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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에서의 마음공부 특별과외

장백산-1 2024. 9. 23. 00:05

지구별에서의 마음공부 특별과외

장백산-1 2019. 10. 1. 16:52 

지구별에서의 마음공부 특별과외  - - 법상스님



경전을 독송할 때마다 하는 네가지 게송이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개경계, 개법장진언인데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은 열개(開), 법장(法藏) 즉 법(진리)의 창고, 법의 보배창고, 법장을 여는 진언 이런 말이거든요. 그래서 아~ 팔만대장경 같은 그런 경전이 있는 어떤 곳, 어떤 경전을 여는 그런 진언이겠구나 생각해서 그래서 경전을 시작하는 진언 이런 뜻으로도 해석을 할수가 있죠.

그런데 이제 개법장진언의 참 뜻은 내가 이제 경전을 열어서 경전 독송을 시작합니다 이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이 있는 곳이 어디냐? 법장이 어디 있느냐? 법의 곳간, 법의 저장창고 법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하는 의미가 더 큽니다. 법(진리, 깨달음, 道, 부처, 마음)은 팔만대장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팔만대장경은 사실 법이 아니죠. 

팔만대장경은 법을 가리키는 방편인 손가락일뿐 당연히 언어 문자로 엮어진 팔만대장경은 법이 아닙니다. 법을 가리키는 방편인 손가락이죠. 그래서 팔만대장경을 문자반야라는 표현을 씁니다 '문자반야(文字槃若)'. 경전 자체가 법일 수는 없잖아요. 어찌보면 파격적이죠.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는 경전을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경전은 법이 아니고 방편이라 하니까. 당연히 경전은 법이 아닙니다. 모든 경전은 법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인 하나의 언어, 문자일 뿐입니다.


그럼 진짜 법은 무엇이냐? 진짜 법이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냐? 해인사 팔만대장경에 가야지만 있느냐? 해인사 팔만대장경 거기 가야지만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는 문자 반야가 있는 곳이고 진짜 반야는  진짜 법은 어디 있느냐? 진짜 반야 진짜 법은 본래부터 누구나 저마다 갖고 있다, 내게 있다. 법장, 법의 보배창고가 전부 다 사람들 저마다 각자 자신에게 다 갖추고 있다. 이 세상, 우주 법계가 그냥  법의 저장 창고입니다. 지금 여기 눈앞 목전이 그대로 법장, 진리의 보배창고이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  바로 지금 여기 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자리가 법의 보물창고, 법장(法藏), 진리의 보물창고 입니다.

들려오는 새소리가 법장이 열리는 소리이고, 들숨을 쉴때 법장이 열리고, 말을 할 때 생각을 할 때, 모든 일거수일투족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법장이 열리고 있는 겁니다. 아니 열리고 있다는 말도 맞지 않아요. 법장, 진리의 보물창고, 깨달음의 보배창고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법장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활짝 열려 있어서 닫혀진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열고 닫는다고 말할수가 없어요. 법장을 열고 닫으려면 여는 누군가가 있어야 되고 닫는 누군가가 있어야 되요. 법의 창고의 문 안이 있고 문 밖이 있어야 되지요.

근데 법장, 법의 창고는 안과 밖이 따로 구분된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법장을 열고 닫고 할 일이 따로 없죠. 그래서 법장은 열고 닫고 할 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법장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활짝 열려있죠. 법장을 굳이 말로 한다면, 법장은 여는 문 닫는 문이 따로 없으니까 어느 때나 어디서나 완전하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 스스로가 닫고 있을 뿐이죠. 법장 스스로 언제 어디서나 활짝 열려있는 것을 난 법장을 안볼래 하고 눈을 질근 감고서 기어이 안보는 것을 선택하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법장을 볼 방법이 없는 겁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을 물가에 데려가 입 앞에 물을 갖다 주고 있는데 이 물이 철철 흐르는데도 난 끝까지 물을 안먹겠다고 입과 목구멍을 열지 않으면 목안으로 물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처럼.. .

