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어떻게 생기고 소멸되는가? [목탁소리/ 법상스님]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인간이 고안해 낸 象徵에 불과하다. 모든 槪念作用들은 幻影과도
같은 空虛한 헛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太初에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槪念도, 觀念도, 分別도, 象徵
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꽉~ 찬 텅~빈 充滿함이 여여(如如)하게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충만의 여여함 거기에는 아무런 是非도, 分別도, 싸움도, 좋고 나쁨도, 행복과 괴로움도, 성공도 실패도
없었다. 나아가 중생과 부처도 없고,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고, 인간과 자연의 區分도
없었기에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 없고, 어리석은 이가 지혜롭게 되기 위한 공부도
필요 없고, 죽지 않기 위해, 늙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성공을 위해, 부유함을
위해, 승리를 위해, 해탈을 위해 달려갈 필요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꽉찬 텅~빔 충만의 여여함 거기에는 모든 것이 完全하고 圓滿하며 充滿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처(佛)였고, 神이였으며, 그저 그것으로 滿足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太初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瞬間도 그러하다. 아니 어느 한
瞬間도 그러한 텅~빈 충만의 여여함이 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왜 나에게는 그런 充滿하고 淸淨한 眞理의 世界가 없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世上은 왜 이토록 어둡고
탁하며 어지러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 思惟의 뜰을 거닐어 보자. 사람들이 좋아하는 習慣은 분별해서 이름을 짓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그것에 이름을 짓고, 象을 짓고, 規定 짓기를 좋아한다. 이른바 象徵을 만들어 내는 習性이 있
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상을 짓고, 이름을 붙이고 규정 짓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感情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어떤 感情에는 ‘미움’이라는 상징을, 또 어떤
感情에는 ‘슬픔’이니, ‘행복’이니 하는 상징을 붙여 놓았다. 또 어떤 것에는 ‘부유함’을 또 어떤 것에는 ‘가난’
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어떤 상태에는 ‘성공’이라고, 또 어떤 상태에는 ‘실패’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
으며, 어떤 것에는 ‘옳음’ 또 어떤 것은 ‘그름’이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존재에 대해
서는 ‘중생’이라는 이름을,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부처’라는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이름 붙이고 상징화 하고 규정화 하는 習性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화하는
作用, 이름 짓고, 상을 짓는 作用 이것이 삶의 모든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놓는 始發点이 되었다. 왜냐하
면 사람들은 쉽게 ‘이러 이러한 狀況’에 대해서는 뭉뚱그려 ‘이런 이름’을 ‘저러한 狀況’들에 대해서는
‘저런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事實 그러한 이름과 그러한 狀況이 正確히 一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교의 십이연기에서는 명색(名色)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름(名)과 形態(色)을
지닌 存在로 認識한다고 해서 名色이라고 지칭하는데, 십이연기에서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根源的
인 괴로움을 소멸시키려면 名色을 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이름 짓기
는 결국에는 괴로움만을 불러온다.
상징과 이름을 규정해 놓기로 약속한 瞬間부터 우리의 어떤 經驗은 어떤 이름으로 붙여져 記憶 속에 저장
되기 시작한다. 기억 속에 貯藏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파일을 저장하려
면 파일 이름이 있어야 하고, 창고에도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이름표가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것은 엄청난 問題를 초래한다. 이때부터 우리의 人生은 꼬이기 시작하고, 따분해 지기 시작한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 놓고 나면 곧 그것은 記憶 속에 貯藏되게 된다. 특히나 저장될 때는 그 과
거의 기억에 빗대어 좋거나 싫다는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자동으로 섞인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것과 비슷
한 또 다른 狀況을 만나게 될 때 自動的으로 튀어 나와 새로운 狀況을 예전의 記憶 속에 담겨진 이름으로
걸러서 判斷하고 分別하게 만든다. 전혀 새로운 狀況을 예전의 그 상황으로 限定짓고야 마는 것이다.
