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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2강 2부

장백산-1 2014. 12. 23. 15:24

 

 

 

 

 

 

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2강 2부|영상법문 녹취록

 

 

내가 반드시 내가 깨달아야 되겠다

내가 진리라는 거 이건 한번 내가 알아봐야겠다

 

내가 이렇게 백년도 안 되는 인생

돈 명예 권력 지위 이런 것만 가지려고 벌려고 막 달려가는 人生 이게 참 虛妄한 人生입니다.

우리는 얼마 안돼서 다 죽을 것이고 이런것들 또한 다 허망하게 무너질 것인데

여러분 이제 옆에 계신 연세 조금씩 되시고 또 넘어가시고 하면은

주변에 친구들 부모님 가까운 사람 먼 사람 한명 한명 저승세계로 가지 않습니까?

그런걸 보더라도 또 아파서 병원에 가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병원에 한번 면회만 한 번 갔다 와도 그런 거 확 느끼지 않습니까?

전 병원만 한번 딱 갔다 와도 진짜 이 뭐랄까 이 세상 사는 것에 대해서

어떨 때는 병원을 병문안 갔다 왔는데 갑자기 세상에 대한 정이 뚝 떨어져요.

누구나 저렇게 될 거 아닙니까? 누구나 병원 신세를 질 거 아니에요? 누구나 영안실 신세를 반드시 질 거 아닙니까?

이건 필연이거든요. 필연. 원신세 안 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세상에.

누구나 그런 신세를 지고 누구나 죽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도 거기 정이 안 떨어져요.

그런데도 정이 안 떨어지고 이 세상에 더 애착이 생긴단 말이죠. 사람들은.

그건 결과적으로 결국에 가서 우리에게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기쁘다 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있음으로 기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것이 있음으로 괴롭습니다.

초기불교 경전에는 뭐라고 나오냐 하면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이 있어 기쁘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있어서 기쁘다. 거기 그러게 나와 있어요. 소가 있는 사람은 소가 있어서 기쁘고 땅이 있는 사람은 땅이 있어서 기쁘다.

그런데,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이 있기 때문에 괴롭고, 소가 있으면 소 때문에 괴롭고, 집이 있으면 집 때문에 괴롭고,

자식도 집도 소유 모든 소유는 그걸로 인해서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걸로 인해서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집착하는 순간 그 집착은 언젠간 소멸될 수밖에 없다라는 필연적인 諸行無常 이라는 眞理를 가졌단 말이죠.

소유 거기에 목숨 걸고 사는 인생이 이게 얼마나 허망한 인생입니까? 여기에 목숨 걸고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사는 게

상식으로 이건 알음알이로 생각해도 탁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기에 목숨 걸고 산다는 게 얼마나 虛妄한 일입니까?

진짜 허망한 일이죠. 탁 답이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가 뭘 해야 되는가가?

工夫를 해야 됩니다. 마음工夫를 해야 한단 말이죠. 이 깨달음을 얻는 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깨닫는가?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는데 이미 도착해 있는 존재인데

이미 깨달이 있고 도착해 있는데  도착해서 다만 내가 錯覺하고 있을 뿐인데,뭐 때문에? 이 相 때문에, 相에 얽매인 마음, 妄想 이 虛妄한 生覺 그래서 妄想이라고 하잖아요.망상 때문에 얽매인 마음 때문에 자꾸 둘로 二相으로 나눈단 말이죠.

그것 때문에 우리는 錯覺하고 있을 뿐이지 내가 중생이구나 내가 언젠간 부처가 되야 되겠구나 하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 이미 우린 들어와 있다. 이미 부처란 말이죠.

 

그러면 뭐만 하면 되냐 뭐만 하면 되느냐 하면 부처가 되려는 마음만 쓰면 된단 말입니다.내가 부처가 되야 되겠다고 하고 지금까지는 우리의 삶의 原動力이 돈 명예 권력 지위 이런데 있었단 말이에요.

