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創造的 人生을 사는 法

장백산-1 2013. 2. 14. 12:59

 

 

 

창조적 인생을 사는 법/무진장스님

 

 

 

        

                          

        創造的 人生을 사는法/광덕 스님 추모 법어

 

 

            산승은 광덕 스님과 한 40여 년 이상의 인연을 가지면서 우리 스님(동산 스님)의

         가장 총애하던 제자로서 광덕 스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광덕 스님과는 사형사제의 관계인데, 그 동안 많은 스님들로부터 광덕 큰스님의 원력과

         수행의 이력은 많이들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 .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산승은 굳이 스님의 개인적인 얘기보다는 순수하게 그냥

         설법에 임할까 합니다.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한다고 하고 있는데 20세기 문명사회는 貪慾으로 일관된

세기였습니다. 物慾과 出世慾 등으로 얼룩진 세기였습니다.

그러면 21세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요즘 언론매체에서 유명인사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21세기는 情報化 社會라고 합니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 정보에 어두운 사람은 살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競爭社會에 뛰어들어 生命을 걸고 情報化 時代에 對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이게 다 人間들의 목을 조르는 얘깁니다.

 

21세기도 그렇게 살아가야겠는가 하는 것이죠. 21세기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精神世界에 關心을 갖지 않으면 21세기도 亡가질 것입니다.

21세기는 精神世界와 物質世界의 均衡을 맞추는 時代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般若心經으로 말하면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世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유럽이나 미주지역의 心理學者들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연구를 굉장히들

하고 있습니다.

人間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精神世界는 어떻게 開拓하며 物質의 世界는

어떻게 均衡을 잡아갈 것인가에 對해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硏究는 대단히 重要합니다.

지금 불교인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앵무새처럼 외우고만 있지

그것이 무엇을 意味하는지는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계가 더 모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時代를 한번 生覺해보세요. 부처님의 出家는 이런 데서 이루어졌습니다.

왜 階級이라는 게 存在하는가, 왜 人間은 生老病死에 시달려야 하는가,

생로병사가 없는 自由로운 세계는 없는가, 所謂 解脫의 世界는 없는가,

왜 人間들은 平和롭게 살기를 希求하면서도 戰爭을 하는 것일까에 對한

깊은 生覺에서 出家를 決行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사시던 시대를 戰國時代라 합니다.

부처님은 어린 시절부터 戰爭을 보고 자라면서 戰爭 없는 平和로운 世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生老病死에 대한 自由, 계급에 대한 平等, 전쟁에 대한 平和를 갈망하셨지요. 인간에게는 고(苦)만 있는 것이 아니고 幸福도 存在하는데

왜 幸福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일까, 왜 지속되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悔疑를 가지면서 부처님은 29세에 출가를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解決하는 方法은 出家밖에 없다는 生覺을 하신 것이죠.

 

부처님의 出家 動機를 보면 대단히 複雜해요.

부처님뿐만 아니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도 29세의 靑年期를 한번 生覺해보세요.

오늘 이 時代를 살고 있는 靑年의 苦悶은 單純합니다.

經濟的인 問題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으로 錯覺하며 살아요.

지금 社會를 보세요. 얼마나 險惡한가.

그것이 모두 經濟的 欲望 하나를 成就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법당에 나와 있을 땐 平和로워 보여도

家庭으로 돌아갈 땐 와글와글 들끓고 있는 거예요.

옛말에 “사양하면 남아 돌아갈 것이요, 慾心을 챙기면 不足할 것이다” 하는 말이 있어요.

옛날엔 옷 한 벌을 온 가족이 입어도 남아 돌아갔어요.

지금은 한 사람이 옷 100벌을 입어도 不足해요.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데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인가 生覺해볼 必要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절에 가서 열 가지 所願을 빌면 한 가지 所願은 반드시 들어준다 生覺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요? 佛敎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自身이 修行하지 않고 되는 일이 뭐가 있어요?

天堂과 地獄이 이 마음에서 流出된다는 것을 確認하신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바깥 境界를 向해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自己의 心性 가운데로 돌아가서 探究해야 합니다.

第一 먼저 自己를 보세요. 그런 眼目으로 自己의 가정과 조국을 보고,

국제사회를 보세요. 이러한 民族이 世界化가 可能한 겁니다.

 

지금 우리 國民은 世界化가 不可能합니다. 世界化를 하자면 먼저 自己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佛敎的인 人間觀이란 어떤 것이냐.

佛敎的인 關心은 人間的인 自己探究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떠하냐, 부처님 앞에 禮拜 供養하면

그분이 이러한 福을 줄 것이다 하는 錯覺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佛性을 지니고 있으되 부처님이 아닙니다. 佛性을 지니고 있는

衆生입니다. 부처님이 될 수 있는 所質을 가지고 있으나 부처님은 아니에요.

佛性의 世界를 밖으로 露出시켜서 行動으로 옮긴 분을 ‘부처님’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 세 끼 먹고 職場生活 定常的으로 하고 社會的인 日常生活을 理致에 맞게

하고 그런 것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읽으면서 부처님과 똑같이 되려고 努力하는 것이 대단히 重要한 겁니다.

 

부처님의 人格은 構體的으로 부처님 말씀속에 있는데

부처님말씀을 읽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불교를 믿을수 있나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불교를 믿으려면 부처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耽讀하고 부처님의 人格을 닮기 위해서 努力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熱心히 살아서, 經濟的으로 가난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면서

누구에겐가 신세를 지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慾心이 많은 사람입니다.