그러면 안도 밖도 없고 문도 없는 법장을 어떻게 여느냐? 본래부터 나에게 있는 나의 법의 저장창고를 내 스스로 열어야만 합니다. 근데 나는 그동안 어떻게 하고 있었느냐? 법장을 열지 않고 닫아놨습니다. 그리고 법장을 열더라도 어떻게 열었냐 하면 선택적으로 열었습니다. 뭐 세상에서도 보면 오픈마인드(open mind)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마음을 항상 열고 있어라 요런 얘기를 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놔야 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어떻게 하는게 마음을 여는 것이냐? 어떻게 하는게 법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이냐? 이젠 이게 궁금하단 말이죠. 그것을 알려면 먼저 내가 어떻게 나의 마음을 닫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법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왔느냐. 어떻게 닫아 왔느냐면, 열반경(涅槃經)에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暗女)라는 이야기가 나와요.공덕천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막 부귀영화를 한손 가득 들고 있는 이런 여인이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열어주고는 누구십니까? 물었더니, 저는 어느 집이든 그 집만 가면 항상 부귀영화와 행복과 아름다운 것들을 항상 갖다주는 그런 공덕천 입니다. 그랬더니 집 주인이 아이구 어서 빨리 들어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때 공덕천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누가 또 문을 두드려요, 그래 봤더니 막 냄새도 나고 아주 누추하고 허름한 복장을 한 그런 사람이 냄새도 나고 근데 손에 든 온갖 안좋은 것들 오물이며 이런 것들 잔뜩 가지고 있는거죠. 그래서 인상을 찡그리면서 당신은 누구냐? 그랬더니 저도 좀 들여보내달라 해요. 집 주인은 안된다며 문을 닫으려고 했더니, 그럴수가 없다 저안에 있는 공덕천이 나의 언니이기 때문에, 공덕천을 받아들일려면 반드시 흑암여인 나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왜냐면 공덕천과 흑암녀는 언제나 둘이 아닌 같은 하나이기 때문에 동전의 앞면 뒷면 처럼 언제나 같이 따라 붙는다 같이 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인생에는 공덕천이 있을 때 언제나 흑암녀도 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갑자기 돈이 많이 생겨서 부귀영화를 떵떵대며 누리고 있다는 거는 반드시 그 뒤에 흑암녀가 같이 따라붙어 있는데 흑암녀는 안보이죠. 왜냐 내 눈이 공덕천만 보고 있으니까요. 공덕천 뒤에는 어떤 흑암녀가 붙어있을까요?

나에게 생긴 돈은 반드시 사라진다라는 흑암녀가 반드시 언제나 공덕천 뒤에 같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것은 그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행복한 공덕천도 있지만, 이 사랑하는 사람과 반드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아픔인 흑암녀 그것도 같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깊이 깊이 집착하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배신당하거나 그 사람이 바람을 피거나 하면 그 충격 그 아픔은 그냥 나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나에게 아픔을 준거 보다 상처 준거보다 훨씬 더 큰 아픔과 상처가 되겠죠.

왜 그러냐면 공덕천의 크기가 큰 만큼 흑암녀도 똑같이 큰것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좋은 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반드시 그것은 과도한 흑암녀를 같이 껴안고 있는 겁니다 내스스로. 그 두가지는 두개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즉 행복이 있는 그 자리에 괴로움도 같이 있는 겁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괴로움이 있을 때, 내 인생에 왜 이렇게 흑암천만 찾아오느냐? 흑암녀만 자꾸 내 인생에 오느냐? 

내 인생에는 공덕천이 온적이 없다. 계속해서 내 인생에는 흑암녀만 찾아온다. 내게는 자꾸 괴로운 일만 생기고 힘든 일만 생기고 뭘해도 나는 자꾸 인생이 꼬인다. 내 인생만 꼬이는게 아니라 내 아들, 딸의 인생도 나와 인연 맺은 사람은 다 자꾸 인생이 꼬이는거 같다.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그 괴로움이 있을 때, 뭔가 꼬이는 일이 있을 때,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 내 인생에 뭔가 지금 이런 괴로운 일 말고 내가 꿈꾸는 다른 일, 즐거운 일, 행복한 일, 나를 평화롭게 하는 일, 내가 추구하는 일, 그 일이 벌어지기를 희망할 때 그래서 지금은 아직은 부족해라고 느끼고 아직은 괴로워라고 느끼고 지금은 최악이라고 느낄 때, 지금의 괴로움은 너무나 힘들어라고 느낄 때, 그 때가 사실은 괴로움이 있는 그 자리에 공덕천이 언제나 같이 있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좋은 일 나쁜 일이 같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합니다. 

