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새누리당 개헌추진회의 의원들의 초청을 받아 열린 간담회에서, 지난 1987년 이후 30년 간의 '대통령 직선제'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단언했다.
새누리당 개헌추진회의는 20일 의원회관에서 민주당 김종인 전 대표를 초청해 개헌을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는 개헌추진회의 대표의원인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과 이철우·강효상·정종섭 간사, 정진석 전 원내대표와 김광림 전 정책위의장, 권성동 법사위원장 등 18명의 현역 의원이 참석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김종인 전 대표는 "대통령 입장에서는 되기만 하면 다 내맘대로 할 수 있으니, 지금과 같은 헌법 체제처럼 편한 것이 없다"며 "다소 모자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할지라도 헌법 상의 권한으로 5년 동안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현행 헌법의 통치구조를 비판했다.
아울러 "사람이 다르면 다를 수 있다지만, 대통령 자리에 들어가면 안주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권력을 향유하다보니 절대로 초심을 유지할 수가 없다"며, '최순실 게이트' 등 역대 대통령 4년차마다 반복되는 권력형 비리 문제를 '제도'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로 몰아가려는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태도를 우회적으로 꾸짖었다.
해외 경험이 많은 김종인 전 대표는 이날 간담회에서 독일과 구 소련 등의 사례를 풍부하게 인용하며 개헌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김종인 전 대표는 구 소련의 정관계·학계 인사를 만났을 때의 사례를 들어 "슈퍼파워였던 당신네 나라가 왜 이렇게 망하게 됐는지 아느냐"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로 70년 동안 사회도 변하고 국민의식도 변했는데, 똑같은 방법으로 국가를 운영하다보니 망한 것"이라고 질타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인간도 나이가 70세가 되면 신체적으로 쇠퇴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과 같은데, 당신네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고 전했더니 "(구 소련의) 그 사람들도 수긍하더라"고 전했다.
우리나라도 내후년으로 헌정 시행 7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1948년 제헌 헌법으로 시작된 대한민국 헌정이 7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1917년 공산화 이후 70여 년만에 멸망한 구 소련의 사례를 인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종인 전 대표는 "우리나라도 70년 동안 정치 운영의 형태가 달라진 게 있느냐"며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 때까지 대통령이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이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고 부연했다.
이후 새누리당 의원들은 김종인 전 대표와의 질의·응답에서 우리나라의 과거 헌정사나 독일의 사례 등을 논의의 화제로 삼으며, 개헌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우리나라가 내후년이면 70주년이 되는 헌정 기간 동안 대통령중심제가 아닌 헌정 체제를 한 번도 실험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60년 4·19 의거 이후 개헌이 이뤄져 이듬해의 5·16 군사혁명 직전까지 약 1년간 의원내각제 체제로 헌정이 운영된 적이 있다.
새누리당 강길부 의원이 이를 들어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를 하면 '장면 내각' 때처럼 권력이 불안정해 나라가 혼란스럽게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자, 김종인 전 대표는 "장면 내각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려를 많이 하는데 (4·19 직후)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민주당에 표를 주니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해 불안정했던 것"이라며 "우리의 경제나 국민의 의식이 그 때와는 달라져, 수준을 놓고 보면 내각제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일축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헌하는 모델로는 의원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가 거론된다. 이 중 독일식 의원내각제는 의회에서 대통령까지 간선으로 선출하는 방식이고, 오스트리아나 포르투갈 식의 이원집정부제는 이른바 '대통령 직선 내각제'라고 해서, 대통령만은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방식이다.
새누리당 강효상 의원은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개헌해서 내각제를 채택하면 대통령 직선제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이라며 "개인적으로는 대통령 직선제를 반대하지만, 대통령 직선에 대한 국민의 DNA적 여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종인 전 대표는 "1987년에 개헌할 적에는 국민이 대통령을 뽑아야겠다고 했지만, 결국 국민 손으로 뽑은 대통령 여섯 명이 전부 다 실패했다"며 "꼭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일반 국민들도 인식하지 않았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내각제를 채택하면서도)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선거제도로 가게 되면, 선거 중에 상호 비방이 일어난다"며 "상처가 많이 난 대통령이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역할을 잘할 수 있겠느냐"고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분단을 극복하고 경제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를 거론했다. 독일은 영국·프랑스에 비해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고 나치 등 독재 정치를 겪었으나, 2차대전 이후 의원내각제 헌법을 채택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김종인 전 대표는 "민주주의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 제도를 잘 채택해서 유럽에서 가장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된 나라가 독일"이라며 "독일 사람들은 '왕이 없으니 상징적인 존재로 대신 대통령을 뽑는 것인데, 그 대통령이 선거 기간에 상처를 많이 받으면 어떻게 상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며 대통령을 직접 뽑지 않는다"고 전했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간담회 참석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새누리당 정종섭 의원은 "내각제에는 입헌군주 의원내각제, 독일과 같은 대통령 간선 내각제, 오스트리아·포르투갈과 같은 대통령 직선 내각제가 있는데 모두가 안정적"이라며 "내각제를 하되 대통령 간선 내각제를 할지, 대통령 직선 내각제를 할지는 국민들이 선택하는 방향으로 가면 될 것"이라고, 대통령 직선 내각제 쪽에 무게를 실었다.
현재의 '최순실 게이트'와, 그로 비롯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직무정지 등의 '비선 실세'로 인한 국정 혼란에 대해서도 김종인 전 대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탓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하지만, 대권을 눈앞에 둔 야권의 특정 유력 인사의 욕심과, 새누리당의 개헌 주도에 따른 일각의 오해 때문에 개헌의 적기를 놓칠 것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종인 전 대표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대선을 앞두고 있는 후보자들"이라며 "이들이 개헌을 우려하는 것은, 개헌을 하면 대통령이 되는데 지장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라고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속내를 꼬집었다.
그러면서도 "여당이 개헌을 강하게 주장하면 반대쪽에서는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개헌을 반대하는 사람이나, 우리나라의 실상을 냉정히 평가하고 무엇이 옳은 길인지 서로 토의하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