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칼럼] 개헌 실현의 조건
입력 2017.11.23. 18:16 수정 2017.11.23. 19:36
[한겨레]
1087년 이후 30년 만에 찾아온 개헌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확대하는 것은 물론, 근로(자)는 노동(자)으로, 양성평등은 성평등으로, 신체장애자는 장애인으로, 여자는 여성으로 정명해야 한다. 이런 당연지사를 위해서도 수많은 촛불을 필요로 하는 그만큼 우리의 정치구도는 왜곡된 민의 위에 세워져 있다.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촛불로 획득한 개헌의 기회, 촛불 없이 실현할 수 있을까? 또 문재인 대통령의 진취적이고 과감한 지도력 없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까? 대단한 ‘사회적 기포’도 시간이 흐르면 잦아들기 마련이다. 사람은 희망찬 변화에 대한 기대가 있다고 해도 불안한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변혁적 국면은 다시 정치로 귀결되는데, 진보정당과 시민사회의 역량이 아직 취약한 한국에서 정치는 공작정치의 외피만 남고 통치와 행정으로 수렴된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 대부분은 지금 청와대와 국회를 바라보는 객체에 머물러 혹은 찬사를 혹은 불만의 소리를 내고 있다.
본디 기존의 구조나 성채를 무너뜨리는 일이 그것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법인데,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으니 새로운 구조와 성채를 짓는 일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이후를 설계하고 경제 양극화를 구조화한 ‘87년 체제’를 극복하여 고루 더불어 사는 세상을 열어야 할 시점에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옛것은 사라졌으나 새것은 아직 자리잡지 않은 위기이면서 기회의 시간에 개헌은 그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실현 가능성은 어떨까?
1년 가까운 시간을 허투루 보낸 국회 개헌특위가 11월22일부터 개헌 논의에 들어갔다. 기본권, 지방분권, 경제 · 재정, 사법부, 정당선거, 정부형태(권력구조)에 대해 3주 동안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기본권이나 정부형태뿐만 아니라 개헌 시기에 대해서도 자유한국당은 홍준표 대표를 비롯하여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4당 합의로 국회에 개헌특위를 구성한 게 올해 1월의 일이었는데, 지난해 4월 총선과 올해 5월 대선으로 제1당과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도 아직 개헌에 대한 당론이 없다. 앞으로 논의 사항마다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중구난방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표류할 공산이 크다고 보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듯하다. 30년 만에 갖게 된 개헌 기회임에도 국회와 정치권은 이처럼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가볍게 보고 있고, 국민 대다수 또한 개헌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무관심과 냉소를 보내고 있다.
실상 국회의원 다수가 민주주의자라면 개헌 이전에 개헌보다 훨씬 쉽고 간단한 비례대표제를 이미 법제화했어야 마땅했다. 현행 헌법 제41조 1항은 “국회는 국민의 보통 · 평등 · 직접 · 비밀 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인=1표’가 보통선거의 구현이고 ‘1표=1가치’가 평등선거의 구현이라고 할 때, 이를 위해선 비례대표제가 필수적이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힘주어 말하듯 지금과 같은 소선거구제 아래선 다수당을 찍은 1표의 가치가 소수정당을 찍은 1표의 가치에 비해 심지어 열배 이상이 되기도(지방선거의 경우) 한다.
그 때문에 국회의원 수를 360명까지 늘리더라도 그만큼 비례대표 의원 수를 늘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해 지역구로 50%, 정당 투표로 50%를 따로 선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분이 많다. 지역구에서 50%를 일단 선출하지만, 의원 총수는 정당별 득표 비율에 정확히 맞추게 되어 있다. 예컨대 어느 정당이 지역구에서 한 사람도 선출되지 않았는데 정당투표로 10%를 얻었다면 그 당은 의원 총수의 10%를 차지한다.) 현행 대의제는 현행 헌법에 담긴 평등선거의 원칙을 배반하고 있다. 비민주적 제도 아래 선출된 국회에서 민주주의 확장을 위한 개헌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 들어 ‘1인=1표’의 보통선거 원칙을 빙자하여 비민주적 견해도 민주적 견해와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탈진실(post-truth) 정치’ 현상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트럼프 현상’과 관련하여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규정한 현상으로 이제 진실 여부는 정치에서 중요한 요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설득보다 선동이 더 잘 먹히게 하는 배경인데, 이런 현상이 미국보다 덜하다고 할 수 없는 한국이라고 할 때, ‘보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반동’에 가까운 자유한국당이 국회에서 개헌 저지선을 넘는 116석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개헌이 가능할까?
그뿐만이 아니다. 일찍이 볼테르가 지적한바, 광신자들이 열성적이듯이 극우적이거나 ‘오로지 사익 추구’에는 그 자체에 열성이 내재해 있는 데 비해 촛불에 열성이 내재해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개정 헌법의 기본정신에 평등이 그 중심에 담겨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1표=1가치’의 평등선거를 실현할 수 있는 비례대표제를 이미 강조했거니와 경제적 평등의 물적 토대로 기본소득과 함께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비롯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중요한 과제로 보고 있다.
경제민주화 조항에서는 현행 헌법이 70년 전의 제헌헌법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다는 게 중평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은 가령 차별금지법에 성정체성을 제외하도록, 또 성평등이 아닌 양성평등을 완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에 비해 열성적일까? 이미 개헌 관련 사이트마다 “성적 지향 차별금지법 반대, 성평등 반대, 난민법 반대, 국민을 사람으로 변경하는 것 반대”라는 내용의 댓글이 도배되고 있다. 열성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냉정히 말해, 조직적이지 않은 촛불은 다만 숫자로 겨룰 수 있을 뿐이다.
잠시 박근혜 탄핵에 새누리당 의원 중 절반 가까이가 찬성표를 던졌던 1년 전을 되돌아보자. 그들이 그렇게 물러서야 했던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촛불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기포’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박근혜 탄핵은 촛불의 수적 위력에 의한 수동 혁명의 성격이 짙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뒤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30여명의 의원이 탈당해 ‘바른정당’을 꾸렸으나 그중 다수가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자유한국당으로 되돌아갔다. 촛불을 들었던 민주시민이라면 이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촛불이 잦아들면서 그들에게 1년 전에 두렵게 했던 촛불시민이 이젠 보이지 않으며 꺼진 촛불이 다시 타오르지 않으리란 믿음이 생겼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개헌은 기필코 실현해야 한다. 30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그것은 먼저 공자님 말씀대로 정명(正名)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확대하는 것은 물론, 근로(자)는 노동(자)으로, 양성평등은 성평등으로, 신체장애자는 장애인, 여자는 여성으로 정명해야 한다. ‘신체장애자’와 같은 용어를 헌법에 담고 있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당연지사를 위해서도 촛불을, 수많은 촛불을 필요로 하는 그만큼 우리의 정치구도는 왜곡된 민의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명(正名)의 첫출발부터 커다란 난관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그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도력이다. 그래서 두 손 모아 갈구한다. 촛불의 수혜자가 아닌, 진실의 촛불로 미망과 억지의 땅을 밝게 비추는 지도자, 그리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 헌법 전문의 정신을 구현함에 있어서 그 어떤 존재도 배제되지 않게끔 앞장서는 정치 지도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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