왜 괴로움이 있을 때 기쁨도 괴로움이 있는 그 자리 같이 있을까요? 이 세상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즐겁다고 느끼는 것이 진짜 즐거움이냐? 진정한 즐거움이냐? 진정한 즐거움이면 거기에 목숨 걸고 쫒아가야죠. 좋은 일이 생기라고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야죠. 그런데 괴로움이 생기고 행복이 생겨도 그건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러면 행복에 대해서 좋은 것에 대해서 집작한 크기만큼 괴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행복을 쫒아가는 것은 동시에 괴로움을 쫒아가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지금 내 머릿속에 이러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어 하고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괴로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겁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동시적으로 괴로움을 추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소멸되는 모든 것들, 즉 '생사법(生死法), 생멸법(生滅法)' 이 세상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생사법이기 때문에, 생겨나면 사라질수 밖에 없는 존재, 생겨나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생겨나면 사라지는 것에는 진실이 실체가 없습니다. 실질적인 행복이 없습니다. 잠깐 왔다가는 허망한 행복밖에 없죠. 행복이 잠깐 왔을 때 즐기는 건 괜찮습니다. 행복이 허상인 줄 알고, 행복이 왔으니까 지금 같이 재밌게 놀아야지. 근데 언제 얘는 반드시 언제 떠나갈거야 이 사실을 알면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돈도 벌고, 열심히 일도 하고, 명예, 권력, 지위도 열심히 추구하고, 자식들 좋은 대학교도 보내고 하라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는게 아니에요. 불교에서는 하라는 겁니다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그 모든 걸 다 해도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허상이 왔다 가는 거라는 사실, 이게 내가 그렇게 목숨걸 건 아니라는 사실, 자식을 좋은 대학교를 보내야지 하고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 건 좋은데, 그게 반드시 자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실체적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죠. 그게 분명하다면 좋은 대학교 나와서 좋은데 취직하고 돈 많이 벌면 무조건 행복해야 되는데 엄청 괴로운 사람도 있을수 있어요. 돈은 엄청 버는데 가족과 아주 지옥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돈은 별로 못벌지만 너무나 행복하고 화목하게 한 생을 정말 기쁨으로써 사는 사람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것들, 세상 모든 현상들은 '생사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생사법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면 생사법 그걸 추구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생사법에 집착하지 않고 하는 것은 추구하되 추구하지 않는 거에요. 하되 하는 바가 없는 겁니다. '무위법' 으로 하는겁니다 행하되 행한 바가 없이 행하는 것,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 집착하는 바 없이 그것을 하는 거니까 그것은 좋습니다.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과도하게 집작할 필요는 전혀 없죠. 전부가 다 왔다 갈꺼니까. 왔다가 갈거에 집착할 필요가 당연히 없습니다. 목숨걸 필요가 당연히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의 특징이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것이라면 과도하게 내가 집착할 것도 없고 과도하게 미워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괴로운 일이 일어날 때 이 괴로움은 문제가 아니다 라고 하는 이유 괴로움 곧 흑암녀가 곧 공덕천이라고 하는 이유, 그 이유가 뭐냐면 이와 같이, 내 눈 앞에 드러나는 내가 추구하고 있던 모든 좋은 것들은 왔다가 가는 거니까 실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좋은 것만 계속 내 인생에 드러나면 좋은 거에 되취되어서 내 인생은 행복해 내 인생은 괴롭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뭐냐?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깨달음을 멸성제, 멸도, 열반이라고도 부릅니다. 행복한 사람은 마냥 승승장구만 하고 마냥 즐거운 일만 있는 사람은 거기에 도취되어서 괴로움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라는 마음다짐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깨달음에 대한 가능성이 없어지는 거에요.

마냥 행복하고 마냥 즐거운 일만 계속되는 사람 언제나 공덕천만 오는 사람은 언젠가 이게 무너질거라는 사실을 눈치 못채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 보세요. 한참 잘나갈 때 자신이 언젠간 죽을거다 이런 생각 합니까? 내가 미리 마음공부 해놔야지 이런 생각 하나요? 안합니다 못합니다. 공덕천 그게 무너졌을 때 그때 가서 깨닫는 것이죠. 뻔히 알면서도 뻔히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병문안 갈 때마다 그렇게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걸 확인하면서도 나에게 설마 늙고 병들고 죽는 그게 나에게 오겠나? 이런 어찌보면 참 말도 안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괴로움이 있을 때 비로소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라는 발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들이 살아가는 인간세계라는 곳은 정말 '인신난득(人身難得)'이라고 해서 아주 어렵게 어렵게 인간세계에 태어나는 겁니다. 부처님이 세 가지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게 어느 정도 어려운 일이냐면 '조갑상토(爪甲上土)' 라고해서 인도 갠지즈 강에 엄청 드넓은 모래사장이 있는데 그 드넓은 모래뻘에 손가락으로 이렇게 모래를 퍼서 손가락 위에 얹히는 모래 만큼의 양의 가능성으로 인간세계에 몸을 받아 태어난다는 거에요. 그렇게 인간 몸 받아 태어나기가 어렵다. 진짜 어마어마한 오랜 생을 수억, 수조 년을 기다려가지고 어렵게 어렵게 인간 몸 받아서 한번 태어나고 이제 간단 말이죠. 그럼 언제 다시 지옥에 갈지 천상에 가면은 언제 다시 인간계에 올지 알 수가 없다.


