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거시기’로 사는 법

장백산-1 2016. 3. 2. 13:50

 

본무생사(本無生死)        


불생불멸(不生不滅)거시기로 사는 법

진짜 本來의 自己는 作用하는 이놈입니다.

눈에 닿으면 보고, 귀에 닿으면 듣는 이놈은 이름이 없어,

할 수 없이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부릅니다.

 

- 고위산 백운 노장의 -

 

불생불멸의 참살이

 



백운스님 법문/비움과소통

148 * 225mm무선흑백32412,000

ISBN 978-89-97188-91-8 03220


                                  “설사 깨치지 못해도 여러분의 佛性자리는 本來  生과 死가 없다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는 마음의 본래바탕, 佛性곧바로 깨닫기

  

여러분들이 성불(成佛) 하든 못 하든, 깨닫든 못 깨닫든 肉身은 죽어서 사라질지라도

여러분들의 佛性自體, 자성불은 늘고 주는 게 하나도 없고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래 성품, 자성불, 佛性은 시작하는 바도 없고 끝나는 바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佛性을 설사 깨치지 못하더라도

原來가 본무생사(本無生死). 本來부터 生과 死는 없습니다.


백운암에 오랫동안 주석하며 직접 불사와 농사를 지으며 선()을 깨친 이 책의 저자 백운 스님은 매달 국내외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불우이웃 돕기를 하는 등 삶 속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참선(參禪)을 지도하고 있다. 좌선 위주의 간화선이 깨닫기 어려운 참선이라면, 백운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깨닫거나 안심(安心)을 얻은 불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소문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스님을 친견하고 선()을 지도점검 받는 수행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스님은 수시로 찾아오는 선객(禪客)들에게 기탄 없이 자기의 본래 성품을 깨닫게 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자재한 方便을 발휘하고 있다.

 

이 책은 20159월 이전, 백운 스님의 육성법문과 선문답(대화)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최대한 선()의 종지(宗旨)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스님의 본뜻을 드러내기 위해 구어체로 기술하였다. 그동안 看話禪이 일반인들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參禪法으로 알려지면서, 스님들과 소수 불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가운데,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선()法門을 통해 깨달아 들어 갈 수 있는 언하대오(言下大悟)의 方便을 열어둠으로써, 간화선 以前의 조사선(祖師禪) 가풍과 법등(法燈)을 되살리는 소중한 불씨가 될 것이다. 眞理를 향한 타는 목마름으로 고뇌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의 한 구절

 

☞ 佛性은 화두(話頭)를 통해서 터득을 하는 것이 확실한 체험이 되고 좋지만, 화두 아니라도 이걸 確實히 理解를 하고 생활 속에서 體得하기 시작해도 역시 같은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시간은 많이 걸려도. 근기(根機)가 조금 낮거나 체질에 안 맞는 사람은 이 方法으로 들어가도 동일해. 다른 거 없습니다. 화두를 타파하는 것이 어디로 들어가느냐, 바로 지금 보고 듣는 이것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 ()’에 속지 않아 自己의 完全한 主人이 되는 거야. 여기까지예요. (16p)

 

화두는 의정에 들어가서 의정이 그냥 녹아나는 게 아니야. 밖에 연()이 들어와야만 깨져요 그게. 타파가. 왜냐하면 내가 주객(主客)이 없이 딱 붙어있는 상태인데, 의문뿐인데 밖에 떠드는 소리나 종소리를 듣거나 하면 그 소리가 단박에 들어오면서 佛性에 계합(契合)이 되면서 뭐냐 이 자리뿐이었었구나’, 그동안 ‘내가 속고 있었어하면서 바로 佛性에 契合이 돼. 그럼으로써 바로 主人으로 되돌아가. 요 차이야. 요거예요. (23p)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보고 듣는 이 자리, 昭昭靈玲한 이놈이야! 이놈이 마음 本來의 性稟, 佛性이야!

, , !(죽비를 세 번 칩니다)

, 지금 내가 모든 법()을 다 보이고 다 해 마쳤습니다. 여러분들, 이것을 바로 보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또 말이 필요한 거예요. 만약에 지금 여기서 이 法을 바로 알아차리면 지금 내가 궁구히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본래 처음부터 각자(各自)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고, 오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다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순간 보고 듣는 이 자리, 소소영령한 이놈이야, 바로 이놈뿐이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모든 것을 보고 듣는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들 自性佛이야. 佛性의 자리야. 이놈이 바로 모든 것을 천당, 극락을 지어 놓는 主人公입니다. (53P)

 

참부처(眞佛)이 내 속에 따로 들어 있다구? 그런 生覺이 바로 幻想, 허깨비야 그게. 그것이 바로 도깨비라고. 이런 所見으로는 안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것을 바로 알아들어야 여러분들이 이것을 바로 볼 수 있어.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공간마음 하나 이 자리 이놈뿐이야. 우주만물,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은 이놈이 그려놓은 그림일 뿐이라고. 이놈이 그려놓은 그림을 자꾸 찾을라고 하니까 안 되잖아. 달마조사도 처음에 말씀하신 게 다 그것뿐이야.

 

마음은 본래 무상(無相)이다.”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찾으려고 하면 이미 어긋난다, 찾을 수 없다.”

