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모든 것이 전생의 업(業) 때문입니다.

장백산-1 2015. 9. 17. 15:53

 

 

모든 것이 전생의 업(業) 때문입니다.  

 

 

남의 비방을 따르지 말고, 남의 비방을 그에게 맡겨두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니 공연히 자신만 피로 하리라.

내가 그 비방을 듣기에는 흡사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 해탈 경계에 들어가도다.

 

從他謗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종타방임타비 파화소천도자피

我聞恰似飮甘露 銷融頓入不思議 아무흡사음감로 소융돈입부사의

 

여기서는 남이 是非 비방 험담하는 것에 휘말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좋다, 좋다하는 것도 그냥 내 버려두고, 싫다, 싫다하는 것도 그냥 내 버려두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헐뜯고 비방 비난을 해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말고 그냥 묵묵히 내버려두라는 말입니다.

저 혼자 그러게 그냥 내 버려두면 제 풀에 지쳐서 나가자빠지고 만다는 뚯입니다.

 

참된 자기자신은 나 자신도 어느 누구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비방 험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아무리 나를 험담하고 비방 비난해도 참나는 어떤 영향도 받지를 않습니다.

그런 비방 비난 험단은 타인의 입을 통해 드러난 나의 業이며, 타인의 비방 비난으로 드러난 나의

生覺입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이 참나의 妙한 作用이니 남의 말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남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그런 일이 없는 실체가 없는 괴롭힘일 뿐입니다.

 

온갖 가지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고,

온갖 가지 세상만사가 생사고락을 일으키는 것 처럼 보이나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몸과 마음을  빼내어서 참된 자리에서 삼라만상만물 속을 자유자재하게 노닐 뿐입니다.

하늘을 날고 땅 위를 걷지만 하늘을 걷고 땅 속을 훨훨 날아다닙니다. 아무런 장애도 막힘도 없이

우주공간 모든 곳에 통하여 있고 모든 시간에 통하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참나, 眞我, 本來面目 입니다.

 

부처님도 그랬지 않습니까? 하루는 부처님 앞에 外道가 두 사람 왔습니다.

한 사람은 外道 스승이고, 한 사람은 제자였습니다. 그 두 사람은 오기 전에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

 

스승은 부처님을 헐뜯기로 하고, 제자는 부처님을 칭찬키로 했습니다.

스승은 부처님을 가진 모욕을 주고 비난하고 헐뜯고, 제자는 가진 말을 다하여 부처님을

칭송하고 찬탄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 대꾸없이 묵묵히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헐뜯고, 칭찬을 해도 전혀 상대하지 않는 부처님을 보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나는 헐뜯고, 저 사람은 칭찬을 해도 어찌 아무 말씀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그제 서야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금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었다고 하자,

그러나 내가 그 금덩어리를 받지 않으면, 그 금덩어리는 누구의 금덩어리냐? 

저희들 금덩어리입니다 하였다.

바로 그와 같으니라.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비방하고, 헐뜯고, 칭찬을 해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않으면 너희들이 가지고 온 금덩어리와 같게 된다.

그러니 더 이상 業을 짓지 말라고 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世上萬事가 다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 다 겪게 됩니다. 누명도 쓰고, 오해도 받고, 억울한 일도 당합니다.

이럴 때에 世上萬事에 분노하고, 쉽게 시비에 휘말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남이 나를 비방하고 헐뜯고 시비를 해와도 마음공부의 材料로 돌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비방 비난을 마치 甘露水를 마시는 것 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業障을 녹이는 해탈 경계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의 말 한마디에 쉽게 속이

뒤집어 집니다. 요새 말로하면 뚜껑이 열린다고 해서 벌컥 화를 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봐야 마음공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옛날 어느 절에 보살님이 한분 오셔가지고 법당에 올라가서 펑펑 우는 것이였습니다.

하도 서럽게 우는 지라, 그 절 주지스님께서 우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보살님이, 스님! 이년의 팔자는 무슨 팔자가 이렇습니까?

서방이라는 것이 허구헌날 술만 먹고 와서 저를 개 패듯이 때립니다.

온 몸이 퍼렇게 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습니다. 어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도망가야 합니까? 헤어져야 합니까?

 

헤어 지자니, 자식들이 불쌍하고, 살자니 이렇게 매만 맞으니, 이놈의 노릇을 어찌 합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스님께서 보살님! 내가 좋은 方法을 일러 줄 테니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집으로 돌아가셔서 갈대를 한 열 다발 묶어서 방 네 구석에 두십시오. 그리고 서방님이

밖에서 들어오면 오장육부를 뒤집는 말을 하십시오. 그러고 나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살님 집으로 돌아와서 스님께서 일러준 방법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평소에는 말도 못하고, 때리면 도망가던 아내가 시비를 걸고 욕을 하니,

그 거사님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방에 있는 갈대로 마구 때렸습니다.

방에 있던 열 묶음 갈대가 다 망가지도록 보살님을 때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심한 욕을 해도 때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살님이 다시 절에 가서 스님께 여쭸습니다. 스님! 이것이 어찌된 무슨 조화 입니까?