나를 擴張 하는 것들이 삶의 原動力이 되어왔단 말입니다. 이를테면 내 자식이 공부 잘해서 남들이 칭찬해주면 기분이 좋고, 돈이 늘어나면 기분이 좋고, 좋은 집을 샀을 때 막 기분 좋고, 이렇게 나라는 我相을 擴張했을 때 기분이 좋았단 말이죠. 我相을 확장하는 방식, 相을 늘려 나가는 방식, 相을 깨기는커녕 相을 늘려 나갔을 때

특히나 아상 나다라는 상, 아상을 늘려 놨을 때 행복하다라고 착각하며 지금까지 살았단 말이죠.

이러한 아상 확장 방식을 이제 탁 내려놓고 내려 놓고 대신

어떤 방식, 무엇이 내 人生의 原動力이 돼서 내가 人生을 살까 이것이 重要한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의 삶은, 우리 삶의 原動力은 我相을 擴張 하는 데서 왔단 말이죠.

我相 이런 相을 擴張 하는데서 오는 행복을 행복이라고 여길 게 아니라

내 돈 내 소유 내 것을 늘리는 데서 오는 느낌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러한 것이 원동력이 돼서 인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 대신에 相을 타파 하는 거 내가 이 보리심 발보리심 발심 내가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내가 한번 반드시 깨달아 봐야 되겠다. 내가 이미 부처인데 부처인 줄도 모르고 이렇게 어리석게 괴롭게 사는 게 이게 얼마나 억울한가 하는 마음으로 내가 진짜 한번 보리심을 일으켜봐야겠다 하고 탁 그 마음을 내는 거 그것입니다.

그것. 그것밖에 없어요.

 

수행같은 것은 애지녁에 없습니다. 이 말은 제 얘기가 아니고 저만 이런 얘기를 했으면 여러분들이 저를 믿겠습니까?

임제 스님, 조주 스님, 황벽 스님, 마조 스님, 육조 스님 얼마나 좋아해요. 한국 사람들. 얼마나 조계스님 조계종

조계스님 선불교 좋아합니까  그 스님들 말씀한 얘기에요.

 

임제스님은 '닦아야 할 도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대는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깨닫는다고 닦는다고 하겠는가?

그대들이 지금 살아가는 있는 것이 무엇이 모자라며 무엇을 더 닦아서 보충한다고 하겠는가?

구할 수 있는 부처(佛)도 없고, 이룰 수 있는 道도 없고, 얻을 수 있는 法도 없다.'

 

황벽스님은

'오직 이 한 개 마음일 뿐 다시 얻을 것은 먼지 하나조차 없다 이 마음(心)이 곧 부처(佛)일뿐'

뭐하나 얻을 게 한 티끌조차도 없다는 말이죠. 망상으로 그렇지 않다라고 끝까지 기어이 붙잡고 있는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느냐? 수행을 통해서 그 망상 마음을 내려 놓는 게 아니란 말이죠

 

修行이란 것은 저 깨달음까지 히말라야 정상까지 가게 해주는 무언가 道具가 되는 겁니다.

이 고해의 바다를 건너가게 해주는 도구가 되는 거를 修行이라고 하는데

그래 修行 이것을 탈승자를 써서 小乘이다 大乘이다 무슨 一佛乘이다 그러지 않습니까?

타고 가야 되니까 타고 거기까지 가야 하니까 그런데 사실 타고 갈게 없단 말이에요. 이미 거 와 있기 때문에,

이미 到着해 있기 때문에 가고 오고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彼岸과 此岸이 있다 하지만 피안도 없고 차안도 없단 말입니다.

이 자리가 이 자리를 모르면 어리석은 예토라고 하는 거고 이 자리를 알면 정토라고 하는 겁니다.

언제나 우리는 정토에 있어요 예토에 있다가 수행을 통해 깨달으면 그때 정토로 가는 게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건 修行이 아니라 發心이란 말입니다. 發心.

