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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선불교의 방편

장백산-1 2016. 3. 22. 17:21

초기불교와 선불교의 방편

 

 

한국불교가 禪佛敎를 계승하는 전통이다 보니, 어떤 이들은 禪佛敎를 初期佛敎와는 다른 생뚱맞은

불교이며, 불교의 본질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서, 오늘은 선불교와 초기불교의 方便들을

比較해 봄으로써 둘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禪佛敎는 우주만물,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本來 佛(부처)라고 말한다.

우주만물이 본래 완전한 부처인데 다만 生覺 마음 意識 分別 妄想이라는 分別識, 分別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본래 부처인 자기자신을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分別心, 分別識이 바로 초기경전

에서 말하는 五蘊(色 受 想 行 識)의 識蘊이며, 十八界의 六識(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다.

 

이 識(心/意)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衆生心이라고 부르는 ‘마음’으로써 世上,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

해서 아는 마음, 알음알이, 분별심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이 分別하는 識이 世上 對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좋거나 나쁘거나 둘로 나눠 분별하도록 함으로써 좋은 것엔 執着하고 싫은 것은 거부

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결국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禪에서는 바로 이 分別識을 打破하기 위한 方便으로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모토에서 보여주듯이,

分別識을 움직이지 못하게 꼼짝 못하게 한 채 곧바로 本來의 마음, 마음 본래의 성품(本性)을 곧바로 가

켜 보임으로써 見性하고 성불하는 길로 이끈다.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을 나누고 헤아리는

生覺으로, 對相을 分別하는 알음알이라는 分別識으로는 不可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分別識이 꼼짝 못

하고, 오도 가도 못하고 꽉 막히도록 하는 方法으로 禪問答이나 話頭를 제시하여 직지인심하는 것이다.

 

그러면 초기불교를 보자. 초기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듣는 이들의 根機에 맞춰 對機說法을 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대기설법은 근기가 낮은 이로부터 높은 이에 이르는 단계적인 자비의 方便을 쓰셨다.

그것이 바로 施論, 戒論, 生天論, 諸欲의 過患, 출리의 공덕, 四聖諦다.

 

이 중에 처음의 시론, 계론, 생천론은 재가불자들을 위해 주로 설한 것으로, 쉽게 말해 施論은 보시를

實行함으로써 福德을 쌓으라는 것이고, 戒論은 계율을 잘 지키며 사는 도덕적인 삶을 말하고, 生天論

은 그러한 선업의 결과로 死後에는 하늘에 태어나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 뒤 것이

諸欲의 過患인데, 이는 모든 感覺的 欲望은 人間을 危險으로 내몬다는 말이고, 出利의 功德은 三界를

벗어나 涅槃(행복)을 구하는 공덕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의 성숙을 이룬 제자들에게 결국

四聖諦를 가르치셨다.

 

사성제를 간략하게 보면, 괴로움의 原因을 消滅시켜 涅槃에 이르는 구조이다. 선불교에서처럼 괴로움의

原因만 消滅시키면 涅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原因은 12緣起로 나타난다.

12연기를 간략하게 보면 六識, 名色(六境), 六入(六根) 卽 十八界가 텅~비어 空한 줄 모르기에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고 좋은 것은 執着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는 愛와 取가 일어나 좋은 것은 取하려고 行爲하고,

나쁜 것은 거부하려고 行爲하기 때문에 그로 因해 有, 生, 老死로 이어지는 괴로움이 緣起된다는 것이다.

結局 12역기 또한 分別識이라는 分別心으로 因해 좋고 싫은 느낌이 생기고 그 느낌 感情은 곧바로 愛欲과

執着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執着하는 마음으로 行動을 함으로써 業을 짓게 됨을 설명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分別識이 좋고 나쁨을 分別함으로써 본래 부처 卽 열반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초기경전에서는 12연기와 사성제로 구체화해 놓은 것이다. 초기불교든, 선불교든 중요한 점은 결국 모든

方便 方法이 다 見性, 成佛, 涅槃에 이르레 하기 위한 手段일 뿐이라는 점이다. 結局 分別心이라는 分別識

그 自體가 固定된 實體가 없는 虛妄한 것이라는 事實을 깨달아, 分別識 分別心으로부터 이어져 일어나는

分別 妄想과 愛欲, 執着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涅槃과 분별하는 마음의 본래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이런 사실을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로 친절하게 구조화 시켜 놓은 것이고, 선불교는 그 모든

설명을 없애고 곧바로 바로 질러 가는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길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처럼 선불교와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本質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