신통방통하게도 이젠 때리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이 보살님과 거사님의 前生을 얘기를

해줬습니다. 보살님은 前生에 馬夫였습니다. 거사님은 전생에 말이였고요, 마부와 말이다 보니,

平生을 말을 때리다 보니, 그게 전생에 業 갚음으로 때린 만큼 맞은 것입니다.

 

갈대 묶음으로 때렸으니, 平生 맞을 것 다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때릴 빚이 없어서 때리지를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과(因果)는 이렇게 分明합니다. 지금 겪고, 당하는 모든 것이 前生의

내 업(業) 때문입니다. 그 업장(業障)을 녹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똑 같은 境界를 맞이해도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역경계(逆境界)도 마음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공부의 재료로 돌리면 됩니다.

 

그래서 남이 나를 헐뜯고 비방 비난해도 거기에 대꾸하지말고 마음을 無心하게 내 버려 두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無心으로 돌리면 그게 甘露水라는 겁니다. 無心해지면 그 자리가 부사의 해탈경계

(不思議解脫境界)라는 겁니다.

 

옛날 梁 武帝때에 天台智者大師께서 止觀三昧에 들었는데,멧돼지가 법당 앞으로 도망치고,

그 뒤에 활을 든 사냥꾼이 따라옵니다. 스님! 멧돼지 못 봤습니까? 어디로 갔습니까?

그대는 화살 하나로 몇 마리를 쏘는가? 한 마리를 쏩니다,

그러면 활 쏠 줄 모루는 사람이로구만! 나는 한 화살로 백 마리를 쏜다네?

어찌 生명을 그렇게 마구 쏠 수 있습니까?

 

사냥꾼 주제에 자비심(慈悲心)은 남아 있구나. 그러지 말고 出家해서 부처님 法이나 배워라.

그러자 그 사냥꾼 활을 꺾고, 출가를 했습니다, 그가 바로 등운봉 선사입니다.

멧돼지와 사냥꾼 前生 이야기입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 많이 들었죠?

그 말이 바로 이 이야기 입니다.

 

烏飛梨落破蛇頭 蛇變爲猪轉石雉  오비이락파사두 사변위저전석치 

雉作獵人欲射猪 道師爲說解怨結  치작엽인욕사저 도사위설해원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져 뱀의 머리 부서지니,

뱀이 죽어 멧돼지가 되어 뒷산의 돌 굴리니그 돌에 꿩이 죽었네.

꿩이 죽어서 사냥꾼이 되어 다시 멧돼지를 쏘려하니

한 대사가 因果應報를 설해서 맺힌 원수 풀었네.

 

 

이렇게 등운봉선사가 사냥꾼으로서 멧돼지 사냥을 한 전생에 얼키고 설킨 얘기를 한 것입니다.

아무 뜻 없이 지은 業도 이렇게 因果는 分明합니다. 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 진 것입니다,

뱀을 죽이려고 날아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 마음없이 그냥 지은 業도, 이렇게 한 치의 오차(誤差)가

없는 법입니다. 멧돼지도 칡을 캐먹다가 그냥 돌이 굴러 갔는데, 꿩이 그 돌을 맞고 죽었습니다.

꿩을 죽이고자 돌을 굴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고 받는 것이 이렇듯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과법칙(因果法則)입니다, 지은대로 받습니다.

 

法句經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가사백천겁 소작업불망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 인연회우시 과보화자수, 라고 했습니다,

설사 백 천겁을 지날지라도 지은 業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인연이 모여 만날 때 에는 果報를 돌려받는다.

 

지은 業은 꼭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因果法則 입니다. 善因善果 惡因惡果입니다.

착한 業을 지으면 착한 果報를 받고, 나쁜 業을 지으면 나쁜 果報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因果法則이고, 부처님 말씀입니다. 불자님들은 이 因果法則을 믿어야 합니다.

이 因果法則을 믿지 않는 佛子님들이 가끔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인과를 무시하고 어찌

佛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三世因果經을 꼭 읽어 보십시오.

因果法則은 눈 앞에서 바로 實證 할수가 있는 眞理 입니다,

 

옛 조사님들은 그래서 이런 警句를 남겼습니다,

 

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 차신불향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

 

삼계가 마치 우물 물 긷는 도르레 두레박과 같아서, 백천만겁 티끌과 같은 미진數를 지나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떤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 하겠는가?

 

 

구구 절절이 간절한 말씀 아닙니까? 人身難得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몸 받기가 매우 어렵다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 몸 받았을 때 깨쳐야 합니다. 왜 사람 몸이 중요하냐? 하면 5대5라 그렇습니다,

능엄경에 나온 부처님 말씀입니다. 5대 5는 情이 5고, 思가 5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十 이라고 하면 情이 다섯이고, 思가 다섯이라는 말입니다.

情이 무거운 衆生은 땅으로 기어 다닙니다. 思가 많은 중생은 날아다닙니다.

날짐승 새 종류는 思라는 무거운 業이  많은 衆生입니다. 지렁이 같은 땅속에 사는

중생은 情이라는 무거운 業 때문에 그렇게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情五. 思五 일 때가 마음工夫 하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겁니다.

그래서 今生에 이 몸을 제도 하지 못으면 어느 生에 이 몸을 제도하랴? 한 것입니다,

간절하신 말씀 아닙니까?  마음에 새겨 返照 하십시오.

 

대덕스님,

영가 스님의 증도가(證道歌)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