그래도 수행을 하는 사람이 더 빨리 깨닫습니다. 수행 안 하는 사람보다. 왜 그럴까요?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왜 수행을 합니까?

깨달으려고 수행하자나요. 깨달으려고 열심히 수행하잖습니까?

수행을 대충 하는 사람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더 빨리 깨닫겠죠. 수행을 잘해서 더 빨리 깨닫는 게 아닙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마음이 간절한 거에요. 發心이. 간절한 마음인 겁니다. 보리심이 간절한 겁니다.

보리심이 꽉 차 가지고 완전히 꽉 차 가지고 이게 너무나도 꽉 찼을 때 그때 깨달음이 오는 거지 수행이 차 가지고

이건 수행, 공부 깨달음은 인과법이 아닙니다. 인과를 얻는 법이지.

이게 인과법이라면 이만큼의 수행을 하면 이만큼 깨닫는다 이게 있어야 되겠죠.

 

요즘 무슨 수련원이니 명상 센터니 하는데.. 우리나라 수십 개 있는 명상센터 이런 곳에서

30만원 내고 일주일 하면 일단계 끝나고 뭐 한달 하면 일단계 끝내고 한 오십만원 내면 한단계 이단계 끝나고

8단계까지 하면 부처를 뛰어넘고 뭐 어쩌고 저쩌고 부처를 뛰어넘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이 걸려가지고 찾아온다니까요 한두 명 찾아오면 제가 이런 말 안 합니다.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아.

그래가지고 지금 그 사람들이 막 證言을 하고 있어요 이 이 사람 이 교주라는 사람이 완전히 잘못 된 사람이다 하고

엄청 많습니다. 이런 경우. 요즘에 冥想을 사고 파는 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그런데는 단계가 딱딱 있습니다.

돈 딱 내고 그 단계 요만큼 딱 하면 대부분 그 단계를 딱 넘어간단 말이에여. 그러니까 성취감이 있단 말입니다.

단계를 넘어가는 성취감, 그런데 진짜 修行은 成就感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성취했는데 무슨 성취감을 찾습니까? 그런데 속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修行을 하는 理由는 發心을 强化시키기 위한 그 效果가 더 크단 말이죠.

사실 看話禪 話頭를 들고 話頭에 목숨 걸고 목을 멘다. 이거는 中國이 워낙 크잖습니까? 워낙 넓잖아요.

그리고 중국에 막 그 당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옛날에는 修行을 많이 했어요.

옛날에는 쉽게 말해 도지사급 이런 사람들이 다 수행을 했단 말이죠.

이런 사람들이 절에 가서 맨날 조사 스님들한테 법을 듣고 할 수가 없잖아요. 법문 듣고 할 수 없잖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집에서 수행할 수 없겠는가? 절에 한번 가려면 너무 멀고 지금 같이 차가 없으니까 가기도 힘들고

그러니까 내가 집에서 수행하고 일년에 한 두번 올 테니까 집에서 할 수 있는 방법 좀 없습니까?하고 하도 물으니까

어쩔 수 없이 大慧 스님이 집에서 할 수 있는 方法을 좀 완전히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방법을 한번

알려줄게 해 가지고 만든게 看話禪이지 實際로 看話禪이 이게 진짜가 아닙니다.그 이전에 祖師禪이 진짜지,

 

祖師禪이 뭐냐면?

스승이 법을 그냥 딱 가르쳐 주는 거에요. 거기엔 수행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사선 하는 대혜스님 1200년 1300년 돼서 나온 이게 간화선이고

600년 700년 禪의 黃金期라고 생각하는 그 때 나온 수 많은 임제니 마조니 무슨 혜능이니 그런 분들은

修行하지 말라고 했지 수행하라는 얘기 아무도 안 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한테 어리석게 수행이나 하고 있다고 핀잔을 줬지.

부처님 당시도 어떻습니까?

