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북미 인디언 이야기 - 18 / 관계 그 동시성의 세계

장백산-1 2013. 7. 8. 16:54

 

 

 

 

 

[關係, 그 同時性의 세계]-  서정록 - 검은호수

 

 

북미원주민 이야기 - 18

關係, 그 同時性의 世界

北美 인디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靈魂의 움직임이 밖으로 드러난 것을 바람, 흐름, 결, 떨림이라 生覺했지요.

우리의 祖上들도 같습니다. 그래서 新羅 末 崔致遠 선생은 "이 땅에 아름다운 가 있으니 風流라 한다.

포함삼교(包含三敎)하고 접화군생(接化群生)하니..."라고 하셨지요.

이런 風流的 思考는 高句麗 壁畵와 이 땅의 古代 遺物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風流的 思考는 關係的 思考를 바탕으로 합니다.

西區式 敎育을 받은 우리는 主觀的이고 自我 中心的인 思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主張을 내세우고, 남을 配慮하기보다는 나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風流의 文化, 卽 關係의 文化, 生命의 文化가 많이 남아 있는 傳統 世界나 第3世界에서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相對方을 높입니다. 그리고 나를 낮춥니다.

왜냐 하면, 모든 存在는 저 나름의 存在 理由가 있고, 各各에게 주어진 任務와 役割이 있기 때문에,

내가 所重한 存在이듯이 相對 또한 나 못지않게 貴重한 存在이기에...

이 世上은 그렇게 自身의 任務와 役割을 가진 수많은 存在들의 相互 關係와 相互 依存에 의해서 維持됩니다.

그 하나하나의 存在가 主人이며, 小宇宙이며, 神的 存在인 것입니다.


北美 인디언들은 이러한 思考에 대해 '圓(circle)'의 象徵을 가지고 말합니다. 圓 위에서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또, 始作과 끝이 따로 없습니다. 各者가 서 있는 자리가 모두 主人입니다. 主人이되, 過程에 있습니다.

모두 서로 連結되어 있어 有機的으로 움직입니다.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렇게 全切에 變化가 옵니다. 그래서 主人이되, 過程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過程이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만나고 섞이고 흩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北美 인디언들은 物質 역시 靈魂이 있다고 生覺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自己가 수고해 거둔 食糧이라도 偉大한 神靈이 家族과 이웃과 함께 나누어 쓰라고 주신 '膳物'이라고 生覺합니다. 當然히 나눔의 對相으로 生覺합니다. 所有의 對相이 될 수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膳物에는 靈魂이 깃들어 있고, 靈魂은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存在들과 關係를 맺고 疎通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食糧이나 財物을 기꺼이 이웃과 나누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社會에서는 物質이 돌고 돕니다. 西區 社會에서 선물이 종종 'give and take(주고받기)'의 對相이 되어, 一種의 去來 關係를 形成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직 '기꺼이 나누어 줄(give away)'뿐,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聖 프랜시스가 말한 것처럼 나누어 줌 속에 이미 '받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누어 주는 사람은 그것으로 이미 幸福합니다. 더 바랄 게 없는 거지요. 더 바란다면 그것은 기꺼이 줌이 아니라 去來를 위한 줌일 뿐입니다. 그저 좋아서, 그저 感謝해서 줄 뿐입니다. 그러면 받은 사람은 나눌 膳物이나 財物이 생겼을 때 必要한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렇게 膳物은 돌고 돕니다.


그렇게 北美 인디언 社會에서는 모든 게 圓 위에 있습니다.

사람도, 動植物도, 해도, 달도, 財物도, 모두 圓 위에 있습니다. 산과 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空氣 또한 같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에 다른 存在의 숨결과 섞여 돌고 돕니다.

그렇게 圓은 계속 擴張해 갑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의 靈魂 또한 成長해 갑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生命의 圓', '圓 안의 '입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圓 속에서 '平等하고 對等한'

關係를 맺습니다. 主人으로서, 나그네로서...

우리의 마음靈魂關係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하나의 圓으로 循環합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과 靈魂 또한 病듭니다.

靈魂이 病들면 몸이 성할 수 없고, 다른 존재들과의 關係 또한 기울거나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성할 수 없고, 다른 存在들과의 關係 또한 기울거나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은 언제나 均衡과 調和의 法則을 그 안에 含縮하고 있습니다.


