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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영웅신화 그리고 노무현

장백산-1 2010. 8. 28. 13:47

이윤기, 영웅신화 그리고 노무현
번호 195658 글쓴이 초모룽마 조회 2282 등록일 2010-8-27 22:06 누리786 톡톡0


이윤기, 영웅신화 그리고 노무현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10-08-28)


작가이자 당대의 신화학자 이윤기가 타계했다. 가뜩이나 삽질전문 십장들만 판치는 때, 인문학의 불을 밝혀줄 몇 안 되는 사람이 또 사라진 것이다. 난파된 배에는 쥐들만이 들끓나니….

신화학은 인문학의 최고 경지다. 읽고 읽다 보면 궁극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신화다. 왜? 신화를 읽으면 시공간을 넘나들며 인간들이 꿨던 집단적 꿈이 뭔지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것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 된다. (훈데르트바써)”

 

인류가 사회란 걸 만든 이후 모든 사회적 인간은 이 꿈을 꿨다. 그 꿈 이야기가 바로 신화다. 이 땅에서 신화에 관한 한 이윤기 외 달리 없다. 특히 필자는 그를 작가로서보다 번역가 - 흔한 말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 - 로서 더 높게 본다. 번역에 쏟은 고통의 과정에서 그는 신화학의 일가를 이뤘으리라.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동급 최강으로 꼽힌다. 하지만 필자가 이윤기(의 진가)를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은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역서’로 꼽힘)과 켐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대한 번역을 통해서다. 둘 모두 자체적으로 난해하기도 하지만 그 사상적, 역사적, 문헌적 배경이 없으면 온전히 해석해 낼 수 없는 것들이다. 이윤기는 이걸 자신의 문체로 해냈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당연히 신화에 관심 갖지 않을까?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꿈꾸는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신화의 주인공은 신, 영웅 그리고 대중이다. 신(이것 역시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다)은 우리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건너뛰자. 그렇다면 영웅은 누구인가?

 

신화가 집단의 꿈이라면 주인공 중 하나인 영웅은 그 집단적 꿈의 매개체일 뿐이다. 인간사회는 자신들의 꿈을, 대리인이자 메신저인 영웅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며 영웅은 그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기대하는 선물, 즉 진리를 찾으러 모험에 나선다(출발). 모험을 겪으면서 갖은 시련과 유혹, 고통을 견뎌낸다. 소년이 청년전사로 거듭나기 위한 냉혹한 고대의 통과의례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입문). 마녀, 즉 추한 노파와 괴물을 물리치고 마침내 보물을 찾아내 세상으로 복귀한다(귀환).

 

하지만 귀환 단계에서 영웅의 운명은, 그를 행동하게끔 했던 대중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확 달라진다! 그들이 계속 꿈을 꾸면, 영웅은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로 우뚝 서겠지만, 사람들이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고 가져온 선물=진리, 그러나 대중들에겐 부담스럽고 낯선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여) 더 이상 꿈꾸기를 포기하면… 그리하여 영웅이 그것을 혼자 감당하는 상황이 오면, 그는 곧 죽게 된다.

 

(신화학자 캠벨에게는 시대적 요청을 받아 출발-입문-귀환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거친 인물들만이 진짜 영웅이다. 요즘 미디어에 의해 숱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영웅들 - 제시카 린치 일병류의 - 은 다 가짜란 말이다)

 

영웅은 결코 위대한 인물이 아니다. 신화에서 영웅이 행동하게끔 하고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력자(다양한 상징으로 나타나는 데 아름다운 여신 또는 미녀도 그 중의 하나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조력자 가운데 으뜸이 바로 집단지성이다. 집단지성이 더 이상 영웅과 접속하지 않으면… 메신저 또는 아바타일 뿐인 영웅은 곧바로 쓰러진다. 위대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집단지성이다.

 

놀랍게도, 이윤기 자신도 메신저였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윤기 선생님은 가르침이란 것을 거의 남기지 않으셨다. 평생을 겸허한 메신저로 사셨다”라고 추도사에 썼다. 그러고 보니, 번역가의 임무도 무엇을 매개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호도 메신저답게, 거쳐 가는 ‘과인(過人)’이다.