가섭존자도 부처님 옆에서 딱 붙잡아 놓고 일주일 동안 法을 가르쳐줘 가지고 탁 깨달았구요

다섯 비구도 마찬가지구요. 옆에서 부처님이 法을 가르쳐 줘서 탁 깨달았구요.

요즘에 그걸 보고 어떤 분은 대중견성운동 그러던데

신도님들 오백명 정도 와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 와 가지고 상당수가 수다원과를 증득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다함과를 증득하고 그 자리에서 法門 듣고 바로 증득 했습니다.

심지어 도둑떼가 찾아왔는데 부처님이 그 도둑뗴를 앉혀놓고 법문을 했는데 그 도둑떼가 일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한 경우도 있어요. 經典에 의하면. 그게 뭐 다 맞을지 모르겠지만. 왜냐면 經典도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건 經典도 文字 그대로 맞다고 하면 안 됩니다.

백년 이백년 지나가지고 부처님 말씀 이게 암송되다가 文字化가 됐으니까.

암송되는 동안 自己 生覺들이 경전에 좀 들어가 있기도 하고 그렇겠죠

그래서 重要한 것은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거든요. 부처님께서도 주로 法을 설했고 法을 설하고 탁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계속 法을 설할 수 없으니까 法을 설하지 않을 때는 저마다 앉아서 呼吸을 觀察하기도 하고.

呼吸을 觀察 한다는 게 뭐겠어요? 妄想 피우지 않는 마음의 演習이거든요. 相, 妄想,  가만히 있으면 계속 妄想 피우니까.

妄想 피우지 않는 마음의 演習을 시키기 위해서 呼吸을 觀察해라 몸을 觀察해라  느낌을 觀察해라 마음을 觀察해라 해서 이렇게 부득이하게 이런 방법을 알려 준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이 마음工夫라는 것은 깨달아서 아는 것이지 내 알음알이론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法門을 들을 때도 굳이 다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몰라도 괜찮은 게 아니라 알면 안 돼요. 알아도 되는데 알아도 되는 건 어느 정도 線까지입니다.

물론 불교工夫를 많이 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야 불교가 이렇게 좋은 거구나. 내가 직접 공부해야 되겠구나. 하는 방편으로는 아주 좋죠

그런데 이제 딱 내가 本質的인 工夫를 해야겠다 할 때는 알지 못해도 괜찮아요.

왜냐면 저도 옛날에 대학 다닐 때 선사스님들 쉽게 말해서 뭣 모르는 사람들 모여 가지고 욕하죠

저 뭐 저 카도릭 무슨 추기경 같은 분은 신년사 같은 거 발표하는데

이 한국의 선사 스님들은 왜 이렇게 어려운 얘기를 하느냐 이런 식으로 해서

저희도 막 많이 뭐라고 그랬죠 저희도 많이 욕했죠 물론 모르는 사람은 욕을 하는데

물론 方便은 必要 하다는 건 分明히 生覺하고 있습니다. 方便은 分明히 必要합니다.

 

그래서 方便으로 부처님 말씀을 설해줘야지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그 禪 얘기만 하면 갈 사람 거의 없습니다. 별로 없죠. 그리고 禪만을 딱 공부하는 스님들한테는 안 가죠

그러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참된 진실된 자리다 진리가 뭔가?(立處皆眞)

지금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眞理다. 이것이 바로 眞理다.

(죽비소리)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그것이 바로 眞理다. A4 용지 이것이 眞理요. 컵, 컵 뚜껑 이것이 眞理란 말이죠.

숨을 쉬는 이것이 眞理란 말입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이것이 眞理가 아닌 것이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깝깝해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질문이 뭐냐 하면은 그렇게 얘기하지 말고 좀 쉽게 알아듣게 얘기해주세요. 하고 질문을 한단 말이에요.

쉽게 알아듣게 답을 할 수도 있는데 그거는 알음알이 공부, 초등학생한테나 해주는 답이에요.