근데 인간세계만이 유일하게 업을 지을 수 있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 누구나 다 인간계에 사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고요, 이 세상은 주로 다 천상세계 신들, 축생들, 지옥, 아귀, 뭐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이죠. 인간계는 아주 독특한 세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신난득'이라 인간 몸 받아 태어나기 그렇게 어려렵고, 인간이 살고있는 이 지구는 아주 특수한 별이라는 거에요. 사실은 우리가 자꾸 육도윤회를 하는데 우리가 정토신앙을 하잖아요.  정토신앙을 왜 하냐면은 육도윤회에서 벗어나서 육도윤회 안하고 뭔가 정토라는 부처님이 만드신 극락세계나 이런 정토세상에 가서 부처님의 특별괴외를 받으면서 특별하게 수행할 수 있는 곳은 없을까? 

그래서 지옥에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다시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언제나 부처님이 가르쳐줘서 부처님의 도움을 받아서 언제나 진보만 있는 성숙만 있고 성장만 있어서 깨달음만 가까이 있는 그런 정토를 꿈 꿉니다 사람들은. 놀라운 점은 그 정토신앙이 그러한 사람들의 갈구 때문에 만들어졌는데요  그런 정토신앙이라는 방편이 만들어졌는데 그 정토신앙이 그냥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진실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자리가 정토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가 바로 그 정토다 라는 얘기를 해주기 위해서 정토사상이 나온 거에요. 정토가 지금 여기 있고 지금 여기에 정토가 있다라는 얘기는 뭐냐하면 부처님께서 육도윤회 안하도록  육도윤회하는 저 윤회의 수레바퀴 고통의 세계 말고 부처님이 언제나 개인과외, 개인교습을 해주는 곳이 정토, 즉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입니다. 정토는 육도윤회 안합니다. 육도윤회 안하는 정토 그게 바로 우리들이 사는 이 지구별입니다. 

인간계 인간 몸 받아 태어난 지금 이곳, 지금 이곳이 왜 정토일까요? 우리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천상같은 곳에서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옥은 저 무간지옥이라는 표현도 쓰듯이 무간(無間)이라는게 간격이 없다. 쉬는 시간이 없는 지옥이라는 소리에요. 잠깐 숨돌릴 틈도 없이 계속해서 괴롭다는거에요. 지옥은 너무너무 괴로와서 마음공부 할 정신이 없습니다. 천상세계는 너무 행복해서 너무 즐겁고 승승장구하고 공덕천만 있는곳이 천상세계에요. 그런데서는 수행 절대 못합니다. 왜? 괴로움이 없으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발심을 못해요. 천상세계 사람은 수행할 수 없습니다.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인간계만이 마음공부를 통해 깨달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인간세계가 바로 그 정토,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입니다. 사실은 극락세계가 바로 인간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계에 태어났을 때 어떤 개인과외를 받느냐? 여러분 비싼 개인과외 누구 시켜서 쉽게 말해서 좀 막 힘들게 개인과외를 요즘 말로 뭡니까 빡세게 개인과외를 시킬라면 돈도 많이 줘야지만 그만큼 애를 막 후들들들 잡아가지고 막 힘들게 공부시키잖아요. 저 어디죠 그 과외하는 학원들 중에 서울 외곽에 빠져서 한적한 곳에서 이렇게 애들 합숙시키면서 6개월에 한번 엄마 얼굴 보여주면서 합숙시키는 학원이 있데요. 비싸면서 거기 잡아놓고 그냥 공부만 시킨답니다. 거기 공부하는 친구들은 정말 진짜 정신병동같다. 너무 공부하는 기계도 아니고 정말 쉼을 쉴 틈이 없다. 쉬지 못하고 그냥 공부에 대한 압박감에 주눅둘어 산답니다. 근데 그 왜그럴까요? 특별과외를 시킬라고 하니까 그렇게 갖다 붙잡아놓고 시키는거 아니겠어요?

인간세계가 바로 그런 곳이다. 인간계는 깨달음을 위한 특별과외를 받는 땅입니다. 특별훈련, 특별전지 훈련 오는 땅이라는 말이에요 쉽게 말해. 그런데 여기 왜 올까요? 천상세계 신들이 봤을 때는 뭐 잠깐 한 1초 2초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 잠깐 갔다오면 되니까 우리 시계로는 백년이 엄청 긴거 같지만 천상세계 시계로는 백년이 찰나같이 짧다는것이죠. 그러니까 잠깐 갔다 와서 깨달을 수 있다면 누가 안오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인간계에 올려고 하는데 각오를 하고 오는 것이죠. 인간계에 가면 반드시 괴로울 수밖에 없어 늙고 병들고 죽는 것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거 좋아하는 거 못만날수 있어, 싫어하는데 억지로 만나야 되는 것들 많아, 구하는데 얻지 못하는 거 투성이 입니다. 몸을 지니고 있으면 반드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일이 계속 펼쳐지잖아요. 