 

예수가 누구를 가르쳤던가? 아니다. 그도 메신저였을 뿐이다. 돈과 권력에 눈먼 예루살렘에 분노한, 순수하고 신실한 유대 사람들이 자신들이 바라던 것(시대정신)을 예수로 하여금 대신하여 말하게 했던 거다. 그런 그가 나중에…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올랐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노무현이 당시 우리가 품었던 꿈을 대표하여 대신한 메신저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역사적 롤에 대해 그가 직접 언급한 말들에서 스스로도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사람들이 그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을 때, 즉 집단지성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가 쓰러졌다는 것도 확실하다. 노무현은 결코 위대하지 않다. 그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위대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데 있는가?

 

이윤기가 노무현에 대해 쓴 글을 검색 끝에 찾았다. 2002.12월 말에 쓴 것 같다. “정치에 관심 없다”던 그도 신화의 전문가답게 영웅의 특성을 가진 인물에는 주목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신화의 세계로 간 이윤기를 그리며 일독해 보시라.

 

 

[시론] 어제의 영웅, 내일의 폭군


나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정치적인 인물에 대한 관심도 적은 편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인물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 가는 양상이 신화적 영웅의 행적과 비슷해질 경우, 상황은 확 달라진다. 이 경우, 나는 쫓아다니면서 관찰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적 영웅 이야기는 ‘영웅 사이클’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패턴을 따른다.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에 고난을 당하고… 어느 날 문득 자기 존재의 본질을 만나게 되고… 구도(求道)의 길을 떠나게 되고… 신고만난(辛苦萬難) 끝에 뜻을 이루고… 자기 인생의 정점에서 슬픈 순교자가 되거나 오만한 폭군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치거나 한다는 것이다.

 

 

1992년 9월, 미국의 대통령 후보 빌 클린턴이 내가 머물고 있던 대학을 방문했을 때 나는 연설 현장에 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여섯 도토리의 하나’로 불리던 무명의 클린턴 후보를 눈여겨보기로 한 것은 나와 연배가 비슷한 정치인이 획득하게 될 명목가치와 실질가치 사이의 차이, 그가 승리하는 순간부터 시작될 일대기의 전설화, 신화화의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중략)…

 

대학이 클린턴 후보를 맞느라고 술렁거리던 그해 가을, 환갑을 앞둔 한 정치학 교수로부터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대학원 시절, 유세장으로 들어가다가 한 신사의 발을 밟았는데 신사가 나보다 더 놀라면서 마구 사과하는 게 아니겠어요? 부스스한 머리 아래로 눈매가 지독하게 매운 전형적인 동부 신사, 나중에 알았는데 그 신사가 바로 그날 유세의 주인공 존 F. 케네디였어요….

 

케네디가 섰던 시계탑 아래의 그 연단, 내일 바로 그 연단에 클린턴이 서지요.” 그 정치학 교수에게, 30여 년 전 자기에게 발을 밟힌 케네디는 이미 하나의 신화적 영웅이 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싸늘한 정치 이론가인데도 불구하고 케네디 평가에 자기 체험을 개입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그를 불공평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영웅 중에는 장차 순교자가 되는 긍정적인 영웅이 있고 장차 폭군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치거나 정점에서 파멸하는 부정적인 영웅이 있다. 조지프 캠벨 같은 신화학자는 ‘어제의 영웅이 오늘 자신을 십자가에 달지 못하면 내일은 폭군이 된다’는 무서운 소식을 전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영웅은 참 힘들겠다.

 

한 영웅이 자기 인생의 정점에 오르면 영웅 자신 아니면 그가 속해 있는 모둠살이 민중은 하나의 고질병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병명은 그리스 말로 ‘휘브리스’, 번역하면 ‘오만’이다. 캠벨은 영웅만 이 병을 앓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민중도 이 병을 앓는 것 같다. 민중이 이 병에 걸리면 영웅은 순교자가 되고 영웅이 이 병에 걸리면 민중은 온갖 무리수가 다 동원되는 폭군의 폭정에 시달리는 것 같다.

 

 

 

 

올 한해, 정치에 관심이 적은 나도 한 정치인에게 휘둘렸다. 그가 하는 바보짓 때문에 골을 내었고 그 바보짓이 지어낸 변증법적 결론에 웃었다. 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나는 표를 살그머니 다른 데로 돌리려고 했다. 그가 벼랑 끝에 몰리지 않았어도 거주지 경기 과천시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주소지까지 차를 몰고 달려가서 투표하기는 했을 것이지만 ‘노 일병 구하기 작전’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영웅의 고질병에 걸리면 나는 저항하겠지만 그가 아낌없이 몸을 내어놓으면 나는 내 몸으로써 그의 몸을 보호할 것이다. ‘영웅’은 제 손으로는 절대로 제 몸을 지키지 못한다.

 

초모룽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