이제 마음工夫를 하려면 쉽게 알아듣게 해주세요 하고 질문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마음공부하는 目的이 그 目的이 아니니까!!! 쉽게 알아들으라고 하는 게 법문이 아니니까

막히라고 하는 게 법문이니까 꽉 막히라 하는 게 법문입니다.

 

그래서 스님들 그런단 말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었는데 '차나 한잔 해라' 이러거든

'진리가 무엇입니까?' '이건 A4용지네.' 이렇게 얘기한단 말입니다.

진리가 뭐냐고 물어봤는데 왜 뜬금없이 그 얘기를 합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바람 부니까 시원하구나 이렇게도 대답하고

노을이 아름답구나 이렇게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세요. 라고 하는 질문이

용납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거는 알아듣기 쉽게 애기해 달라는 거자나

그거는 알음알이로 기억할 준비를 하는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알음알이 六識으로 認識으로 내가 뭔가를 알아보겠단거 아니겠어요?

그건 진실된 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꽉 막혀야 됩니다.

도대체 뭔 소리야? 그런데 이게 이게 진리란 말야 (죽비 소리)그 소리를 듣는 이게 진리란 말야

눈으로 보는 모든 게 이게 진리란 말야.

여러분 시계를 봤단 말이에요  A4용지를 봤습니다. 죽비를 봤습니다. 부처님을 봤습니다. 저를 봤습니다.

다 다르죠? 그죠? 對相은 다 다른데 똑 같은 것이 변하지 않는 똑 같은 것이 한가지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마음거울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마음 거울.

 

거울은 세상 모든 걸 다 비치죠? 다 비치는데. 마음거울을 봐라! 그랬단 말이에요.

마음거울을 봐라 그랬단 말이에요. 마음거울을 보라는데 자꾸 그 마음거울 안에 비친 對相만 본단 말이에요.

비친 게 사람이 보이니까 이거 사람인데요. 그니까 스승이 가르쳐 준단 말입니다

마음이 뭡니까? 道가 뭡니까? 佛性이 뭡니까? 眞理가 뭡니까? 자꾸 묻는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마음거울을 가르쳐 줄 수 밖에 없죠 우리가 거울을 보란 얘기인데 마음거울을 보란 말인데

거울을 안보고 거울 안에 있는 나무도 보고 사물을 보고 화장대를 보고 이런단 말이죠

그 마음거울 안에 있는 對相들을 보지 말고 마음거울 그 自體를 보라는 말이에요. 그 마음거울 자체를!

마음거울 자체 그걸 봤을 때, 죽비를 보면 어떻고 나무를 보면 어떻고 뜰 앞에 잣나무를 보면 어떻습니까?

답답해야..됩니다. 여러분 지금 인상이 심히 찌드러 들면서 도대체 이거 뭔소린가 하는데 이게 아주 정상입니다.

왜냐면 몰랐을 때 안다 하면,마음거울 이건 증지소지비여경( 證智所知非餘境 )이니까 알음알이로 아는 境界가 아닙니다.

몰라야 되는 境界지, 이 모름이 오직 모를 뿐!!!

 

숭산스님께서는 이것이 무엇인가? 한단 말이죠.

진리가 무엇이냐? 이것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 (똑똑 소리) 내가 바로 진리다.

직지심불(直指心佛)이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心卽是佛) 그러니까 깝깝한거죠 난 지금 부처 아닌 거 같은데

진리가 무엇인가? 이게 진리다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깝깝할 뿐이죠. 해석 할 수 있습니까?

해석 할 수 있으면 잘못된 方便이죠

아 이 손가락을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이것이 이게.. 이게 진린가? 이게 진리이다. 이게 진리고.

발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것이 진리고, 해석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꽉 막혀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그게 진리라니까. 얼마나 깝깝해요. 답답하죠. 알고 싶은데 모르겠죠

그게 바로 타도입니다.그게 바로 타도. 그게 바로 뭡니까? 저기 저 의단입니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이게 진리라는데, 지금 이 자리 이게 여지 없이 진리라는데, 내이게 진리같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죠.

