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인디언 이야기 - 19
[질문하는 법]- 검은 호수 서정록
存在들과 더불어 均衡과 調和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案內하는 것이 그들 敎育의 目標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知識은 필요하면 그때그때 배워서 사용할 수 있지만, 살아가는 데 必要한 智慧는 남이 代身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오직 삶의 經驗만이 智慧를 가져다 준다고...
그래서 인디언들은 아이들에게 生活 속에서 다른 存在들을 恭敬하고 그들과 關係 맺는 法을 가르칩니다. 사냥할 때도
제일 약한 놈을 꼭 必要한 만큼만 잡도록 가르치고, 과실이나 뿌리를 채취할 때도 그 중 一部만 취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必要한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가져가도 이듬해에 더 繁成할 수 있을
만큼 남겨 두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야 삶은 계속될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기에...
그리고 自己가 한 行爲에 대해서는 반드시 責任을 지도록 가르칩니다. 約束한 것은 반드시 行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말과 行爲가 重한 것임을 스스로 깨우치게 합니다.
결코 知識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智慧를 얻으면 知識은 저절로 따라오는 法. 그래서 그들은 '質問하는 法'을 가르칩니다. 智慧를 얻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質問하는 法이 重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質問만 할 줄 알아도 이미 절반을 안 거나 다름없다고...
다음은 찰스
이스트맨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회상입니다.
내가 열다섯 살 때까지 敎育을 맡으셨던 나이 아저씨는
嚴格한 訓練을 시키셨으며, 또한 훌륭한 敎師였다.
아침에
내가 티피를 나설 때면 그 분은
말씀하셨다.
"불쌍한 막내야. 모든 事物을 꼼꼼히
살펴보거라."
그리고 저녁때,
내가 돌아오면 한 時間씩 내게 물으셨다.
"나무들은 어느 쪽 껍질의 색깔이 더 밝더냐? 어느쪽
가지들이 가장 均衡 있게 자라더냐?"
뿐만 아니라, 그 분은 낮동안 처음 본 새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여 說明하도록 하셨다. 때문에 나는 처음 만나는 새들에게 그들의 부리 색깔이나 모양, 그들의 울음소리와 생김새, 그리고 둥지의 位置 등을 살펴 이름을 붙여 주곤 했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 준 새들 중에 어떤 것들은 내게 깊은 印象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내가 새의 特徵을 잘못 把握하였을 경우,
아저씨는 내게 正確한 새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어쩌다 正確한 새 이름을 맞추면 따뜻한 말로 격려해 주셨다.
내 좀 더 나이를 먹어 8살이나
9살쯤 되었을 때, 아저씨의 가르침은 더욱 깊어졌다.
예를
들어, 그 분은 이렇게 물으시곤
했다.
"저 쪽 湖水에 물고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지?"
"그건 말이죠,
한낮에 녀석들이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물 위로 뛰어오르거든요. 그래서 알았어요."
아저씨는 나의 自信 있는, 그러나 皮象的인 對答에 미소를
지으시곤 했다.
"얕은 물
속에 모여 있는 작은 조약돌은 어떻게 生覺하느냐?
그리고 물가의 모래바닥에 새겨진 작은 曲線이나 작은 모래 언덕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지?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들을 어디서 보았지? 湖水에 물이 드나드는 곳은 이들과 어떤 關係가 있지?"
그 분은 내게 던진 그 많은 質問에
대해 내가 正確한 대답을 할 것을 기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觀察力이 뛰어난 훌륭한 학생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불쌍한 막내야, 늑대를 보고 잘 배워야 한다. 그 놈은
놀라서 목숨을 걸고 도망칠 때 조차도 마지막 隱身處에 들어가기 前에 반드시 멈추어 周邊을 한 번 더 살펴본단다. 그러니 너도 事物을 볼 때
반드시 한 번 더 自細히 살펴보도록 해라."
인디언 아이들의 敎育에서 重要한 점은 生活 속에서 제
스스로 배우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神命 探究(vision quest)에서 광주리 만드는 장인이 될 神命을 받은 아이가 광주리 만드는
技術을 배우고자 하면, 그는 그 方面의 匠人한테 徒弟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그 徒弟 밑에서 單純히 광주리 만드는 技術뿐 아니라 갈대를
거두는 法, 祭物을 바치고 갈대의 魂靈을 위로하는 法, 일 년 중 어느 時期에 나무와 갈대를 거두는지, 그리고 숲과 들판의 秩序를 깨뜨리지 않고
갈대를 選別하는 法 등을 함께 배웁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植物과 季節이 가져오는 變化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른을 恭敬하는 法, 自然의
對相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것 등을 배웁니다.