이 圓은 家庭에서는 家族을 보살피는 어머니를 中心으로 擴大됩니다. 어머니는 살림의 中心이기도 하지만

 世代와 世代를 잇는 중심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 世代를 이을 아이를 낳기 때문이지요.

이런 緣由로 인디언들은 어머니의 母性을 모든 價値의 中心에 놓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大地의 어머니로 連結됩니다. 大地의 어머니야말로 이 世上의 모든 存在를 실어 기르는 거룩한 存在이기 때문이지요. 인디언들이 말하는 '自然의 '은 바로 이 어머니 大地의 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디언들이 말하는 圓은 수많은 次元을 넘나들며 均衡과 調和를, 平等과 相生을, 主人인 同時에 텅~ 빈 자리를 가르치는 象徵

意味를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深遠한 意味를 갖는 圓의 核心은 언제나 關係입니다. 그리고 그 關係 속에서 나 혼자 主人 되는 世上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主人되는 世上, 그래서 모두가 더불어 幸福해지는 世上을 꿈꾸는 것이 바로 인디언들의 世上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動物, 植物, 곤충, 돌멩이, 심지어 먼지, 티끌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圓은 尊重을 가르칩니다.

 

 

라코타족의 추장이며 말하는 자였던 '고귀한 붉은 얼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圓은 신성한 힘을 갖고 있다.
원을 그리고 앉을 때, 우리 모두는 平等하다.
원을 그리고 앉으면,
누구도 당신 앞에 있지 않고 누구도 당신 뒤에 있지 않다.
누구도 당신 위나 아래에 있지 않다.
원을 그리고 앉아 기도하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다.

生命의 고리 역시 하나의 이다.
이 둥근 고리 속에는 모든 種族, 모든 나무, 모든 植物을 위한 各各의 자리가 있다.
이 地球를 다시 健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生命의 그 完全性을 尊重해야만 한다.

尊重한다는 것은 防害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對決하지 않는 것이다.
비난하지 않는 것이고, 놀리지 않는 것이다.
特히 어른들을 尊敬한다는 것은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이다.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훔치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지 않는 것이다.
尊重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위에 君臨하거나 命令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화가 나서 소리치거나 나쁜 言語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自己 自身을 다스리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商品이 아니다. 存在 方式이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다.
그것은 모든 삶을 위한 것이다.

그대가 한때 自由로웠음을 記憶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그대가 한때 自由로웠다는 事實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그것이 世上에서 가장 슬픈 일이다.


이 關係의 文化와 관련해 우리가 注目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家族이나 親舊의 生日을 記憶하고 記念하고 祝賀해 줍니다.

그 生日이란 그저 달력에 있는 몇 月 몇 日일 뿐입니다. 오직 숫자적인 意味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 역시 太陰力을 사용하므로 날짜를 기억하자면 얼마든지 記憶할 수 있으련만

그들은 몇 月 몇 日 式으로 生日을 記憶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옥수수꽃이 필 무렵 태어났다든지,

첫눈이 오던 날 태어났다든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태어났다든지 하는 式으로 말합니다.

또는 딸기가 익는 날 태어났다든지, 눈이 녹는 날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戰爭터에 나가 죽은 아들의 生日을 묻는 白人에게 對答하는 한 老人처럼...

음, 그것이 正確히 몇 月 몇 日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 날을 記憶할 수 있어.
그것은 그 해 늦은 봄,
달콤한 옥수수가 막 한 뼘쯤
땅 위로 올라왔을 때야.
그 애는 그 날 태어났어.

그러므로 그들은 生日을 記念하지 않습니다. 그저 自己가 태어날 무렵 自然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디언들에게 生日이 우리의 境遇와는 전혀 다른 意味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自然 現狀의 變化를 通해서 그 아이의 삶에 어떤 조짐이 있을지, 또는 어떤 祝福이 있을지를 가늠하고, 自身을 되돌아보는 神性한 象徵으로 삼는 것입니다. 왜? 이 世上의 모든 것은 서로 '하나'로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기에.......

( 此有故彼有 彼有故此有  此生故彼生 彼生故此生 

  此無故彼無 彼無故此無  此滅故彼滅 彼滅故此滅 )

 

自然히 새해 첫날을 말하는 方式도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陽曆이나 陰歷 1월1일을 설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수적으로 새로 始作하는 意味만을 가질 뿐입니다. 東洋의 歷法은 조금 달라서 동짓달에 벌써 천둥번개가 땅 밑에서 꾸르릉거린다고 말하지만, 亦是 天文上의 變化를 始作의 基点으로 삼는 점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아니 그 땅의 古代 祖上들은 그렇게 새해를 定하지 않았습니다.