이걸 알았음 좋겠다. 알았음 좋겠다. 알고 싶다. 이걸 알아야 이게 바로 풀리니까

그게 보리심이란 말입니다. 발보리심 發心, 그러니까 그 깝깝함. 그것을 탁 가지고 있는 거에요 품고 있는 거에요.

거기 무슨 수행이 필요합니까?  그저 모를 뿐이지. 모르니까 모를 뿐이죠

 

수행으로 어떻게? 수행을 해야지만 더 많이 몰라지는 게 아닙니다.

話頭가 사실 잘못 돼 가고 있는 게 많은데요. 억지로 억지로 疑心을 막 强制로 분발시키게 만드는데,

강제로 분발시키게 만든다고 강제로 분발이 돼요? 發心이 돼야지만 궁금증이 일어나는 건데

發心이 안된 사람에게 그냥 손가락 왔다 갔다 하면서 이게 누가 하는거야? 찾아봐’하고

별로 찾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그걸 찾으라고 하니 잘 안될수도 있단 말이죠. 물론 되기도 하겠지만

그 根源이 뭐냐면 지금 이게 중요한게 아니고 發心이 되어 있느냐 안되는냐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한테나 話頭를 하라 해도 話頭가 잘 안됩니다. 發心이 되어 있는 사람한테 더 잘 된단 말이죠.

 

진성심심극미묘( 眞性甚深極微妙 )

眞性은 佛性을 얘기를 해요,. 불성 즉, 본래 성품, 참된 성품은 심히 깊고도 극히 미묘하다

불성이라는 것은 깊고도 미묘하죠 왜 미묘하고 깊을까요? 이미 완전하게 다 드러나있단 말이에요.

지금 여기 이 자리에 眞性이 다 드러나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佛性을 찾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깊고 깊이 있는 것처럼 그것을 찾지를 못한단 말이에요.우리 중생이 봤을 때 깊이 숨어 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이미 백퍼센트 다 드러났는데, 그리고 극히 미묘합니다. 극히 미묘하죠.

눈뜨고 보이는 게 모두 佛性이라고 하는데 우리 눈에는 그 불성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걸 내가 이걸 한번 찾아봐야 되겠다 했는데 있는게 아니라고 하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얼마나 미묘한 것입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묘() 자를 많이 써요 미묘 묘하다

空이라는 거 空이라는 건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다 라는 얘긴데, 그 안에 모든 可能性이 다 들어 있거든

참된 性稟은 극히 미묘해서 극히 아주 깊고 미묘하다. 참성품이 드러나 있지만 드러나 있는걸 우린 모른단 말이죠.

뭐라고 설명할 수 가 없어요. 미묘 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참性稟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손바닥 안에 우주전체를 드러낼 수도 있다고 하고

한 티끌 속에 우주전체가 담겨 있다고도 하고

티끌보다 더 작은 거지만 우주 전체보다도 더 큰 이것이 이 자리니까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까? 미묘하다 할 뿐이지

도대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것 이 자리를 이렇게 진성심심극미묘( 眞性甚深極微妙 ) 라고 표현했단 말이에요.

해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미묘하니까 묘한 걸 어떻게 해석하려 해봐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불수자성수연성( 不守自性隨緣成 )이란 말이죠.

自性이 自性을 따르지 않습니다. 自性은 自性이 없으니까 佛性은 自性이 없어요. 딱히 定해진 性稟이 없어요.(無有定法)

佛性은 定해진 性稟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佛性이라고 하는 거에요.

佛性은 큰 거 작은 거 이런 거 없습니다.불성은 어떤 특정한 성품이 있으면 그걸 주기 쉽겠지만 특정한 성품이 없다니까요

그니까 수행 많이 한 사람이 더 빨리 깨닫습니까? 그런것도 없구요. 어린아이는 더 늦게 깨닫습니까? 그런것도 없구요.