'오온개공(五蘊皆空)' ' 오온성고(五蘊盛苦)'라고 그래서 이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요 반드시 괴롭습니다. '오온성고' 그게 법칙이에요 '오온성고' 오온을 갖고 있으면 무조건 괴로와요. 여러분 몸을 가지고 있으면 몸이 계속 말 안듣잖아요 일어나기 싫은데 일어나야되죠, 일하기 싫은데 일해야 되죠, 놀고 싶은데 일해야 되죠, 자고 싶은데 안되죠, 술한잔 먹고 나서도 몸이 쌩쌩했으면 좋겠는데 몸이 불편하죠, 나이가 들면 몸이 점점점 아파지죠, 눈도 엄청 나빠지죠, 몸이 자꾸 나를 괴롭힙니다.

그런가하면 마음이 생각이 나를 엄청 괴롭혀요. 이 마음 생각이라는 뜬금없는 정말 대책 없는 진짜 잘못이라는 잘못은 다 저지르는 오류란 오류는 죄다 범하는 그게 생각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생각 생각은 진실하지가 않습니다. 생각 마음은 완전한 허상을 만들어내요. 그래서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그러니까 오죽했으면 부처님께서 생각은 전부 다 분별 망상, 번뇌다 라고 얘기했겠어요?

예를들어 남편이 밤 늦게까지 술을 먹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밤 늦게까지 안들어온다. 새벽 한시 두시 됐는데도 안들어온다. 그거는 어떤 상황이냐하면 그냥 남편이 술먹다가 늦는 상황이에요. 아무 문제없는 평범한 상황, 일상적인 상황, 누구나 다 있을 수 있는 어느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아무 문제없는, 평생 그러기를 수백 수천번을 해도 사실 큰 문제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사실은. 그런데 우리 머리는 번뇌망상이라는 생각은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새벽 한시 두시 세시까지 계속해서 머리속에서 이 사람이 어디서 술먹다가 술 쳐드시다가 어디 쓰러져서 어디 길거리에 그냥 쓰러져있는 거 아닐까? 그러다가 그냥 한밤 중에 차가 그냥 와가지고 툭 치는거 아니야? 그랬다가 응급처치도 못받아가지고 지금 어떻게 되는거 아니야? 아니면 그것도 양호해요 그 정도면 이 사람이 나이도 있는데 말이죠 그럴리가 없는데 어디 뭐 참 여자있는데 가서 눈이 맞아가지고 혹시 바람피고 있는 거 아니야? 온갖 정말 남편을 죽였다 살렸다가 막 외도를 시켰다가 실제 남편이 외도하는게 더 문제이거나 남편이 술을 먹는게 더 문제인가요?

내 머릿속에서 남편을 그런 놈으로 만드는 이 생각이 더 문제인가요? 이 생각이 그걸 그렇게 만들 뿐이지 남편이 그렇게 만드는게 아니에요. 실제 여러분 인생에서 남편이 여러분을 괴롭혔을 때보다 내 생각이 나를 괴롭혔을 때가 훨씬 많죠. 훨씬 많아요. 남편은 몇번 괴롭혀요 근데 생각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나를 괴롭힙니다. 이와같이 생각이라는 거는 정말 어이없게도 끈임없는 오류를 일으킵니다. 생각이 만들어내는 모든 관념(觀念), 개념(槪念)은 전부가 다 오류에요. 여러분들 연세가 드시면 드실수록 점점 더 몸에 대한 불안함, 몸이 아프면 어쩌지? 건강에 대한 염려증 이런걸 항상 달고 다니잖아요? 그거 전부 다 생각 쓸데없는 망상 아닙니까? 전부 다 생각입니다. 몸이 아프면 어쩌나 하는거 전부 다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나를 아프게 만드는거지 더 아프게 만들어요. 그 생각 때문에 나는 더 괴롭고 힘듭니다.

그렇게 허망한 생각이라는 두번째 화살을 맞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아파지면 그때 가서 한번 아프면 끝인데 왜 지금부터 미리 아픈걸 연습을 해서 그 아픈걸 미리미리 창조해냅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가서 한번 화살 맞으면 되요. 어차피 '생로병사(生老病死)' 어차피 뭐 어떻게든 아플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는게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요 반드시. 그게 법칙이니까.

