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이 세상
인간의 마음은 부는 바람 앞에 마구 흔들리는 깃발처럼 다가오는 온갖 對相 境界들에 마구 흔들리며
搖動치면서 살아갑니다. 한평생 境界 對相을 쫒아서 흔들리는 마음이 우리네의 사는 모양, 삶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對相 境界가 다가올 때 이 마음은 울고불고 괴로워하며 답답해 어쩔줄 몰라 하고,
즐겁고 행복한 對相 境界가 다가올 때 이 마음은 웃고 즐거워하며 한없이 행복에 겨워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은 바람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이리 저리 쉼없이 나부낌니다. 그러나 깃발은
그렇게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 깃발을 지탱하고 있는 깃대는 늘 그 자리에서 고요합니다.
깃대는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이 고요하고 당당하게 의연합니다. 그러나 깃대 또한 깃대의
뿌리에 얕게 꽃혀 있으면 어느 정도의 바람은 견뎌내겠지만 거센 바람 앞에서는 깃대의 뿌리가 뽑혀
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게 내린 깃대는 뽑히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 깃대와 같습니다. 마음이
얼마만큼 內面에 깊고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境界에 흔들리는 程度는
千差萬別로 差異가 나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뿌리를 內面에 깊게 내리고 있으면 그 어떤 外部 境界
가 닥쳐와도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맑고 당당한 마음입니다.
修行者가 境界 對相을 對하는 마음은 참으로 境界 앞에 서야 如實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얼핏 보기
에는 모든 수행자의 마음이 맑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境界 앞에 서게되면 참된 맑음, 참된 수행자
마음의 實相이 드러납니다.
맑은 물 한 컵과 흙탕물 한 컵을 가만히 놓아 두면 시간이 흐른 뒤 양쪽 다 모두 맑게 보입니다.
그러나 막대로 휘저으면 맑은 물은 그대로 맑지만 맑았던 흙탕물은 흙탕물이 되게 마련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린 과연 어느 쪽인가? 외부의 그 어떤 境界 對相이 나의 마음을 흔들더라도
그대로 맑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아니면 境界를 따라 마음이 千差萬別로 흙탕물이 되는지 말입니다.
修行者라 하더라도 大部分은 後者 쪽일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因해 또다시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境界 없는 人生은 있을 수가 없으며 境界가 닥칠 때 '욱'하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는 이는 없습
니다. 제 아무리 修行者라 할지라도 對相 境界가 닦치면 過去 業識 따라 마음은 動搖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행자와 비수행자가 境界를 對面하는 마음은 하늘과 땅 만큼 差異가 나게 마련입니다.
수행자는 그 어떤 境界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주장자가 內面 깊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그 어떤
境界라도 마땅히 바르게 녹여 낼 수 있는 中心 잡힌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境界를 對할 때 마음에서
올라오는 分別心으로 境界를 對하는 것이 아니라 內面에 뿌리 깊게 내려져 있는 맑은 한마음 주장자로써
對相 境界를 直面하기 때문에 어떤 對相 境界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境界를 중심 잡힌 마음의
주장자로써 밝게 수용해서 녹여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境界라도 內面의 本來面目 자리에 넣으면
그 온갖 境界 對相을 용광로 처럼 용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나, 본래면목 자리는 一切 그 어떤 對相 境界라도 붙잡는 적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에 세운 모양 없는
주장자를 잡음 없이 굳게 부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일체를 잡지 않고 다 놓아버릴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방하착(放下着)의 밝은 실천력이 本來面目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깊게 뿌리 내린 나무는 아무리 사납고 거센 폭풍우에도 결코 흔들림이 없듯이 內面에 깊게 뿌리내린
마음의 心地가 굳고 깊을수록 아무리 험난하고 괴로운 境界에도 마음이 결코 흔들림 없이 本來面目
바탕에서 충분히 그것을 녹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것은 內面에 깃들어
있는 밝은 참나, 本來面目, 眞心에 대한 우직하고 굳은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일의 中心
은 오직 내 마음에 있음을 내 안에 밝은 깨우침의 種子가 있음을 온전히 믿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마음에 中心이 세워진 자는 그 어떤 境界, 이 세상 모든 것 앞에서 언제나 고요하며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그 어떤 경계를 마주하더라도 항상 마음이 如如할 수 있습니다. 설령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할지라도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더라도 의연하고 담담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깊이 뿌리 내린
마음의 주장자,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生과 死라는 分別心, 外部 境界에 따라서 마음의
중심, 참나, 본래면목이 나고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음의 중심, 참나, 본래면목에 의해서
분별심이라는 외부 경계 대상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마음의 中心이 온통 境界에 따라 놀아납니다. 직장 상사의 비난에
마음을 빼앗겨 괴로운 마음을 내고, 친구들의 이기적인 마음에 마음을 빼앗겨 성내는 마음을 내고, 돈에
마음을 빼앗겨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행, 불행의 마음을 만들어 내고, 지위의 높고 낮음에 마음이 빼앗겨
상대방을 높고 낮은 상(相)으로써 대하며, 이성에 마음이 빼앗겨 집착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만들며...
그렇게 온갖 境界에 마음을 빼앗겨서 흔들리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렇듯 마음이 中心이 서지 않으니 因緣 따라 다가오는 境界를 執着하여 마음의 中心이 外部 境界에
옮겨 붙게 되고 그럼에 따라 境界(條件/緣)과 마음이 因되어 즉, 인연이 되어서 또 다른 業識의 어둔
마음을 만들어 냅니다. 境界를 따라 괴롭고, 성내고, 탐내고 하는 등의 마음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주장자가 밝게 선 수행자는 境界의 허망(虛妄)한 實體를 곧바로 관(觀)하고, 내 마음의 中心을 굳게
세우고 있으므로 外部 境界에 마음의 中心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 주장자가 밝게 서 있다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고, 괴로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즐거운 마음에도 크게 들떠 있을 것도 없습니다. 오직 關心의 對相
境界는 外部 境界가 아닌 內面이기에 경계를 대함에 경계를 탓하지 않고 내면을 채찍하고 내면을 다스릴
뿐입니다. 이런 밝은 수행자에게 경계는 오직 내 마음을 닦아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修行 材料일 뿐입니다.
마음이 中心을 잡고 살아야 합니다. 헛되이 마음이 境界에 놀아나선 안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사는 修行者는 어리석은 衆生의 마음을 닦아서 부처가 되려는 者가 아닙니다. 곧바로 부처로써 世上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밝게 서게 되면 말 한 마디가 부처님 말씀이 되고 行動 하나가
부처님 行動이 되며 일으키는 한 生覺이 부처님 生覺이 되는 것입니다.
一切의 境界 對相 어느 것 하나 붙잡지 않고 참나 存在의 根本자리에 一切를 넣고 용해하면서 살기에,
一切를 밝은 참나에게 바치고 供養 올리며 살아가기에, 참나에게 모든 걸 다 일임하며 살아가기에
참나의 자리에는 '나'라고 여기는 生覺 卽, 分別心이 붙을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어리석고
虛妄한 觀念으로써의 '나'라고 여기는 生覺, 分別心이 없기 때문에 '全切로서 의 나' ,즉 참나로써 살아
가는 겁니다.
법상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되어야 할 '부처'는 없다 (0) | 2015.11.15 |
---|---|
나라고 同一視하는 모든 것이 다 幻想일 뿐 (0) | 2015.11.14 |
말이라는 相에 끄달리지 말라 (0) | 2015.11.04 |
마음을 깨닫는 것이 불법 (0) | 2015.10.31 |
(1) 중도의 의미 (0) | 2015.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