自己 自身이 努力하고 힘써서 熱心히 사는 사람은

慾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理解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적인 關心은 佛性的인 自己 再認識에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存在인가에 對해서 再認識할 必要가 있습니다.

잘못된 性格을 하나하나 矯正해 가면서 부처님과 닮아가야 됩니다.

이것은 生命力을 俱現하는 겁니다. 無限能力을 開發하는 겁니다. 우리 人間은

限없는 能力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無限能力을 開發하는 겁니다.

이 말은 광덕 스님께서 대단히 좋아하시던 말입니다.

“生命을 俱現하는 것이다. 새롭게 人生을 創造的으로 사는 것이다.”

그분이 쓰신 글 치고 이런 말 안 나오는 글이 없습니다. 내가 40여 년간 그분과 함께

살았는데 불교를 정도(正道)로 이끌고자 무척 애쓰셨으되 일반 신도는 거기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한국불교신도들은 偶然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있노라면 언젠가 人生이 확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錯覺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精神世界를 구현하지 않고 그런 일은 없는 겁니다.

그러한 점에서 불교는 어떤 主義와 思想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는다, 그런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주의·사상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불교는 中道主義예요.

中道란 무엇이냐 하면 딱 들어맞았다는 뜻이에요. 무엇에 딱 들어 맞았냐 하면

道에 딱 들어맞았다는 말입니다. 中道란 眞理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불교는 대단히 非判主義的인 宗敎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般若心經에 보면 무(無)字가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저 앞산 金鑛에서 금덩어리를 캐기 위해 흙 한 삽, 한 삽 수없이 떠서 버립니다.

금덩어리가 아니라 이거지요.

금덩이가 아닌 흙을 계속 파들어가야 結局은 진짜 금덩이를 캐는 겁니다.

그럴 때 ‘適中하다. 딱 들어맞았다’는 것이고 目的을 達成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禮拜 供養하는 것도 念佛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衆生心이 가지고 있는 그것은 부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이 108참회할 때 眞實되게 절하는 것은 세 번도 될까 말까 할 겁니다.

參禪도 마찬가지예요. 참선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깨치는 것은 아니에요.

계속되는 것은 다 뭐냐, 이것도 아닌 것이요, 저것도 아닌 것이에요.

아니다 하는 것으로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불교는 비판주의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中道에 딱 들어맞는다, 當然한 것을 當然하다 하는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서암 선사가 무문관 제12칙에서 보면 ‘주인공아’

이런 말을 합니다. 自己 自身을 부르는 거예요. ‘예’ 自己 自身이 對答합니다.

‘어떤 것에도 속지 말지니라.’

이게 무엇인가? 絶對 主體道를 向해서 自己 自身을 불러일으키는 生活이에요.

불교적인 修行이란 眞實된 自己와의 싸움입니다.

善知識은 法을 물었으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고 答辯하는 것이지

 ‘불교란 이런 것이다’하고 답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조주 스님을 보세요.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世上에 存在하는 生命은 다 佛性이 있느니라’ 그러니까 어떤 학인이 묻기를 그러면

‘저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무(無)다’,

거기에서 ‘없다’라는 話頭가 나왔다고 하지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이것은 그 學人이 執着하고 있는 유(有)를 他波하는 것이에요.

 
학인이 묻기를 ‘저 뜰 앞의 잣나무에 佛性이 있습니까? ‘有(있느니라)’라고 對答하셨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가 佛性이 있으면 성불할텐데 언제 합니까?’ 

‘虛空이 땅에 떨어질 때 성불하느니라’ 하니까 그 학인이 虛空에 生覺을 붙여 말하되,

‘스님이시여, 허공이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이 학인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조주 스님 왈, ‘뜰 앞의 잣나무가 성불하는 날 허공이 떨어지느니라.’

이것은 答辯이 아니에요.

그 학인이 有와 無에 치우치지 않도록 돕는 데 善知識의 뜻이 있는 것이지,

이런 것이니라 저런 것이니라, 하는 게 아닙니다.

조주 스님은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한다."

진흙불, 목불, 금불은 부처가 아니다.

참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心性 가운데 있는 겁니다.

六祖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바탕에 그릇함이 없는 걸 戒律이라

하느니라. 우리 마음 속에 어리석음을 없애는 걸 智慧라 하느니라.

그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걸 이라 하고 이것이 더함도 덜함도 없는 것이 金鋼心이다."

 

벽암록에 ‘줄탁동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을 때 21일이 지나면 알 속에서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려고 안달을

합니다 이렇게 안달을 할 때 어미닭이 껍질을 탁 쪼아주면 병아리가 쉽게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알고 싶어 안달을 할 때 법사의 한 마디가 生命力이 있는 것이지

아무 生覺없는 죽은 송장 같은 사람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한 마디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알고 싶은가요? 무엇에 안달을 하고 있나요?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은 나의 人生을 어떻게 創造的으로 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부처님 말씀이 必要한가를 生覺해봐야 합니다.

부처님의 思想을 通해서 여러분 各者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存在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 것은 바보입니다. 불교를 通해서

나의 人生을 어떻게 創造的으로 살 것인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充分히 여러분에게 意味 있는 말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思想을 通해서 우리 各者가 내 人生을 어떻게 創造的으로 살아야겠는가를

提起하지 못하면 불교 믿으나 마나에요.

 

그리고 世上의 일을 너무 하찮게 보는 데에 宗敎人의 허물이 있어요.

나는 그런 意味에서 우리 불교인 중에서 偉大한 政治家, 思想家, 經濟人, 聖者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광덕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무진장스님/전 조계종 포교원장-

-무진장-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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