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우주만큼 커지는, 우주를 다 품을 정도로 커지는, 대원경지(大圓鏡智)는 거울세포(mirror cell)이다. 중생이 아프면 같이 아프고 즐거우면 같이 즐거운, 즉 중생과 같이 고락(苦樂)을 나누는 거울이다. 유마는 무한차원 거울세포이다. 아픔에 잠 못 이루는 거울이다. ‘왜 잠을 못 잡니까?’ ‘중생이 잠을 못 이루므로 나도 잠을 못 이룬다.’ 삶의 고단함으로, 뇌를 빠개는 고뇌로, 죽음의 공포로, 가난·질병·외로움 범벅인 험악한 노후생활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못 이루는 중생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 현대의 위정자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부조리 인정해야 조리 생겨 고를 인정 안하면 락도 없어 번뇌 통해서 열반이 오듯이 모순 인정 안하면 해탈 없다
인류의 희망은 고통 없는 삶이다. 종교는 그런 삶을 허공에, 이상가들은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정치·경제 체제는 이상향으로의 내달림이다. 모두 자기가 그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이런 무한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 無我(무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완벽한 무아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부처님이나 가능한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시간 속의 삶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계 있는 자에게는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끝없는 향상일로(向上一路)가 있을 뿐이다.
‘금강경’이라는 가없는 크기의 지혜와 자비 창고에서, 각자 분(分)에 따라 얻어갈 뿐이다. 인류역사에는 자비를 실천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나이팅게일, 국경 없는 의사들, 신행, 산티데바 등등이 있고. 상상의 인물로는 법장, 미륵, 관음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이상세계를 꿈꾸더라도, 홀로 사는 세상을 꿈꾸지 않고 여럿이 사는 세상을 꿈꾼다. 혼자 낙을 누리는 낙원이나 극락을 짓지 않는다. 지옥에서도 무리를 지어 고통을 받지 홀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 타인은 나의 고통의 근원이자 낙의 근원이다. 혼자 사는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 이상한 일이다. 미륵이 다스리는 이상세계인 용화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사느라 옆집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주는 무한히 넓은데 각자 낙원 행성을 하나씩 차지하고 살면 안 되나? 안 된다. 군집생물이기 때문이다.
이게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사상으로 나타난다. 생물계의 하나됨을 이리 표현한 것이다. 아직 지식이 부족한 시절에 묘하게 느끼던, 동물과의 친연성(親緣性)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제 과학이 발달하여 모든 생명체들이 동일한 구조의 DNA를 소유함을 알게 되었다. 길가의 잡초도, 흙속의 지렁이도, 물속의 전기장어도, 광견병 걸린 개도, 광우병 걸린 소도, 조류독감 걸린 닭도, 비만증 걸린 돼지도 모두, DNA의 반 이상이 인간의 DNA와 일치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돼지 심장 이식이 가능하다. 식물의 유전자를 동물에게 이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극지방 동물에게는 몸을 얼지 않게 하는 부동(不凍) 유전자가 있는데, 이걸 토마토에 이식해 추운 기후에도 얼지 않는 토마토를 만든다. 소위 유전자조작 농산물이다. 미래에는 식물의 엽록체 유전자를 인간 몸에 이식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안 먹고도 살 수 있다.
차별 없는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생물이 모두 같은 DNA를 가졌기 때문이다. 같은 DNA는 같은 구조의 몸을 만든다. 우리가 동물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뇌구조를, 즉 같은 변연계(감정을 담당하는 기관)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의 구조는 타고 나는 것이기에 ‘빈 서판(blank slate)’은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지구 생물계는 한 가닥의 이중나선이다.
중생계의 비극은, 부조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조리가, 고(苦)를 인정하지 않으면 락(樂)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허기를 통해 포만이, 노동을 통해 휴식이, 수면을 통해 각성이, 구속을 통해 해방이, 번뇌를 통해 열반이 온다. 이미 드러난 모순을 인정하지 않으면, 숨겨진 해탈이 드러나지 못한다. 냄새나는 똥을 싸지 않으면 향기로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83호 / 2017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