그러니 그때는 그때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왜? 그때라는 건 사실 없으니까. 지금 이순간밖에 없는데 지금 이순간을 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늙어, 병들어, 죽어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으니 사실은 늙고, 병들고, 죽는게 나를 괴롭히는 겁니까? 내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겁니까?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거에요. 사람들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을 한번도 죽이지 않았잖아요. 아직까지는 잘 살고 있잖아요.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날꺼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이것은 생각이 부리는 망상입니다. 실제 죽음이라는 사건이 여러분에게 안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안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죠. 현상적인 죽음은 일어날지라도 진실에서 아~ 이게 죽는게 죽는게 아니구나 본래 불생불멸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죽음이 죽는게 아닌 거에요. 그래서 죽음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죠. 왜? 늙고 병든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할 때만 늙고 병든거기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지만 이 몸은 내가 아니니까.

이와같이 인간계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 그것도 어렵게 어렵게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에게 '인신난득' 그렇게 어려운 가능성을 뚫고 인간몸 받아 딱 태어났어요 첫번째 어려운 일입니다. 두번째 어려운 거는 인간 몸 받아서 그 어렵게 어렵게 태어났는데 이 칠십억 인구가 있는데 이 가운데 부처님 법을 믿고 또 그것도 정법의 부처님 가르침을 믿을 수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사람 그건 또 그 가운데도 또 어렵다는거죠  그 가운데 너무나도 어렵다. 


근데 이제 불법을 딱 만나서 바른 법을 만나서 야 내가 이제 공부만 하면 되겠구나 라고 인제 딱 마음을 냈는데 그런데 또 세번째 문제 세번째 어려움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경전에서는 건강한 몸 받아 태어나기 어렵다 혹은 뭐 남자몸 받아 태어나기 어렵다. 이런식의 표현을 쓰는데 그거는 남자나 건강한 이런것이 아니라 내가 이 공부가 좋은 건 알아도 몸과 마음이 정상적일 때만 공부를 할수 있어요. 몸이 너무 아프면 공부 하고 싶어도 공부를 못해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겠습니까? 이 법문을 듣고 싶어도 이거 귀가 안들리기 시작하면 더 이상 법문을 들을 수가 없어요. 책을 보고 싶어도 경전을 보고 싶어도 눈이 안보이기 시작하면 더 이상 공부를 할수가 없습니다. 내가 정신적인 문제를 겪거나 정신적인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 이 마음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부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조건 이걸 갖추기가 또 어렵단 말이죠. 그런데 이 어렵고 어려운 이 세가지의 그 어려운 난관을 다 뚫고 이 70억 인구 중에 몇몇 되지 않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이 우리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뭐겠습니까? 바로 괴로움이라는 특권이 주어진 겁니다. 왜냐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 해탈, 열반이거든요. 그러면 괴로움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이야말로 우리를 정말 깨어나게 할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괴로움을 바르게 자각하는 것,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을 
온전히 아는 것, 고성제를 확실하게 아는 거, 그래서 괴로움을 거부하거나, 괴로움을 밀쳐내거나, 괴로움을 미워하지 않고, 괴로움을 온전히 관하고, 괴로움을 온전히 경험하고, 괴로움을 온전히 살아주는 것, 그렇게 고성제(苦聖諦)를 바르게 받아들일 때 그때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가 한번에 구족됩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이라고 하잖아요, 색이 있는 그 자리에 공이 있다. 문제가 있는 그 자리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 번뇌가 있는 그 자리에 보리(깨달음)이 있습니다. 사실은 고성제에서 모든 문제는 끝나버립니다. 문제의 원인을 탐구할 것도 없이. 근데 그걸 이해를 못하니까 고성제로 해결이 안되는 사람에게 고성제에서 어떻게 해결이 되느냐? 괴로움이 왔을 때 흑암녀가 찾아왔을 때 ~ 이게 바로 공덕천이구나~ 이게 흑암녀가 아니다. 내 의식으로 머리속으로 헤아리면서 흑암녀는 버려야지! 공덕천은 잡아야지! 이런 분별을 하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흑암녀 공덕천이라는 분별을 하지 않게 될까요? 아까 그 집 주인처럼 공덕천이면 문을 열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흑암녀라면 문을 꽝 닫아서 나가세요~ 한단 말이에요. 그것만 하지 않으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 문을 열고 닫지 않으면 되요. 어떻게?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겁니다. 뭐를 향해? 공덕천을 향해서도 흑암녀를 향해서도 모든 것을 향해서 열어놓는 겁니다 내 마음의 문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취사간택(取捨揀擇)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공덕천은 취하고 흑암녀는 버리는 분별하는 생각 차별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렇게 취사간택하지 않으면 그럼 무엇일까요? 지금 여기 이대로의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생각, 지금까지 나의 업, 내 남편, 내 아내, 내 조건,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처해 있는 인연, 내가 지금 부딪치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들, 괴로움들, 그 모든 것들을 향해서 문을 닫지 않는 거에요. 내 마음의 문을 언제나 어디서나 열어놓는 겁니다. 무엇이 오든 가든 마음대로 해라 왜? 무엇이 오더라도 공덕천이 오더라도 부처가 오는 것이고 흑암녀가 오더라도 부처가 오는 것이기 때문에 공덕천, 흑암녀라는 분별은 머리속에 생각이 하는 겁니다 분별심이 하는 겁니다. 진실은 공덕천과 흑암녀가 따로 없어요. '불이법(不二法)'으로 그 둘은 하나의 진실밖에 없습니다. '일불승(一佛乘)' 일승(一乘) 오로지 하나의 부처, '일진법계(一眞法界)' 하나의 진실한 법의 세계밖에 없습니다. 일불승, 일진법계 그것이 사람들이 분별하기 시작하면 좋은 것과 나쁜 것, 흑암녀와 공덕천, 내 인생에 좋은 일 싫은 일이 계속 교차하는 것 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니까 다행히도 이 인간세계는 부처님께서 괴로움을 통해서 인간들을 깨닫게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괴로움만 주면 괴로움에 허덕이느라고 깨달을 새가 없어요. 그러니까 무간지옥같은 괴로움은 안주는 겁니다. 인간계는 어쩌냐 하면 적절하게 좋은 일도 주고 괴로운 일도 줍니다. 인생에서 승승장구 할 때도 주고 무너질 때도 주는 거에요. 건강할 때도 있고 건강하지 못할 때도 있는 겁니다. 잘나갈 때도 있고 못나갈 때도 있는 거에요. 왜 그러냐면 내가 막 승승장구를 하는 것을 경험해서 기쁨을 막 경험해봐야 한번 괴로움이 왔을 때 옛날에 비해서 너무 괴로우니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라는 그 마음이 극대화 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뭐랄까 참 눈물겨운 감사함이죠.

