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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인디언 이야기 - 17 / 기억의 영적인 의미

장백산-1 2013. 7. 8. 16:50

 

 

 

 

            記憶의 靈的인 意味  -  서정록

 

 

 

 

 

 

                         북미 원주민 이야기 - 17

                                 검은호수 서정록

北美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世上에 와서 사는 理由는 靈的으로 成長하기 擴張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우리의 關係를 擴張하고, 모든 存在와 하나 되기 위한 것이라고...
이 말은 우리의 삶이 一會的인 덧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먼 過去로부터 現在는 물론 먼 未來까지 이어져 있는 것임을 暗示해 줍니다. 아마도 靈性, 또는 靈魂에 對해서 말하는 거의 모든 文化圈에서 이와 비슷한 生覺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靈性, 또는 靈魂에 對해서 말할 때는 現在의 삶 못지 않게 過去의 삶 또한 重要한 意味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靈的인 길을 조금씩 工夫하면서 한 가지 興味로운 것은 인디언 靈的 스승들이

삶의 旅程을 가리켜 'remembering'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remembering은  正確히 're-membering'을 뜻합니다. 여기서

're-'는 '다시'란 뜻이고 'membering'은 그 自體로 '記憶하기'의 뜻도 있지만 '構成員이 되기'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remembering이란 말 속에는 잃어버린 記憶의 破片들을 다시 살려내고 再構成하여 靈的으로 온전한 存在가

되어가는 過程을 가리키는 意味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問題는 이 re-membering의 過程이 우리의 日常的인 知識과 認知 過程만으로는 到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聰明하고, 記憶力이 뛰어나도 갓난아이 적 일들을 記憶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소 差異는

있지만, 대개 걸음마를 떼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5,6살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어린 時節의 일들이 記憶나기 始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記憶의 側面에서만 보면 우리는 이 世上에 와서 산 날들조차 제대로 記憶하지 못하는 不完全한 存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靈的 敎師들은 여기서 다시 '전생(前生)'에 對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 世上에 올 때는 分明 어딘가로부터 이 곳으로 온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 '어딘가' 에서의 삶이 바로 前生에 該當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意識의 世界에서는 그 '어딘가'를 記憶하지 못합니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 '다가라'라고 하는 部族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女人이 姙娠을 하면 마을의 靈的 敎師를

모셔 옵니다. 그리고 姙産婦 앞에 마주 앉아서 뱃속에 든 아이와 對話를 합니다.

너는 누구니? 어디서 왔니? 왜 이 곳에 오려고 하니? 이 곳에 와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니?

그러면 뱃속에 든 아이는 靈的 敎師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自身은 아무개고, 이러이러해서 이 世上에 오고자 한다고... 그 後 아이는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祖上님이 다시 오셨다고 精誠껏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들의 靈은 맑은 湖水처럼 透明하지요. 그러나 커 가면서 아이들의 靈이 차츰 흐려지기 始作합니다. 그래서 다가라 部族에서는 아이들이 思春期에 이르면 成年式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靈的 敎師에게 했던 말을 다시 記憶하도록 일련의 儀禮를 行합니다. 그런 過程을 거쳐서 아이들은 自身들이 이 世上에 온 理由와 이 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다시금 分明히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靈的 敎師들은 現實 世界의 저편에 눈에 보이지 않는 世界, 귀에 들리지 않는 '靈的인 世界'가 存在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靈的인 世界에서의 記憶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의 靈魂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意識하지 못해도 靈魂들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두 次元의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世界와 關係된 意識의 次元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靈魂의 次元입니다.

 

그런데 現實의 世界는 個別的 存在들로 構成된 世界입니다.

그에 견주어 靈的인 世界는 모든 存在들이 하나連結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存在들을 貫通하여 흐르는 生命의 에너지처럼.

따라서 靈的인 世界는 이 世上의 수많은 存在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떠받치고 있는

우리의 存在 根據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存在를 貫通해서 흐르는 生命力, 宇宙 生命과 같은 것이 없다면,

個個의 生命들이 存在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兩者의 存在 方式과 認知 方式은 다릅니다.

 

前者는 우리의 몸의 感覺과 理性的 思考를 通해서 認知를 하지만,

後者는 靈魂을 通해서 認知를 합니다. 인디언들은 이것을 종종 '느낌' 또는 '直觀'에 依한 認知 方式이라고 말하지요.