이처럼 예전의 기억이 좋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좋다’는 觀念으로 저장되어졌다가 훗날 새로운 비슷한
狀況을 맞을 때 똑같이 ‘좋다’고 해석하게 되고, ‘나쁘다’는 觀念으로 저장되어 있던 상황들은 또 다른
비슷한 狀況을 맞을 때 ‘나쁜 상황’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失手며, 誤謬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誤謬인지를 모른다. 아니 그것이 옳다고 느끼고, 정당한 해석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내 生覺이 옳고, 내 感情이 옳다고 固執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매 瞬間 瞬間
전혀 새롭고 신선한 經驗들을 새롭고 경이롭게 체험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얽
매여 我執에 사로잡힌 해석을 가하게 된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세상은 새로운 곳이 아니다. 매 순간 순간은 과거의 연장이며, 과거의 속박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記憶된 수많은 感情들 가운데 過去의 經驗에 빗대로 ‘좋았던’ 감정을 ‘행복’이라
고 이름 짓고 계속해서 그 좋았던 행복의 감정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欲望’의 生成過程
이며 實體다.
이처럼 욕망과 집착은 과거의 잔재이며 기억된 감정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과거에 이름 지어 놓은 觀念이
라는 필터로 現實을 걸러내고 거기에 따라 欲望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欲望하고, 欲望한
것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欲望을 채워나가는 방법으로는 언
제까지고 欲望을 끝낼 수는 없다. 欲望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欲望을 끝낼 수 없다. 欲望이 생겨나게 된
전체적인 마음의 作用을 全切的으로 思惟하고 깨달아, 欲望이라는 것이 虛妄하게 일어났으며, 虛妄하게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알고 볼 때 欲望은 終息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간의 欲望과 執着을 버리기 위해서는 ‘我相’과 ‘我執’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상’ ‘상징’에 얽매여 그러한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欲望의
문제를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이다. 欲望을 채우겠다거나, 欲望을 없애겠다는 生覺 모두 또 다른 欲望일
뿐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일어나는 방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欲望을 채우겠다는 것이 중생이라
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면, 욕망을 없애고 초월하겠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라는 상징도, 중생이라는 상징도 모두 다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이요, 이름일 뿐임에는 변함
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欲望과 執着과 我相의 전체적인 이해와 사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피나는 수행으로 欲望을 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欲望을 채워 나가겠다는
생각도 안 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欲望을 채우거나 끊는 문제로 다가설 것이
아니라, 欲望 그 自體의 本性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欲望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全切的인 過程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觀察하되, 그 어떤 是非分別도, 옳고
그르다는 判斷도 없어야 한다. 위에서 설명했던 欲望이 생겨나는 전 過程을 낱낱이 살핌으로써 그것이
虛妄한 이름짓기의 結果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狀況을
좋거나 싫다는 分別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체적으로 自覺하여 바라볼 때 欲望의 本來 性稟을
바로 보게 될 수 있다.
어떤 狀況이 일어났다. 우리의 習慣은 瞬間 과거의 어떤 비슷한 狀況과 記憶으로 쏜살같이 달려 갈 것이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과거에 어떻게 이름 지어 놓았는지를 찾아낸 뒤, 이 狀況이 좋은 狀況인지 나쁜 狀況인
지를 判斷 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라고 判斷이 되면 그 상황에 執着할 것이고, 나쁜 감정이라고
판단되면 그 狀況을 회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조금만 注意
를 기울인다면 그 모든 過程을 낱낱이 돌이켜 觀照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애써 그 過程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다. 그저 그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 된다. 바라보다 보면 순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習慣이 나를 支配하게 되는 瞬間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作用을 지켜보게 되면 좋거나 나쁘게 보는 틀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이 세상을 매 순간 순간 과거의 이름표로 걸러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때, 과거가 아닌
매 순간의 지금 여기 현재로써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새롭고 경이에 찬 現實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欲望이 일어나는 根源的인 作用을 이해함으로써, 欲望이라는 과거의 잔재에 속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보면 매 순간 새롭고 신선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 온전히 바라보면 欲望을 없애려고도 채우려고도
하지 않은 채 欲望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지금
여기 이 瞬間이 다시금 太初의 텅~ 빈 고요로써 되돌아옴을 느낀다. 본래 아무 일도 없었음을.
[날마다 해피엔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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