우리를 깨닫게 할려고 그 시나리오를 정말 정상적인 시나리오 행복하던 시나리오도 던져주다가 마음껏 누리게 해놓고 그래 너 실컷 놀아봐라 실컷 즐겨봐라 실컷 승승장구해봐라 하고 싶은거 다 해봐라 네 뜻대로 한번 해보라고 살아가게도 해주다가 어느 날 콱 막히게 해준단 말이에요. 인생이 그냥 확 무너지는 것처럼 해준단 말이죠. 그럴 때 완전하게 무너져내릴 때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면그 무너져 내리는 괴로움 속에서 버티려고 그것을 버리려고 그것을 밀쳐내려고 기를 쓰고 싸움니다.

근데 지금 이순간 여기 이 자리에 그 괴로움이 진리(眞理), 깨달음으로서 왔는데, 부처가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로써 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괴로움을 거부하니까 밀쳐내려고 하니까 밀쳐내지지도 않는데 밀쳐내려고 합니다. 마음속에서 계속 거부하니까 점점 더 그 괴로움은 내 거부하는 마음 때문에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진리가 오고 있는데 내가 자꾸 거부하고 밀쳐내니까 진리가 들어오지 못하는 거에요 흡수되지 못하는 겁니다. 괴로움들이 해소되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괴로움이라는 진리가 찾아왔을 때 문 닫지 않고 그냥 오도록 허용해주면 됩니다. 괴로움이라는 진리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 괴로움이 그냥 오도록 허용해주면 됩니다. 그 괴로움을 경험해주고 괴로움을 온전히 살아주고 괴로움과 함께 존재해주는 것이죠. 그렇게 되었을 때 괴로움이 나를 강타하기 위해서 왔는데 내가 밀쳐내고 내가 싸울 준비가 안되어 있어요. 막 들고 싸울려고 하면 얘가 같이 이만한 힘으로 밀쳐내면 내가 같은 힘으로 밀쳐내야 얘한테 이길 수 있잖아요? 그니까 내가 거부하는 힘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은 더 크게 이 힘만큼 더 큰 힘으로 나를 누릅니다. 왜냐면 내가 괴로움을 밀어내니까 당연히 괴로움도 같은 힘으로 나를 밀쳐낼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내가 괴로움을 밀어내지 않으면 거부하지 않으면 그냥 훅 들어와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괴로움이 올때 이걸 확 허용해줘버리면 당연히 괴롭습니다. 그러면 스님 괴로움이 올 때 내가 확 허용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는거죠? 그래 가지고 괴로움이 왔는데 내가 허용했는데도 한 하루 이틀 지나고나서 안없어졌다고 찾아와서 따집니다. 하루 이틀이 지났는데 괴로움이 왜 안없어지느냐? 그거는 괴로움이 없어지라고 기를 쓰는 거잖아요 그 또한. 나에게 찾아온 괴로움은 그 괴로움이 흡수될 때까지는 그냥 놔둬야 됩니다. 그 괴로움이 지가 있을 때까지는 있도록 허용해줘야되요. 언제까지 괴로움이 내게 있을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근데 내가 거부하면 어떤 괴로움은 그게 일년은 갈수 있어요. 오년 십년갈 아픔이 일년만에 끌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죠.