이 때 느낌은 個別 感覺에 依한 知覺이 아니라 感覺 全切와 마음이 同時에 作用해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認知 方式은 古代人들이 숨결이나 피를 通해 靈性을 理解했던 것과 아주 類似한 方式이지요.

 

그런데 問題는 現代人들이 後者의 方式에 매우 서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 靈的 敎師들은 靈性에 關心이 많은 이들에게 沈默과 冥想을 권합니다.

沈默과 冥想은 느낌과 直觀의 힘을 길러 주고, 窮極的으로 두 次元의 世界를 하나連結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때 비로소 靈的인 成長이 可能하다고 말합니다.

인디언들이 重要視하는 '꿈'과  '神命'도 그 延長線上에서 비로소 理解가 可能합니다.

허나 靈的인 成長은 他人의 强要에 依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지요.

오직 自己 自身이 靈的으로 成長하고 發展하기를 選擇함으로써만 始作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remembering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靈的인 成長이라고 하면 全的으로 個人의 問題라고 生覺하는 傾向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自身의 몸과 마음과 靈魂을 淨化하고, 한 個人보다는 家族과 이웃과 社會를 위해 獻身하느냐에 달린 問題라고 말이지요.그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 하면 個人이 없는 集團이란 없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個人의 삶이 얼마나 成熟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全的으로 神이 그에게 주신 所重한 膳物 -그의 才能과 家族 關係와 環境, 社會的 條件 등 - 을 어떻게 使用할 것인가 하는 그의 意志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靈的인 成長을 全的으로 個人의 問題로 보는 것에 對해 인디언들은 見解가 좀 다릅니다.

그들이 보기에 靈的인 成長은 個人 次元의 問題이기도 하지만 同時에 集團의 問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아이들이 靈的 成長을 위한 길을 가기 前에 먼저 祖上들이 남겨 준 神話나 傳說 등을 들려 줌으로써 記憶이 갖고 있는 意味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하자면 祖上들로부터 내려온 神話나 傳說 등은 單純한 이야기가 아니라 remembering을 하는 가장 重要한

智慧의 蓄積物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겨울철 움막 안에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어르신들이 아이들과

마주 앉아 들려 주는 이야기 마당은 매우 진지한 雰圍氣 속에서 進行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事實을 '세네카族'의 靈的 指導者들이 들려 주는 '네 가지 膳物' 이야기를 通해서 알 수 있습니다.

神이 太初에 이 世上을 創造하고 수많은 存在들을 만드셨단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있는 대로 듬뿍 주었지.

그것이 神의 첫번째 膳物이야. 그런데 이 世上의 存在들이 받는 것만 알고 주는 것은 모르는 거야. 그래서

神이 안 되겠다 싶어 各各의 存在들을 둘로 나누어 南子와 女子가 되게 한 거야. 암컷과 수컷으로 말이지.

그렇게 해서 各者가 주는 者이면서 받는 者가, 받는 者이면서 주는 者가 되게 하셨단다. 그게 두번째 膳物이야.


그런데 神이 보니까, 그것만으로는 不足한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이 世上의 存在들에게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지. 말이란 서로 相對方과 對話하는 것이잖아. 그렇게 對話를 하다 보면 相對方을 理解하게 되고, 相對方을 理解하게 되면 마음의 平和를 얻게 되고, 마음의 平和를 얻으면 幸福해지게 되거든. 그렇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마음을 함께 나누라고 을 주셨지. 그게 세번째 膳物이야.

하지만 말이 있어도 매일 같은 말만 하면 재미없잖아. 또, 內的으로 成長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라면 무슨 發展이 있고,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래서 各各의 存在들이 內的으로 發展하고 成長할 수 있도록 直觀의 힘을 주셨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을 通해서 成長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것이 바로 네번째 膳物이야.
이렇게 神이 네 가지 膳物을 주신 다음에야 이 世上은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단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北美 인디언들의 靈的인 智慧가 고스란히 濃縮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創造 이야기를 通해서 太初에 神이 人間에게 주신 膳物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各各의 存在가 모두 神의 創造에 同參하는

 '움직일 수 없는 存在(不移者)'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나보다는 家族과 이웃과 社會를 위해서

奉使하고 獻身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神話와 傳說 속에는 이처럼 神의 太初의 創造 이야기는 물론, 人間의 紀元에 關한 이야기, 토끼의 귀가 왜 그렇게 길어졌는지, 곰은 왜 그렇게 꽁지가 짧은지, 해와 달은 어떻게 생겼는지, 왜 그처럼 낮과 밤으로 交代로 뜨는지, 또 山과 江은 왜 생겼으며, 또 어머니 大地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 等等, 이 世上의 온갖 現狀과 關係에 對한 靈的 智慧가 담겨 있습니다.