눈을 가지고 자기 눈을 보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이 눈이 모든 걸 다 비춰 볼 수는 있지만 자기의 눈을 볼 수는 없죠. 눈이 자기 자신의 눈을 볼 수 있어요? 이놈은 순식간에 世上을 主와 客을 갈라놓고서 갖은 요술을 다부리기에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이 그려놓은 허깨비 그림에 자기 마음이 집착을 해서 거꾸로 뒤집힌 거야. (54p)

 

중생들이 生覺을 따라 쫓아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 제일 처음에 그랬죠. 지금 우리 煩惱 妄想이 일어나더라도 모두 좋다, 나쁘다’, ‘싫다, 좋다는 分別心 여기에 치우치지 않고 平常心이 이루어졌을 때 비록 妄想이 일어나는 듯해도 이 망상 번뇌가 일어나는 이 자리가 여러분들 本心자리야. 참선을 죽도록 해서 화두타파한 자리까지 온 거야. 거기까지가, 알아요?

 

참선해서 화두 타파한 거는 700년 前에 생긴 방법이지 그 前에는 바로 이렇게 알려줬어요. 바로  모양 없는 너의 마음자리, 지금 옳다, 그르다하는 이런 思量分別하는 生覺 있잖아? 이런 분별하는 마음이 다 떠난 平等한 자리 이 자리가 바로 우리들의 佛性자리이자 宇宙의 本來面目과 똑같은 바로 그 자리다. 왜 自己의 本來面目을 모르느냐 하면 오랫동안 계속 分別하는 生覺 妄想을 따라 다닌 마음이 習慣이 돼가지고 제 집에 와서도 제 집에 온줄 모르는 거와 똑같다. 이걸 비유한 겁니다.

 

내가 항상 그랬죠. 처음에 달마조사는 부처님 말씀을 더하고 빼는 거 없이 그대로 傳할 때 마음은 본래 無相이기 때문에 分別心인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하는 것이 다 사라져 버리면 瞬間的으로 分別心이 사라진 그 자리가 바로 네 집, 너의 마음 본래의 성품, 佛性자리이다.” 그냥 가르켜 줬어요. 마음이 아주 깨끗하고 순수하면 바로 받아들여 바로 그냥 契合이 되었어요. 어려운 게 아닌 거거든 사실은. 分別하는 生覺 妄想을 쫓아가지고서 계속 거꾸로 뒤집혀 習慣이 돼 그런 거요 그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여러분들이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고 여기가 지금. (68p)

 

이거는 이 自性佛은 항상 1365일 하루 24시간 한 번도, 아니 永遠히 나를 떠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 自性佛을 찾을라 하면 안돼요. 이 自性佛을 찾을라 하면 뭐냐? 行住坐臥 語默動靜 간에 보고 듣는 가운데 恒常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자성불이 함께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 自性佛을 따로 찾을라 하면 그때부터 벌써 거꾸로 뒤집히는 거야.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두 조각을 내 對相化 시켜요. 그렇기 때문에 自性佛은 찾는 게 아니고  즉바로 보아야 하는 거야 바로. 그래서 見性이라 말 하는 거지, 自性佛은 어디서 별도로 찾아서 얻는 게 아니란 말이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自性佛을 보란 얘기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이것뿐이란 걸. (75p)

 

처음 한번 자성불을 보고 깨닫고 門이 열렸다 해서 다 끝난다? 택도 없어요. 바로 다시 꺼꾸로 되어 버립니다. 얼마 안돼서. 그때 알았던 境界는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려요. 最下 한 10여년이 흘러가 마음이 한 번 열리기 시작하면 거듭거듭 깨침이 와요. 거듭거듭 깨침이 와서 수십 번의 거듭거듭 깨침이 와서 전도되었던 게 제 자리를 다 막아줘버려. 그러면서 完全하게 自由自在 해져요.

 

한 번 깨쳐 마음 本來의 性稟, 佛性, 自性佛을 알았다고 해서 그 見解가 왜 그러냐? 그 見解에 붙잡히지만 않으면 되는데, 모르던 世界를 確實히 알아버리니까 自己가 알아버린 세계, 마음 본래의 성품, 자성불, 불성의 세계를 자기 나름대로의 境界를 만들어 그 허깨비 같은 境界에 주저앉아서 그 境界를 붙잡고 싶어하는 欲望이 일어나버려요. 허깨비 같은 그 境界를 안 놓으려고 기를 써. 그러면 그때 다시 거꾸로 뒤집히게 돼있어요. 그럼으로써 顚倒돼요 사실은. 허깨비 같은 그 境界를 놓지를 못해, 깨달았다는 見解를 놓지 않기 때문에 꺼꾸로 되버려요,

 

事實. 이게 아주 重要한 대목이야.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처음에는 내가 깨달았다는 知見 즉, 각견(覺見)이 남아서 깨달았다는 見解에 붙잡혀 가지고선 다시 전도되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사람의 屬性上 그렇습니다. 見性을 했다. , 이제는 다 됐네. 그런데 見性을 했다는 그런 虛妄한 境界에 執着을 해 주저앉아버려서, 그 허깨비 같은 境界에 붙잡혀가지고 전도 돼 버려. 그게 그만 허물이 돼요.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깨침을 얻고도 몇십 年을 완전해 질때까지 스승 곁에 머물면서 시봉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혜가대사, 승찬대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祖師들이 다 몇십 년씩 인가를 해준 자기 恩師를, 법은사 시봉을 하고 모시는 이유가 뭐냐? 처음에 열리고 얼마 안 되면 도로 전도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그때 깨달았다는 見解를 붙잡아서 그렇게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15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