北方의 民族들은 南쪽으로 날아갔던 기러기가 돌아오는 날을 새해의 始作으로 삼았으며, 南쪽의 馬韓, 辰韓, 弁韓의 삼한(三韓)은 江南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三月 삼짇날을 새해 첫날로 삼았습니다. 새해라면 무언가 그에 合當한 自然의 變化와 조짐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北美 인디언들 역시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기 始作하는 때를 새해의 始作으로 여기거나, 철새들의 移動, 또는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새해의 始作으로 삼곤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새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한 生이 始作되는, 또는 한 生命의 誕生과 같은 것이고 보면,

그에 相應하는 自然의 變化가 반드시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 自然의 變化를 通해서

삶의 意味를 찾고, 自身들의 內面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關係란 正確히 말하면 '同時性'입니다. 안과 밖이 照應하는 世界, 나와 宇宙가 調律하는 世界지요.
世上엔 獨不將軍式으로, 저 혼자 잘나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協力하고 照應하기 때문에

이 世上이 調和를 이루고, 均衡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同時性關係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依해서,

마음의 疎通에 依해서, 뜻의 一致를 通해서 옵니다.

 

物質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이런 同時性의 關係란 아마도 遇然의 一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靈的인 길을 걷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런 同時性이야말로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모습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靈的인 길을 걷는 사람들은 初期의 어느 段階에서 이 同時性의 現狀을 體驗하게 됩니다.

왠지 雨傘을 들고 나가고 싶어서 들고 나갔더니 정말로 뜻하지 않게 비가 왔다든지, 옛 親舊가 보고 싶다는 生覺이 들었는데 그 親舊로부터 電話나 便紙가 왔다든지, 또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집안의 蘭草에 꽃이 피거나,

가뭄이 들어 祈禱하는데 곧바로 비가 내린다든지 등등의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同時性에 대해 어떤 이들이 텔레파시를 言及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靈的인 視角에서 보면 同時性 이것은 '또다른' 圓의 形態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연못에 이는 물결의 波紋이 연못 가장자리에 同時的으로  傳해지듯이,

밤 하늘의 별빛이 온 世上에 同時的으로 고루 닿듯이...

그러므로 이 同時性눈에 보이지 않는 關係의 關係를 찾아가는 通路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가야 할 길의 指標기도 하고, 里程標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同時性은 '길(道)'과 같습니다. 길은 方向과 指向点을 갖고 있습니다.

또다른 길과 만나기도 하고 여러 개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모래톱과 같은 흔적을 삶에 남깁니다.

靈的 敎師들이 말하는 re-membering은 바로 그 길이 남긴 흔적들의 意味를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포니族의 靈的 敎師 데이비스의 어머니가 어린 데이비스에게 말하던 것처럼...

人生이란 길과 같은 거란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걸아가야 해.

만일 우리가 그만두면 그것은 길 위에서 걷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같단다.

밤이 지나면 우리는 일어나 그 길을 다시 걸아야 하지. 그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앞에 나타나는 조그만 종이 조각들과 같은 經驗들을 發見하게 된단다.

그러면 우리는 그 종이 조각들을 집어서 주머니에 넣어야 해.

우리가 만나는 그 하나하나의 종이 조각들을 그렇게 주머니에 넣어 두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充分한 종이 조각들을 갖게 된단다.

그러면 그것을 한데 모아 그 조각들이 말하는 것을 읽는 거야.

누구나 충분한 종이 조각들을 가질 수 있단다.

그 안에 있는 內容을 읽은 다음, 그것을 가슴에 가져가는 거야.

그러고는 그 종이 조각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길을 계속 가는 거란다.

 

왜냐하면, 더 집어야 할 종이 조각들의 많이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 그들을 꺼내서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좀더 많을 것을 배우게 된단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이렇게 종이 조각들을 모은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더욱 많은 것을 읽게 되겠지.

우리가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 많은 人生의 意味를 알게 된단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智慧로워지는 거란다.

설령 智慧로워지지 않는다 해도 最少限  過去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거든.