그렇게
스승이 하는 것을 熱心히 따라 하는 동안, 어느 날 문득 自身이 광주리 만드는 匠人이 되어 있는 것을 發見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광주리 만드는 技術을 배우는 동안 그 技術과 關聯된 神話에 對해서, 自然과 人生에 대해서, 그리고 恭敬과 敬畏心에 對해서 배웁니다. 말 그대로
삶 그 自體를 배우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디언 어른들은 知識을 傳授하기보다는 아이의
마음에 씨앗을 심어주는 겁니다.
問題를 던져 주고 스스로 풀어 가도록
말이지요.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무엇'에 對해서 묻지 말고 '어떻게'를 물으라고, 무엇에 對한 質問은 本質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知識은 이 무엇에 對한 것입니다. 現代 文明도, 科學의 發展도, 醫學의 發展도
모두 무엇에 對한 質問을 通해서 이룩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知識의 蓄積을 가져다 주긴 해도,
우리의 삶에 意味를 주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아인슈타인에게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科學的으로 說明할 수 있을 거라고 믿나?"
그에게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可能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거기에 무슨 意味가 있겠어? 그것은 한낱 知識의 나열에 불과해.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을 波動 理論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야."
知識은 道具的인 것입니다.
삶에
必要하긴 하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價値있게, 意味 있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知識만으로는 결코 幸福해질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잘못된 知識은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殺傷하는 武器나 核武器와 같은 것이 그 代表的인 것이지요. 그런 知識은 결국 災殃을 만들 뿐입니다.
그에 견주어, '어떻게'에 對한 質問은 過程과 方法, 그리고 삶의 態度에 關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들판에 핀 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그걸 먹고 크는 소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고 해 봅시다.
'꽃이 무엇이냐', '소가 무엇이냐'는 質問은 막상 對答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對答한다고 해도 거기엔 우리의 삶을 비춰 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들판에 핀 꽃을 보며 느끼는 것에 對해 묻는다면, 또 그 풀을 뜯어 먹고 크는 소를 보며 느끼는 것에 對해 묻는다면, 이야기는 完全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 꽃이 아름답다거나 新鮮하다고 대답할 것이고, 그것은 그 꽃이 내게 주는
意味에 대한 것입니다. 그 속에 나와 꽃의 關係가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비슷한 狀況에서 呪術師인 이스트치마는 後에 『일곱 개의 화살(Seven Arrows)』을
쓰게 될
그의 弟子 하이유메이요스츠 太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프레이리 草原 어머니와 아버지라 불리는 大地
위에서
人生을 만난다.
우리는 프레이리 草原 어머니와 아버지라 불리는 大地
위에서
죽음을
만난다.
풀과 꽃들은 프레이리 草原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자라고
우리는 사람으로서
자란다.
싱그러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우리는
프레이리 草原의 꽃들 때문에 자란다.
우리는 人生을 노래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프레이리 草原의
꽃들이야말로
우리들을 向해
춤추는 質問들이다.
삶에 對해서
죽음에 對해서
그리고 나의 存在에 對해서
여기서 이스트치마는 꽃을 보며 삶과 죽음에 對해서, 그리고
人生의 意味에 對해서 말합니다. 그女에게 프레이리 들판의 꽃들은 그저 한낱 들판에 핀 野生花가 아니라 自身이 存在할 수 있도록 그에게 生命을 준
存在이며, 自身이 힘들 때 친구가 되어 준 存在이며, 自글자색身이 노래 부를 수 있게 感興을 준 存在이며, 삶과 죽음에 對해서, 그리고 自身의 存在에
對해서 깨닫게 해 준 貴重한 存在입니다. 이스트치마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野生花 女人, 토마시아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버펄로를
恭敬하도록 가르쳤는지 듣고 싶지 않니?
토마시아사는 野生花에 對해서 말했다. 풀-꽃들이 바로 버펄로라고, 버펄로들은 그들이 먹는 풀-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때문에 우리 生命의 圓 추장들은 버펄로를 풀-꽃이라 부른다. 북부 지역에 사는 크리族과 오지브웨族 또한 버펄로를 풀-꽃이라 부른다. 네가 먹는 植物과 動物들을 恭敬하라. 삶을 恭敬하라. 죽음을 恭敬하라.
네가 殺生하는 모든
植物들과 動物들에 對해서 責任을 져라. 이 世上에 存在하는 모든 것들을 恭敬하라.
인디언들은 아이들에게 '내가 무엇이 될까'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自身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自然히 決定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디언들이 아이들에게 質問하는 法을 가르치는 理由입니다.
그런데
質問에 對해서 인디언 敎育 專門家인 그레고리 카제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質問은 靈魂과 함께
始作해서
靈魂과 함께
끝난다.
