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中道
(1) 중도의 의미
道聖諦(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중도는 양극단을 떠난 실천으로써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쾌락주의자나 고행주의자 같은 외도의 사문들이 성행한 시절이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주의에 극단까지 가 보셨지만 그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실질적인 방법은 아님을 깨달
으시고 당시의 시대적인 실천 수행법을 모두 버린 채 중도의 독자적 길로 걸어가신 것이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해 거문고 줄을 너무 강하게 조여도 소리가 잘 나지 않으며, 너무 느슨하게
해도 소리가 잘 나지 않는 것처럼 수행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이 동요되고, 너무 느슨해지면 나태하게 되므
로 중도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중도야말로 수행자에게 있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길을 알려 준다. 中道란 단순히 어정쩡하게 中間의 길을 걸어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느 한 쪽이든 極端으로 치우쳐 執着하게 되는 삶의 방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 교설은 緣起法이라 한다. 緣起法에 依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하나로 連結되어 있기에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만물의 因緣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처럼 고정된 실체
가 있어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상호 인연 관계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될 따름이다.
그렇기에 초기불교는 연기를 곧 無我라고 이해한다. 실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주만물 서로
의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주만물간의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들은 非實體的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가치나 표현을
가지고 그것을 規定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길고 짧고, 옳고 그르고, 아름답고 추하다는 등의 이분법적인 모
든 相對的인 極端은 사실 우주만물 서로간의 인연에 따라서 관념적으로 그렇게 불려지는 것에 불과하다.
연필은 긴가 짧은가? 그것은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의 연필이 옆에 있느냐에 따
라 달라진다. 전봇대 옆에 연필은 짧은 것이지만, 성냥개비 옆에 연필은 긴 것이 된다. 서로 간에 인연 따라
길거나 짧다고 느끼는 것이지 그것들은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宇宙萬物 間의 因緣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實體가 없고, 그렇기에 그 모든 것들은 中道的으로 이해될
뿐, 극단으로 치우쳐서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간에 緣起되어서 생겨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우주만물은 無我이고 中道的으로 이해된다.
우주만물 서로간에 연기된다는 것은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것은 나 홀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뜻이다. 내가 있기 위해서는 나와 연관된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因緣으로 참여해서 도울 때 가능한 것
이다. 이 連結性은 연기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宇宙法界 全切,우주삼라만상만물 모두 함께 동참하여 꽃
한 송이를 피우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도록 도운 것으로써, 重重無盡으로 끝이 없이 連結되어 이어진다.
그렇기에 事實은 나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이 宇宙 全切가 동참해서 하는 일이다.
結局 ‘나’라는 存在는 不變하는 固定된 獨立的인 實體로써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이 宇宙 全切의 各各의
因緣에 의해서 잠시 나의 모습으로 잠깐 세상에 드러난 것일 뿐이다. 結局 나라는 존재는 이 宇宙 全切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우주법계를 바다라고 한다면, 나와 너, 크고 작은 모든 존재는 단지 바다의 일부인
파도일 뿐이다. 파도와 바다는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너와 나는 서로 다르지 않고, 나와 우주
는 서로 다르지 않다. 너에게 베푸는 것은 곧 나에게 베푸는 것이며, 너를 도울 때 내가 도움 받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무주상보시이며, 자비다. ‘내가 너를 돕는다’는 相을 낼 아무런 理由도 없는 것
이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동체적인 생각, 不二)라는 思惟의
바탕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을 수 없다. 相 없이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緣起, 無我, 慈悲와 中道는 서로 다르지 않은 가르침이다. 이처럼 연기와 무아, 자비의 가르침이
현실로 드러날 때 中道的인 시각과 중도적인 관찰, 중도적인 실천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中道야말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하신 代表的인 修行이며, 苦를 消滅하는 具體的인 方法이다.
요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修行이라고 하면, 念佛하고, 坐禪하고, 讀經하며, 다라니를 외고, 사경하며,
절 하는 것 등만을 修行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事實 엄밀히 따져보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念佛을 말한
적도 없고, 다라니나 眞言을 외우라고 말한 적도 없으며, 사경이나 간화선을 얘기한 적도 없다. 오로지 석가
모니부처님께서는 中道를 實踐하라고 말씀 하셨을 뿐이다. 卽 中道的인 視覺, 中道的인 觀察이 重要한 것이다.
世上을 中道的을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修行이다. 절을 3,000번 하고, 10시간씩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坐禪을 해야지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중도적으로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修行이다. 과도하게
어떤 한 가지 價値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特定한 目標에 執着해 있다거나, 한 사람만을 유난히 愛着하거나
미워한다거나, 特定한 정치적 성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거나, 내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다른 종교는
다 틀린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심지어 수행을 통해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깨달음에 執着하는 것 조차
中道에서 어긋난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自身이 生覺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생각, 가치관, 삶의 방식을 ‘옳다’고 여기고, 그것과 다른
상대방의 생각, 가치관, 삶의 방식은 ‘틀렸다’고 생각함으로써 내 것에는 집착하고 상대방 것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中道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아무리 옳은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執着하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修行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마땅히 法에도 執着하지 말고, 法 아닌 것에도 執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한 것처럼,
불교의 중도적 가르침에서는 부처님 가르침 卽, 佛法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집착해서는 안 됨을 설하고 있다. 불교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타종교는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中道的 觀察이 아니다. 만약 불교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선이며, 타종교는 절대적으로 틀렸고
절대악이라고 여긴다면 불교는 타종교를 상대로 싸움을 걸거나, 심지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더욱
이 그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實體化되면 실체적인 선인 불교를 위해 실체적인 악인 타종교와 전쟁을 일으
켜 죽여도 된다는 논리가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非佛敎的, 中道를 떠난 어리석은 생각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判斷도 마찬가지다. 中道的인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에 대해 特別히 과도하게 좋아하거나,
과도하게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生覺이나 判斷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절대적으로 옳다고 추종하
거나, 과도하게 잘못이라고 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中道的으로 대한다. 中道的으로
대한다는 것은 좋거나 나쁘거나 어느 한 쪽만을 選擇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치우치지 않은 시선, 正見을 말한다.
이처럼 中道는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거나, 다른 한 쪽을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보는 極端的
偏見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先入見과 差別心 없이 바라보는 삶의 實踐이다. 差別과 分別없이 다만
慈悲로운 視線으로 世上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分別없이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慈悲의 實踐이다. 사랑하
고 미워하는 사람을 둘로 나누어 놓고 어느 한 쪽을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자비가 아니다. 분별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그 存在 自體를 許容해 주는 것이야말로 眞正한 意味의
慈悲이다.
끊임없이 每瞬間瞬間을 觀察함으로써 매 순간 나의 行爲가 中道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生覺이 中道에서
버서나지 않는지, 나의 말이 中道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見解가 極端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나의 職業
이 中道에 벗어나는 직업은 아닌지 등에 대해 每 瞬間 깨어있는 意識 마음으로 모든 行爲들을 지켜보는 것
이야말로 眞實된 삶을 살아가는 眞正한 修行이다.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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