세네카 인디언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들 중에는 또 다음과 같은 고래에 關한 興味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大地가 생겨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야. 많은 水生 生物들은 뭍 위로 올라가기보다는 물 속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願했지. 고래도 그렇게 바다에 남았어. 그런데 어린 고래 한 마리가 뭍 위의 生活을 經驗해 보고 싶어하는 거야. 그는 바위로 된 海岸線을 따라 들어가다가 바위에 告代人들이 記錄해 놓은 글을 發見했지. 어린 고래는 그 글이 古代의 祖上들이 남겨 놓은 글임을 단번에 알았어. 왜냐 하면, 고래는 어머니 大地에서 일어나는 일에 늘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記錄하는 任務를 가졌기 때문이지.

어린 고래는 바다로 돌아와 어르신 고래에게 그가 본 것을 말씀드렸어. 그러자 어르신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거야.
"네가 發見한 것을 알려 줄 만한 親舊를 찾아보거라."


그래서 어린 고래는 다시 그 海岸가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 곳에서 두 발 달린 사람 한 명을 만났지. 그는 고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 어린 고래는 그 사람과 물가에서 헤엄을 치며 많은 時間을 보냈어. 그리고 適當한 때가 되자 그를 古代의 祖上들이 남겨 놓은 글이 있는 그 바위로 데려갔지. 바다의 물이 빠지자 마침내 古代의 祖上들이 그 곳에 적어 놓은 글이 水面 위로 떠올랐겠지. 두 발 달린 사람은 그 글을 通해서 비로소 고래가 두 발 달린 사람의 祖上이라는 것과 古代애는 動物들과 새들 또한 사람처럼 말하고 알아들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과 똑같이 對話하고 서로의

生覺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또, 植物들도 소리와 에너지를 通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도...
그렇게 우리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存在 方式만 우리와 달랐지, 모두 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야.

大地 어머니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記憶하는 任務를 맡고 있는 고래는 이렇게 自身이 보고 記憶하는 것을

人間에게 알려 주었고, 우리는 비로소 人間과 다른 存在들과의 關係와 意味를 理解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記憶이 갖고 있는 이런 靈的인 意味의 壓券은 단연 세네카의 靈的 敎師 '트윌라 니치'가 들려 주는,

'돌 部族(stone tribe)'의 靈的 敎師 '기육'이 들려 주는 人類의 歷史에 對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1991년에 『우리 以前의 또 다른 委員會의 불꽃』이란 題目으로 出販된 바 있는

이 이야기의 一部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려서 部族의 추장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돌(stone)의 言語'에 對해 틈틈이 배워 돌과 對話를 할 수 있었던

트윌라 니치는 成長해 部族의 呪術師가 된 어느날, 일곱 모가 난 돌 - 部族의 呪術師 기육으로부터

宇宙의 創造와 人類의 歷史에 對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太初에 이 世上에는 텅~ 빈 空間만이 있었어.

 

그 때 구름 같은 것이 일어나면서 創造에 必要한 빛과 生覺과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기 始作했지.

 

神은 永遠한 大地를 만드시기 前에 먼저 物質에게 '듣는' 힘을 膳物로 주셨어. 그런 다음에야

永遠한 大地와 물이 만들어지기 始作했거든. 그 다음에 해와 달이 만들어졌지.

 

그제야 낮과 밤이 생기고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기 始作했어.


그 때 神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거야. "너는 앞으로 기육이라 불릴 것이다. 너는 '돌- 사람'이니, 이제부터 大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보고 記憶해 두었다가 大地 어머니의 智慧를 알고 싶어하는 存在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 주거라." 그렇게 해서 나는 宇宙의 創造와 大地 어머니의 歷史를 記憶하고 記錄하는 存在가 되었지. 그리고 이 世上이 創造되기 直前에 열린 '첫번째 部族 委員會' 에도 참가했어. 그 會議에는 '하늘 사람'들이 主로 參加했거든.


