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행위는 행위가 아니다

장백산-1 2017. 11. 20. 22:55

 이제열의 파격의 유마경

40.생각 마음, 말, 행동이라는 행위(行爲), 三業은 행위(行爲), 즉 三業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조건 의지해 나타난 거짓현상(假象現實 가상현실, virtual reality)이다.


“이 때 유마힐 거사가 말하였다. 잘 오셨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시여. 온다는 상(相) 없이 오셨고 본다는 상(相)이 없이 보십니다. 문수사리보살이 그렇습니다 거사님, 왔다고 하나 온바가 없으며 갔다고 하나 간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왔다고 하나 왔다는 주체가 없으며 갔다고 하나 갔다는 주체가 없습니다. 본다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일체 존재는 홀로 존재 못해 다른 조건들 서로 만나 생겨난 것

마음도 물질과 그와 같이 다르지 않아 보고 들어도 실제 주체 없어 


이런 문답이나 설법은 대승경전 곳곳에 나타난다. 초심자나 소승의 가르침에 머문 자들은 도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이다. 예컨대 일체의 법이 움직이지 않는다느니, 모든 언행이 끊어졌다느니, 눈도 귀도 코도 혀도 피부도 물질도 소리도 냄새도 없다는 등의 말들은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말들이다. 


이러한 세계는 세간(이 세상)의 범부중생의 안목에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출세간(出世間)의 깨달은 모든 부처님들이 보는 세상이다. 우선 유마거사가 문수사리보살에게 온다고 하나 온다는 相이 없이 왔다는 내용을 살펴보자. 이는 일체의 相이 모두 끊어진 깨달음의 청정한 지혜에 의해서 오고 감을 말하는 것으로 청정한 지혜에 의해 비추어 보면 중생들과 일체 만법의 움직임은 움직임이 아니다. 중생들이 보기에는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오고 가고 머물고, 눕고 앉고, 태어나고 죽고,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청정한 지혜에 비춰보면 일체, 만법, 제법은 움직인 바도 없고 변화한 적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온갖 존재의 움직임과 변화는 중생의 상(相), 즉 분별(分別)과 사량(思量)하는 생각 마음에 의해 그렇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일체, 만법, 이 세상 모든 것은 근본마음에서 일어난 분별하는 마음, 즉 상(相)을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대승에서 바라본 세계관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불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연기설(緣起說)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단, 여기서 가르치는 연기의 교설은 소승법(小乘法, 여기서 소승법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에서 가르치는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을 중심으로 한 십이연기나 업감연기의 교설이 아닌 대승(大乘)에서 가르치는 우주삼라만상을 포함한 제법연기설(諸法緣起說)이다. 


제법연기설에 의하면 일체,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현상, 존재)이든, 정신적인 것(존재, 현상)이든 전부 다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나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독립적으로 스스로를 스스로가 만들거나 생겨나게 할 수 없다. 태양이 태양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땅이 땅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며, 사람을 사람이 만들지 못한다. 돌 나무 풀 먼지 모래 하나까지도 모두 다른 조건인 연(緣)에 의지해서 일어나거나(起) 생겨날(生)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受 想 行 識)도 동일하다. 마음(수 상 행 식 : 느낌 감정, 생각 이미지 상상, 욕망 욕구 충동 의도 의지, 분별심 분별의식 지식 알음알이) 또한 연기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마음이 본래부터 이미 존재했다거나 마음 스스로가 마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모든 물질은 모든 다른 물질에 의존하고 모든 마음(六識)은 인식(認識)의 의지처가 되는 六根과 六境에 의존한다. 인간의 몸은 地 ·水 ·火 ·風이라는 사대(四大 : 네 가지 요소)가 연기되어 드러난 가상(假象 : 일시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며 마음(六識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은 眼(안)· 耳(이)· 鼻(비)· 舌(설)· 身(신)· 意(의) 六根과· 色(색) ·聲(성) ·香(향) ·味(미) ·觸(촉)· 法(법) 六境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임시적인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치에서 본다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실체(實體)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으며 주체(主體)가 없고 자아(自我)가 없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실로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움직이는 존재’라고 여기고 생각하고  이렇게 여기는 생각을 실체가 있는 고정된 진실로 규정(規定)해 놓고 그것에 의지해서 허망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연기의 이치에서 진실로 보면 진정으로 보는 자, 듣는 자, 생각하는 자, 움직이는 자는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조건(緣)에 의지해 나타나는 거짓현상(가상현실 假想現實, virtual reality)인 것이다. 


이렇게 보는 자, 듣는 자, 생각하는 자, 행동하는 자가 모두 영원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거짓현상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 역시 실체가 없는 거짓현상이다. 보았다고 하나 본 바가 없고, 들었다고 하나 들은 바가 없고, 생각했다고 하나 생각한 바가 없고, 행동했다고 하나 행동한 바가 없는 것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한 행위 주체가 실로 영원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보는 행위, 듣는 행위, 생각하는 행위는 실유(實有, 실제로 있는 것)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곧 문수보살과 유마거사는 이와 같은 연기의 도리를 문답을 통해 서로 확인 시켜주는 것이다. 오는 놈, 보는 놈, 오는 행위, 보는 행위가 모두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나타나는 텅~빈 空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대승(大乘)의 넓은 문은 열린다고 할 수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