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잘났다는 마음'을 닦으라
‘나라는 것이 없는데 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스님은 스님이라는 고정관념의 틀 깨는 사람
불교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큰 아상(我相)에 빠져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불교공부와 수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일 수록 ‘나는 불교공부와 수행을 잘 하는 사람이다.’ 라는 등의 ‘나 잘난’ 아상을 많이 만들어 낸다. 물론 그런 아상을 가지면 잘못이고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마음(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아상 때문에 자책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상을 다만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아상을 잘 지켜봄으로써 ‘나’라는 허상에서 곧장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수행자들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수행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허상 이 점을 잘 지켜보는 것이다. ‘나’라는 허상을 잘 지켜보아 ‘나’라는 허상에 빠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그같은 수행이야말로 아상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 수행자다’하는 그 아상, ‘나 잘났다 하는 마음’ 그 마음을 잘 닦아낼 수 있어야 비로소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있다. 물론 이건 수행자만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떤 것과 동일시(同一視) 해 놓고 동일시하는 그것이 자신인 줄 착각(錯覺)한다.
그러나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나 자신과 동일시(同一視)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것이 ‘나’일 수 있겠는가. 딱 잘라 ‘이것이 나다’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스스로 열등 의식이나 우월의식을 가질 것인가. 돈 좀 있고, 명예가 좀 높고, 사회적으로 이름 좀 드날린다고 치자. 그런다고 돈, 명예, 사회적 명성 그런 것이 나인가? 절대 그것이 나는 아니다. 그냥 그것은 일종의 잠시 걸치는 겉옷일 뿐이다. 사람들은 돈, 명예, 사회적 명성 거기에 속을 것이고 물론 스스로도 거기에 속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라면 그런 껍데기를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씌워놓은 온갖 상들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돈, 명예, 사회적 명성을 중요시 여길 것이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면서, 돈을 펑펑 쓰고 살면, 남들이 나를 대접해 준다.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다. 그것은 너무나도 달콤하다. 그것을 버리기 싫다. 더 많이 벌고 싶고, 더 많이 주목받고 싶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으며, 내 이름을 더 많이 빛내고 싶다.
그러나 그런 껍데기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설사 그런 껍데기들을 다 누리고 살더라도 그런 껍데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상’을 녹이는 무아의 수행이고, 집착을 버리는 방하착의 수행이며,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삼법인의 수행이며, 이 세상엔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무상의 수행이며, 이 세상은 텅 비어 있다는 공의 수행이며, 다만 조건따라 변화해 갈 뿐이라는 인연법의 수행이다.
‘나’라고 여기는 일체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내 소유’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라. ‘내 것’은 어디에도 없다. 하물며 수행하는 사람이 ‘나는 수행자다’라는 상을 내면서 스스로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스님은 ‘스님’이라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사람이다. 부단히 스님의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비로소 스님이라는 상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스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법상 스님, <법보신문/2005-01-19/7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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