그것은
祈禱하는 것이다.
自身의
靈魂의 깨어남을 위해
그리고 땅을 耕作하고
씨앗을 심은 뒤
世上의 靈魂들을 向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방금 씨앗을
심었습니다.
씨앗이 잘
자라도록 도와 주시고
그에게
生命을 주소서.
그가 自身의
神命을 가질 수 있게 하소서."
한 마디로, 質問은 씨앗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質問을 하는 것은 어머니 大地에 生命의 씨앗을 심은 뒤 잘 자라기를 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우를 사냥한 사냥꾼이 여우의 새끼들을 살려 주면서 그들이 健康하게 크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삶 속에서 만나는 그 수많은
質問은 늘 나의 삶과 宇宙 全切에 걸친 問題이고,
그 때마다 나의 選擇은 곧 나의 靈的인 成長을 左右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피가 돌지 않으면 두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없듯이...
우리는 수많은 關係의 次元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의 行爲는 다른 存在들에게 影響을 미치고, 또 나는 다른 存在들의 影響을 받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質問은 늘 나와 다른 存在와의 關係에 대해서 生覺하고,
그 意味를 살피는 것을 前提로 합니다. 결코 單純한 方法的 問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人生의
모든 行爲는 끊임없는 質問의 連續이라고,
그리고 人生에 對해 끊임없이 質問을 던지고 모두를 위해서 最善의 選擇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神性한 일이라고,
이스트치마는 '어떻게'와
'무엇'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質問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接近할 것인가를 위해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質問은 解決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해결하는 方法인 것이다.
우리가 쌓아 올리는 그 무엇이 아니라 쌓아올리는 過程인 것이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變하고, 어떻게 일하는가 하는 것, 그 모두를 意味한다!
너의 世界에 對해서 어떻게 質問하고, 어떻게 너 自身을 馴致시키는가야말로 모든 것을 決定한다.
우리에게 맨 처음이자 가장 重要한 質問은 언제나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어떻게'는 네 靈魂과 關係된
質問이다. 그에 反해, '무엇'은 對答을 强要하고 너를 規定한다.
'무엇'은 對答할 수 없는 것에 對해서 오직 따르도록
要求한다.
그러나 '어떻게'는 對答할 수 있는 것에 對해서 참된 均衡과 調和의 길을 찾게 한다.
우리의 生命의 圓 추장들은 늘
'質問의 圓' 속에 있다.
어떤 것을 묻고 대답하는 方式이 正義의
圓의 土臺다.
네가 어머니 大地에게 한 質問의 答은 네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神이 네게 주신 能力과 才能을 가지고 家族과 이웃과 社會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속에 있다.
너의 存在와 誕生을 祝福하라. 네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너를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나를 낮추고 모두를 위해서 살
것인가...
質問은
언제나 나 自身을 向하기 마련입니다. 變化 또한 언제나 自己 自身 속에서 始作합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밖에서 먼저 變하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오직 우리들 自身이 먼저 變化할 때만이 이 世上을 變化시킬 수 있다고 말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質問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自由로운 存在이기 때문입니다.
그 自由는 어머니 大地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存在와 誕生으로부터 왔습니다.
인디언 父母들은 아이들을 끔찍이
위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버릇없게 키우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반듯하게 의젓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키웁니다.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되면 듣는 法을 가르칩니다.
어른들의 말씀과 自然의 친구들이 내는 소리를, 그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法을...
그렇게 아이들이 듣는 것에 익숙해진
뒤에야, 그들은 質問하는 法을 가르칩니다.
이 때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를 묻도록 가르칩니다. 그들의 神話와 傳說과 이야기를 통해서...
놀랍게도 古代의 神話와 傳說은 하나같이 '무엇'에 對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에 對한 이야기입니다.
이 世上은 어떻게 創造되었으며, 봄·여름·가을·겨울은 어떻게 생겨났고, 곰의 꽁지는 또 왜 그렇게 짧은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꽃은 어디서 오는지, 또 낮과 밤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等等....
거기에는 敍事가 있고, 줄거리가 있고, 冒驗이 있고, 感動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人格과 智慧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白人 學校에 다니기
始作하면서부터 尊敬心을 잃어버리기 始作했다고 인디언들은 恨嘆합니다.
尊敬心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自然에 대한 敬畏心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對한 恭敬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偉大한 神靈과 어머니 大地에 對한 恭敬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尊敬心을 잃어버린 아이는
끝내는 質問하는 法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 하면, 恭敬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對한 自己 省察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이 恭敬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고 恨嘆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생태적인
세상, 아름다운 소통 「이장」, 2005년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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