인생에서 아픈 일들 겪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면 아픈데 그게 한 일 이년쯤 지속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근데 지나고 나면 그때는 평생 아픈게 낫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지나고나면 또 낫는 일도 생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람들은 두번째 화살을 맞아요. 몸에 생긴 병 때문에 아프고 두번째는 나한테 왜 이런 병이 왔느냐 없어져라 하면서 거부하면서 두번째 화살을 맞느라고 더 괴로와 합니다. 병은 일년만 있다 갈껀데 갈라고 왔는데 일년만 있다 갈께 하고 왔는데 내가 거부하니까 이년 삼년 사년 계속 있는겁니다. 

그런데 일년만 있다가 갈라고 찾아왔는데 내가 두팔 벌려 환영을 해서 오히려 받아들여 줍니다. 사랑해줍니다. 병을 그냥 사랑해주고 받아들여주니까 병이 난 일년 동안 있을 계획이었는데 그 병을 내가 그냥 확 받아들여주니까 6개월만에 3개월만에 1달만에 가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그러더라도 한달은 아파야죠. 근데 한달도 못참고 얘가 안간다. 받아들였는데도 안간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그거는 벌써 마음속에서 병을 거부할려는 마음이 있는거잖아요. '아예 아파주겠다' 그걸 선택하라는 거죠. 그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찾아온 병이라는 진리를 온전히 혀용해주는 방법이고, 분별하지 않는 방식이고, 취사간택하지 않는 방식이고, 그것이 바로 '중도의 수행'입니다.  '불이 중도의 수행', '완벽한 중도수행' 입니다.

염불하고 독경하고 다라니 외우고 이것이 수행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그거 하라는 얘기 한적이 없잖아요. 부처님이 내 이름 계속 불러라 그랬습니까? 석가모니불 계속 불러 그랬어요? 그건 우리 사람들이 그냥 한거지 역사속에서 누군가 하기 시작한거지 심지어 초기 불교 경전에 보면 처음에는 주문 하지 말라 그랬어요. 그러다 나중에 그냥 방편으로만 약간 허용해줄께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뭐가 공부냐? 뭘 해야 되느냐? '중도'를 닦아야 됩니다. 부처님은 항상 '중도'를 닦아야 된다는 얘기밖에 안했습니다. 대승경전에서 그런 얘기 나오죠 그 다양한 비유로 나오죠. 이렇게 공덕천과 흑암녀라는 비유로도 나오고. 이런 방식으로 매순간 찾아오는 이 괴로움이라는 진리, 그러니까 사성제 첫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뭐겠습니까? '고성제'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이 괴로움인 성스러운 진리가 찾아왔는데 우리는 괴로움을 버릴 거, 밀쳐낼 거로 생각하지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괴로움을 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스러운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스러운 진리인 괴로움을 단지 버려야만 될 거, 밀쳐내야 될 거, 내가 싸워이겨야 될 거 이렇게만 생각을 해요. 심지어 명상단체에서도 번뇌가 일어난 다음에 번뇌를 없애버려라 그럽니다. 번뇌를 싸워이겨야된다 그래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번뇌 망상은 없애버리려고 해도 없어지지도 않고. 허용해주되 그냥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게 다른 말로 '위빠사나'에요.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판단하지 않는 거. 그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겁니다. 언제나 우리들은 보고 있으니까. 그런데 분별해서 보고 있거든요. 눈으로 보는데 분별해서 보죠, 귀로 듣는데 분별해서 듣고, 듣는 것도 보는 거에요. 들어보고 있잖아요 언제나. 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들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별해서 해석해서 들어보고 있어요. 맛보고, 촉감을 느껴보고, 냄새 맡아보고 생각해보고, 전부 다 보는거에요. 보지 않는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근데 위빠사나에서는 있는 그대로 봐라 이러니까 볼라고 애쓰는데 볼라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보는건 언제나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라고 하는 말은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입니다. 분별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중도수행을 위빠사나가 중도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도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같은 얘기니까. 그래서 이 중도가 바로 마음을 여는 겁니다.

법장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여는 것, 내 삶을 향해 완전히 마음을 여는 것, 내 인생에게 온전히 오케이, 예스하고 대답해주는 것 그게 '개법장진언'입니다. 그게 개법장, 법장을 여는, 진리를 여는 나에게 언제나 와있는 진리를 향해서 마음을 열어주는 마음공부고 수행입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https://youtu.be/3cRXc5Lh30M 녹취 by 자유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