그 첫번째 部族 委員會에서 마침내 우리의 여섯 兄弟 部族의 創造를 決定했는데, 그 여섯 部족은 '식물 사람',

'동물 사람', '곤충 사람', '땅 위를 기어다니는 사람', '물고기 사람', '날개 달린 사람', '두 발 달린 사람'이야.


마침내 神이 여섯 兄弟 部族을 차례로 創造하셨는데,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야. 하늘 사람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靈魂만 있고 몸과 가슴은 없거든. 그 하늘 사람들이 地上의 兄弟들처럼 몸과 가슴을 가지고 그들처럼 느끼고 나누고 經驗하기 위해 自身들의 靈的인 智慧의 膳物을 가지고 다투어 地上의 兄弟들 속으로 내려가기 始作한 거야.

그들과 하나 되기 위해... 그들은 몸과 가슴이 없는 靈的인 存在만으로는 成長을 繼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 成長을 繼續하기 위해 기꺼이 地上의 存在들과 함께 하기로 決定한 것이지. 마치 하늘에서 祝福처럼 쏟아지는 비처럼

말이야. 그 하늘 사람들의 靈的인 智慧 德分에 地上의 여섯 兄弟 部族들은 마음靈魂이 均衡과 調和를 이룬

아름다운 存在가 되었지.


그렇게 해서 드디어 첫번째 世界가 創造되었어. 그 첫번째 世界는 사랑으로 가득 찬 世界였지.

世上은 아름다움과 靈的인 智慧가 넘쳐났어. 大地에는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들과 動物들, 그리고 새들로 가득했고,

江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幸福하게 뛰어놀았지. 물론 두 발 달린 사람도 함께 말이야. 그 때 두 발 달린 사람 속에는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함께 共存했어. 그렇게 그들은 두 발 달린 사람 속에서 調和를 이루는 것을 배웠지.


그리고 나는 '노그'라는 最初의 人間 親舊를 갖게 되었지.

나는 그에게 다섯 皮膚 색깔을 가진 人間의 任務에 對해 말해 주었어.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最初로 內的 平和와 成長을 위한 儀禮들을 마련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갈색 피부를 가진 人間은 어머니 大地의 記錄과 生存을 위한 本能的 知識을 갖게 될 거라는 것, 그 다음

붉은 피부를 가진 人間은 어머니 大地와 그 위에 살고 있는 生命들의 充實한 保護者가 될 거라는 것,

노란 피부를 가진 人間은 새로운 知識 體係를 세우게 될 거라는 것,

흰 피부를 가진 人間은 이 世上에 眞理와 公正함을 가져오게 될 거라는 것 등등을 말이지.


첫번째 世界에서는 말이 必要 없었어. 모든 存在가 말이 없이도 自由롭게 서로 對話하고 生覺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

서로가 恭敬하면서 말이야.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언어(Hail-lo-way-an)'라고 불러. 아직 人間의 言語가 태어나기 前이지. 沈默과 몸짓으로 모든 것을 表現할 수 있었어. 그 때는 하늘에 平和의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참으로 아름다운 世上이었어. 人間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眞情한 '아름다움의 길' 이었지.

하지만 人間들 중에는 貪慾과 野望과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려는 欲望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었고,

結局 첫번째 세계는 '굽은 길'을 가는 그들 때문에 에 의해서 滅亡하고 말았지.

그렇게 기육은 그 다음 얼음에 의해서 滅亡했던 두 번째와 에 의해서 滅亡했던 세 번째 세계의 비극에 대해서 말합니다. 人間이 어떻게 아름다움의 길을 잃어 갔던가를, 그리고 어떻게 사랑의 言語를 잃어 갔던가를... 그런 다음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世界인 分裂과 갈등의 네 번째 世界에 對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세계는 太初의 神이 이 世上에 내려 주셨던 사랑에 대한 記憶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代身

 噴怒의 神들이 支配하는 宗敎들이 나타나 君臨하게 되었지. 그리고 物質의 所有와 蓄積이 成功을 決定하는 象徵物이

되었어.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靈的인 삶을 잃고, 自然으로부터 멀어져 갔지. 自身에게 주어진 神의 膳物에 感謝하는

法을 잊어버린 거야. 어머니 大地의 恩惠도 잊어버리고...