나는 수행력이 작은데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잘못됐다고 하긴 좀 그렇고 방편에 너무 치우쳤던 말이 뭐였냐면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수행을 잘 해야지만 수행자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공부해 왔단 말입니다.

오래 앉아 있을 줄 알고, 삼천배 잘하고, 오래 수행을 잘 하는 사람이 수행력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 수행력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배웠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錯覺입니다 錯覺 完全한 錯覺이에요.

제가 한 얘기가 아니고 마조 임제 육조 스님이 그랬다니까요

 

그럼 이 錯覺 속에서 벗어나야 된단 말이죠.

自性이 있으면 그게 可能할 거에요 特定한 性稟이 있으니까 그게 因果法이라면

어떤 特定한 努力을 기울이면 그 結果를 얻는 게 可能합니다.

그런데 이건 자성이 없어요. 정해진 성품이 없습니다.

그 어떤 정해진 성품만 없는 게 아니라 있지도 않습니다 性稟 이란 건.

진리라는건 없어요 깨달음도 없어요 불성도 없고,

다만 어리석은 錯覺으로 妄想을 피우면서 이 世上에 다 있다라고

妄想으로 다 있다고 錯覺하는 어리석은 衆生이 있을 뿐이지

망상으로 만들어 놓은 이것만 깨부수면 깨부수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텅~빈 空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空이라고 빌空자를 쓴단 말이죠 眞理의 性稟을 텅~비어있는 그 自體를.

自性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떠냐면 불수자성인데 자성을 따르지 않는데 수연성이다.

다만 緣을 따를 뿐입니다.연을 따라 이루어질 뿐이에요. 因緣을 따라서 이루어 질 뿐입니다.

이게 왜 可能하겠습니까?

自性이 있으면 特定한 性稟이 있으면 예를 들어 크다 하는 성품이 있음 큰 것만 만들어내겠죠.

잘났다 라는 성품이 있으면 뭘 만들어내도 세상에 다 잘생긴 사람 잘난 사람만 만들어내겠죠.

깨달음이 좋으면 깨달음이 성품이면 다 깨달은 사람만 만들어내지 왜 중생들 만들어 내겠습니까?

자성이 있으면 정해져 있으면 우리가 이런 질문 많이 하자나요. 완전한 하느님이라면 그러면 왜 중생을 만들었겠습니까?

완전한 하나님만 만들면 되지 라고 이렇게 질문하듯이

하나님이 實體로 있다면 自性이 있는 하느님이라는 存在가 딱 있다면 可能한 질문이죠

하느님이라는 自性이 있다면 可能한 말이죠..

불교에서는 그 질문은 성립이 안됩니다. 자성이 없는데. 자성이 없으니까 다 자성이 없이 비어 있어요

 

그런데 비어 있다는 것은 方便으로 해석을 해 본다면 비어 있다 라는 것은 텅~빈 充滿이라고 하듯이

텅~비어있기에 그 안에 가득 찬 충만입니다. 모든 가능성을 다 내포하고 있는 충만입니다.

텅~비어 있지만 모든 가능성이 다 포함된 비어 있음입니다.

色卽是空 하듯이 空卽是色 하듯이

이 모든 색은 전부 모두 다 공이지만 공은 다시 색이란 말입니다.

공이 색인 이유는 隨緣性이기 때문에 연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됐음 좋겠다 저렇게 됐음 좋겠다 집착하겠죠

내가 부자가 되면 좋겠다 잘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집착한단 말입니다.

근데 自己 執着이 없으면 自性이 없으면, 나는 잘 살아야돼 난 부자가 되야 해 난 잘 생겼어야 해 이런 집착이 없으면

자성이 없으니까 연을 따를 뿐이죠 굳이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단 말이죠.

