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無比스님의 화엄경 강의(61) 虛空보다 다 큰 마음의 세계

장백산-1 2013. 1. 29. 10:50


    -* 강설 *- 보십시오. 한량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한량이 없는 게 우리들 마음인 것입니다. 빙산일각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 못해서 표현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거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밖에 쓰지 못한다 하는 뜻에서 하는 소리이고 사실에 있어서는 이런 표현이 맞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체는 절대 양으로 잴 것이 아닙니다.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이 여해일구발(如海一구發)이라." 허공이 참으로 크지요. 어느 정도로 큰가 하면, 우주의 모든 별들이 허공에 달려 있습니다. 수많은 별들은 마치 허공에 점 하나 찍어 놓은 것처럼 작습니다.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거대한 태양계도 그보다도 몇 억만 배 더 큰 은하계도 허공에 비하면 점 하나 찍어 놓은 것처럼 허공은 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갖 별을 다 포용하고 있는 거대한 허공은 또 우리 마음에 대하면 역시 점 하나에 불과합니다. 태평양같이 더없이 넓은 바다에 물거품 하나 '뾰롱'하면서 떠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넓은 바다와 같고 허공은 물거품 한 방울과 같은 것이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현상계하고 우리 마음하고는 아예 비교를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라는 것, 아니 태양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과는 도저히 비교할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거대한 마음자리를 무시하고 답답하게 사는 것이 보통 우리들의 살림살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무한한 마음의 세계를 엿볼 수도 있고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참생명의 세계는 그와 같이 거대하다고 짐작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할 때에는 그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큰 대(大)' 자를 쓴다고 합니다. 낙서로 '큰 대(大)' 자를 자꾸 쓴다는 것입니다. 그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보다 낫느냐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일반적인 심리 요법으로 갑갑한 마음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리적인 요법으로 '큰 대(大)'를 쓰는데 가만히 보면 거기에 지극히 불교적인 정신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답답하다,' '속상한다,' '일이 잘 안 풀린다' 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면 결국에는 마음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작아서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비어 있는 공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속이 답답하고 뭔가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로 넓은 것입니다. 광대한 허공도 우리 마음에 비하면 점 하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커지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좀 더 지식이 축적되었으면 싶고, 좀 더 부자가 되었으면 싶고, 사업도 좀 더 번창했으면 싶은 것이 인간의 본질에 맞습니다. 단순히 욕심이라고 할 게 아니고 그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 거대한 내면의 세계를 본질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꾸 발전하려 하고 커지려는 것입니다. 그걸 도외시하고 사는 것은 우리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죽는 시간까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업과 여러 가지 인연들이 얽혀서 아주 왜소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또한 현실입니다. 너르디 너른 마음의 본질과 좁아 터진 현실이 맞지 않으니까 자꾸 마음이 답답해지고 뭔가가 안 풀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대(大)' 자를 자꾸 반복하여 쓴다는 의미는 본래의 큰 마음에다 충동질을 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양을 잴 수 없는 우리들의 큰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종이가 미처 준비되지 않았으면 마룻바닥이건, 허공이건 간에 손으로 자꾸 써 보는 것입니다. 한없이 그렇게 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본래로 크고자 하는 마음과 딱 통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공연히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내가 속을 끓이고 있었구나' 하면서 시원스럽게 좁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無相行 원글보기
메모 :

 

 



    -* 강설 *- 보십시오. 限量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限量이 없는 게 우리들 마음인 것입니다. 빙산일각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 못해서 표현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巨大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밖에 쓰지 못한다 하는 뜻에서 하는 소리이고 사실에 있어서는 이런 표현이 맞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체는 절대 量으로 잴 것이 아닙니다.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여해일구발(如海一구發)이라." 虛空이 참으로 크지요. 어느 정도로 큰가 하면, 宇宙의 모든 별들이 虛空에 달려 있습니다. 수많은 별들은 마치 虛空에 점 하나 찍어 놓은 것처럼 작습니다. 地球는 말할 것도 없고 巨大한 太陽界도 그보다도 몇 億만 배 더 큰 銀河界도 虛空에 비하면 점 하나 찍어 놓은 것처럼 虛空은 巨大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갖 별을 다 包容하고 있는 巨大한 虛空은 또 우리 마음에 對하면
    역시 점 하나에 불과합니다. 태평양같이 더없이 넓은 바다에 물거품 하나 '뾰롱'하면서 떠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넓은 바다와 같고 虛空은 물거품 한 방울과 같은 것이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現狀界하고 우리 마음하고는 아예 비교를할 수가 없습니다. 地球라는 것, 아니 太陽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과는 도저히 비교할 相對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巨大한 마음자리를 無視하고 답답하게 사는 것이 普通 우리들의 살림살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無限한 마음의 世界를 엿볼 수도 있고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참生命의 世界는 그와 같이 巨大하다고 짐작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할 때에는 그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큰 대(大)' 자를 쓴다고 합니다. 낙서로 '큰 대(大)' 자를 자꾸 쓴다는 것입니다. 그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보다 낫느냐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一般的인 心理 療法으로 갑갑한 마음의 치유가 可能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리적인 요법으로 '큰 대(大)'를 쓰는데 가만히 보면 거기에 지극히
    불교적인 精神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답답하다,' '속상한다,' '일이 잘 안 풀린다' 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면 結局에는 마음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작아서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비어 있는 空間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속이 답답하고 뭔가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本來로 넓은 것입니다. 廣大한 虛空도 우리 마음에 比하면 점 하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커지고자 하는 것이 人間의 本能입니다. 좀 더 知識이 蓄積되었으면 싶고, 좀 더 富者가 되었으면 싶고, 事業도 좀 더 번창했으면 싶은 것이 人間의 本質에 맞습니다. 단순히 慾心이라고 할 게 아니고 그게 人間의 本能입니다. 그런 巨大한 內面의 世界를 本質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꾸 發展하려 하고 커지려는 것입니다. 그걸 도외시하고 사는 것은 우리 本質을 잘못 理解한 것입니다. 죽는 時間까지 發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經驗과 業과 여러 가지 因緣들이 얽혀서 아주 倭小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또한 現實입니다. 너르디 너른 마음의 本質과 좁아 터진 現實이 맞지 않으니까 자꾸 마음이 답답해지고 뭔가가 안 풀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대(大)' 자를 자꾸 반복하여 쓴다는 의미는 本來의 큰 마음에다 충동질을 하는 것입니다. 本質的으로 量을 잴 수 없는 우리들의 큰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종이가 미처 준비되지 않았으면 마룻바닥이건, 허공이건 간에 손으로 자꾸 써 보는 것입니다. 한없이 그렇게 하다가 보면, 어느 瞬間 本來로 크고자 하는 마음과 딱 通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공연히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내가 속을 끓이고 있었구나' 하면서 시원스럽게 좁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