이것이 바로 關係 속에서 이루어지는 同時性의 世界입니다.
이러한 同時性은 사람들의 이름 속에서 發見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들 祝福과 함께 그 아이의 運命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이러한 現狀은 全 世界的으로 똑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無味乾燥하기 짝이 없습니다.

音聲學的으로 對相을 가리키는 指示의 役割은 하지만 靈的인 意味는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개' 하는 이름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느낌도 받지 못합니다.

물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그 때 비로소 어떤 感性이 오겠지요. 그러나 그를 모른다면?

 

-예를 들어 봅시다. '이청강'이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의 이름은 事物을 指稱하는 機能은 지니지만,

그 이름이 주는 靈的 느낌은 없습니다. 이것을 漢字로 옮겨 적으면 조금 낫습니다. 李靑江. 漢字를 아는 이들은

 금방 靑江이란 이름이 '푸른 강'을 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자를 모르는 世代에게 청강이란 이름은

어떤 느낌도 주지 못합니다. 이름은 있되, 그 이름이 갖고 있어야 할 靈的인 內容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름을 지을 때는 거기에 좋은 뜻과 祈願을 담아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짓는 方式을 한번 生覺해 보십시오.

出世名譽를 얻고, 財物을 얻는 것들을 基準으로 좋다는 이름을 짓습니다.

거기에 自然의 靈的인 要素가 들어갈 자리는 매우 적습니다.

게다가 듣는 사람의 귀에는 그마저도 傳達되지 않습니다.

그저 이청강이란 소리만이 귓전을 때릴 뿐입니다.


그러나 自然의 소리를 生覺해 보십시오.

바람 소리 하나, 물 흐르는 소리 하나에도 生命이 있고,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청강이라는 이름 속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祈禱가 없습니다. 靈的인 內容이 없습니다.

그에 견주어 인디언들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늑대와 함께 춤을',  '붉은 구름',  '한밤중의 노래',  '달과 함께 걷다',  '노래하는 물',

'바람을 타고 달리는 여인',  '얼굴에 내리는 비',  '행복하게 춤을 추는',  '서 있는 옥수수', '두 발로 선 곰' 등등.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新鮮하고 靈魂이 反應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대개 神命 探究를 通해서 받은 靈的인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靈的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때 그들의 이름은 비로소 象徵的 意味를 갖습니다.

내가 過程에 있는 存在임을, 그리고 모든 存在는 서로 連結되어 있음을 想起시켜 줍니다.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存在로 들어가는 門과 같습니다.

마치 인디언들이 그들의 服裝에 裝飾한 象徵 紋樣이나 머리에 꽂은 독수리 깃털을 通해서 神을 보는 것처럼.

따라서 그들의 이름은 一種의 祈禱와 같습니다. 만트라(mantra, 眞言)와 같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靈魂이 열리는.... 그렇게 그들은 이름을 通해서 靈的인 內密한 存在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通해서 그들은 自身이 가야 할 길을 압니다. 이렇게 그들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그를 어떤 方向과 性格과 豫知를 던져 줍니다. 그리고 豫知의 共有는

自然스럽게 그를 어떤 方向으로 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바로 여기에 關係에 內在해 있는 同時性의 秘密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漢字式 이릉은 變化가 必要합니다.

이름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靈的 感性이 發動하는 純粹한 우리말로 말이지요.

왜 이런 시(詩)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前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릉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허나 靈的 感性이 없으면 이름은 결코 꽃이 되지 않습니다.

關係란 그래서 重要한 것입니다. 同時性이 內在하지 않는 關係는 空虛합니다.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마치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그런 空虛한 關係는 우리를 成長으로 引導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大地에 발을 디디고 있어도 어머니 大地의 存在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처럼...

關係란 이처럼 豊富한 含縮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關係가 주는 아름다움으로 해서 우리는 均衡과 調和 속에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그러고 보면 인디언들의 象徵아주 큽니다. 우리를 내가 아닌 共同體로, 世上으로, 宇宙로 나아가게 합니다.

全切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서로 빛을 反射하는 거울처럼 同時性이 寶石처럼 반짝입니다.

서정록 /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이론만이 아닌 實踐으로 함께 살기를 모색하던 중,

자연과 동화된 참된 삶을 살고 있는 북미 원주민 문화에 심취하게 되어, 그 사상과 문화 알리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백제금동대향로』,『지금은 자연과 대화할 때』가 있습니다.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