다 부자가 되야된다고 전부다 부자? 에 나아가고 있으니까,

오히려 부자가 되기 보다는 베풀어라. 나누고 복을 짓고 이런 얘기를 더하는 것일 뿐이지.

 

사실은 우리는 부자가 돼도 괜찮고 가난해도 괜찮습니다.사실은 욕심을 좀 부려도 괜찮아요.

집착을 해도 괜찮습니다.그걸 통해 배우고 깨닫는 게 있으니까, 그 어떤 잘못은 없습니다.

다만 이게 실체인줄 알면 내 스스로 괴로우니까,내 스스로 괴롭지만 않으면 뭘 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꿈과도 같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견고하다고 느끼지 않고.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면 세상은 금방 바뀝니다. 금방 바뀝니다.

 

이게 사실은 내가 깨달음을 얻는 게 힘든거지.내가 집착을 놓는 게 힘든거지.

돈 버는 건 힘든 일이 아니란 말이죠. 쉽게 말해서 사업확장하고 뭐 이런 것들은

어찌 보면 힘든 일이 아닐 수 있단 말이죠. 그런게 견고한 게 아니니까,

 

뭐만 되면 돼냐하면? 내 마음만 컨트롤이 되면 바깥의 외부는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바깥에 있는 외부 조건도 따라오지 못하는거지.

왜냐하면 내 마음이 나툰거니까. 세상은...

 

이게 다 바깥에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누가 우리 사장님이 날 잘 봐줘야 진급 시켜 줄 것 같잖아요.

그거 거짓말입니다. 환상입니다. 사장님이 잘 봐줘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내 마음이 바꿔야 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바꿔서 내 마음이 더 적극적으로 바뀌고 내 마음이 더 삶의 에너지와 긍정적인 마음이 되면

사장님의 눈에 보기에 야 저 친구는 확 바꿨구나. 저 친구를 내가 꼭 데리고 있어야 되겠구나.

이런 마음이 탁 들게 돼있죠. 나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은...

 

그러니까 내 바깥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세상은 없다.오직 내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자꾸 마음공부하라고 하는겁니다. 마음공부를 통해서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몇가지 있으니,그게 바로 이 열가지 십악업이기 때문에

이 십악업을 잘 닦아야 된다라고 설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이렇게 두개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번 재일 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