그뿐이 아니야. 서로 다른 皮膚를 가진 사람들끼리 갈라지고, 나라와 나라 사이도 갈라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갈라지고... 그렇게 서로 分裂하고 對立해. 때문에 이 世界는 머지않아 滅亡하게 될 거야. 지금이 바로 그 轉換点이지. 곧 地軸의 移動과 廻轉이 있을 것이고, 바다에는 큰 혜성이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되겠지. 그렇게 해서 다음 世界인

第5世界로 넘어가게 될 거야.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그 以前의 世界들이 닫혔다가 새로 열렸던 거와 달리  完전히 닫히지 않은 채

第5世界로 넘어갈 거라고 해. 第4世界 末에 平和를 사랑하는 '무지개 사람'들이 出現했기 때문이지.

第5世界는 平和의 힘이 다시 物質의 힘을 넘어 일어나는 世界거든. 그렇게 第6世界를 지나 마지막으로 第7世界에

이르면 平和와 幸福이 가득한 世上이 올 거라고 해. 모든 것이 均衡과 調和를 되찾고, 사랑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우리가 한낱 無生物이라고 여겼던 돌멩이-사람의 呪術師인 기육은 이렇게 自身이 太初부터 보고 들은

祖上들의 이이기와 人類의 歷史와 運命에 대해 트윌라 니치에게 自細히 들려 줍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注目할 것은 우리가 사는 第4世界가 人類의 靈的 歷史에서 轉換点(tuning point)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人類는 太初에 神이 주신 사랑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物質과 知識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부터는

人類가 새로이 平和와 靈性의 重要性을 깨닫게 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위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기육이 계속 强調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re-membering, 記憶의 重要性입니다.

그에 依하면, 人間이 記憶의 所重함을 깨닫게 된 것은 第2世界라고 합니다. 第1世界가 불의 淨化로 滅亡하면서 太陽도 비취지 않아 第2世界는 얼음으로 가득 찬 氷河의 世界가 됩니다. 自然히 사람들은 地下의 동굴에서 생활하게 되고, 추위와 싸우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어려운 시절을 맞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第1世界에서 神이 人間에게 주셨던 智慧들을 回想하며, 그 記憶의 조각들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貴重한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人間의 內面에 남아 있는 靈的 障碍들로 因해 人類는 몇 번에 걸친 試鍊을 맞게 되고, 그 때마다 世界는 닫고 여는 過程을 反復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第2世界에서 re-membering의 重要性을 깨닫게 된 以後로 記憶은 單純히 過去의 知識을 다시 生覺해 내는 것이 아니라, 過去 祖上들의 삶으로부터 現在와 未來의 삶의 智慧와 가르침을 얻는 重要한 根源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太初에 이 世上은 아름다움과 사랑이 가득 찬 곳이었기에... 그렇게 모든 存在가 하나가 되어 幸福했기에...


그런데 그 記憶은 언제나 우리 內面의 沈默과 冥想으로부터 찾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知的인 머리만으로는 그 記憶에 到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北美 인디언들이 沈默을 하며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生覺하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 하면 知識이 있어도 그것을 참된 智慧와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은

結局 沈默 속에서만, 느낌과 直觀을 通해서만 可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神話와 傳說 등 이야기 속에는 깊은 삶의 智慧가 담겨 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아마 우리의 옛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모두 다 이 世上의 삶은 나 한 個人의 삶의 問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窮極的으로 宇宙 次元의 問題라는 것,

그리고 한 個人의 靈的인 깨어남은 곧 이 宇宙의 歷史와 그 안에 살았고, 또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

無數한 存在들과의 靈的인 만남이라는 것, 그들과 하나 됨이라는 것, 그 만남의 中心에 바로 記憶이 있고,

그 記憶은 正確히 re-membering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것은 다른 말로 本來의 온전한 모습, 神이 이 世上을 創造할 때 우리에게 주셨던

그 사랑과 平和가 充滿하던 時節의 참 모습을 되찾아 가는 過程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