깨달은 道人이 全世界  一等 가는 富者가 되려고 氣를 씁니까? 기를 안 쓴단 말이에요

그냥 인연 따라 응할 뿐이에요. 인연 따라 응할 뿐. 중생들이 찾아와 법을 알려달라면 법을 설할 뿐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뿐 그 무었이든 지금 그 자리에서 그 인연 따라 할 뿐이지 특별한 건 원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부자를 원하지도 않고 가난을 그렇다고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지금 그 자리에서 그 인연 따라 應했을 뿐이지 그게 自性이 없으니까.

 

불교는 불교를 공부한 사람은 가난해야 돼?이러면 이것은 가난하다는 自性에 빠져 있는 겁니다.

부처님은 가난하지 않았죠? 부처님  당시에 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마어마한 절들

그니까 特定한 相을 가지고 부처님을 生覺하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자성이 없어서 인연에 따라 응할 뿐입니다. 그저. 인연 따라 응할 뿐

여러분들이 내가 뭐가 되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아님 내가 이 회사에서 성공하고 싶다

성공해도 좋습니다. 부자가 되어도 좋습니다.자성이 비어 있다는 걸 알면.

즉 성공을 하려면 하고 부자가 되려도 해도 좋단 말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걸 하십시요.

연을 따라 하십시요 인연이 나한테 인연이 딱 왔어요.

이 회사가 갑자기 잘 되고 내가 진급을 했고 이 회사가 인연 따라 인연이 왔다라는 건

내가 이게 될까 안될까 하는데 억지로 하는 일 이건 인연 따라 하는 게 아닙니다.

執着이고 慾心입니다.

 

신기하게 인연을 딱 따를 때는요 인연이 딱 올 때는요 신기하게 주변 인연이 착착 들어맞는 인연이 딱 생깁니다

내가 힘들이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착착착 들어맞아 줘요 어떤 사업을 확장해서 잘 되신 분 하는 얘기가 그거에요

신기하게 그 때는 그 전엔 죽으라고 사업을 확장하려 해도 안되더니 그 해는 신기하게 그 해 따라서 이 일만 잘 되는

게 아니라 뭐든지 잘 풀리고 갑자기 일과 관련된 신기한 인연들을 만나고 심지어 그때는 이상한 짓을 해도 자꾸

도움이 된단 라는거죠. 맨날 가던 술집을 안가고 어떤 사람이 술 한잔 하자 그래서 이상한 술집을 갔는데

거기서 만나서 우연히 동석을 하게 됐는데 같이 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하자 그랬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라고 맘에 안 들면 좀 있다 집에 가야지 하고 합석을 시켰는데 그 사람이 귀인이 돼 가지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결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온갖 인연이 나에게 착착 찾아 온단 말이죠

인연이 탁 되려면 인연을 연을 따를 뿐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연을 따를 뿐이 아니고

내 집착으로 내 고집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고 또 부자가 되려 하고 더 좋은 집 더 좋은차를 사려고 하고 

집 살때도 이억짜리 집 사면 딱 내 수준인데 더 좋아 보인다고 삼억 사억 오억짜리 사려고 기를 쓰고

자동차도 천만원짜리 사면 되는데 이천만원 삼천만원짜리 온갖 핑계를 핑계 삼아 그걸 기를 쓰고 산다면

그건 연을 따르는게 아니라 욕심을 따르는 거고 망상 분별을 따르는 거죠

 

불수자성수연성( 不守自性隨緣成 )이기 때문에 여러분 또한 자성이 없습니다.

연을 따라 살겠다 라는 마음 이게 바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연을 따라 살겠다.

내가 고집 부려서 뭔가 살지 않고 연을 따르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자가 될 인연이 자꾸 오는데 나는 청빈하게 살아야 돼 난 수행을 하는 사람이니까 청빈하게 살아야 돼

라고 하는 이것도 執着입니다. 가난하다는데 집착한 거에요. 자성이 없는데 가난하고 부자가 따로 뭐가 있습니까?

인연을 따를 뿐이지. 인연따라 거기에 應해줄 수 있어야 된단 말이죠  최선을 다해서 應해주는 겁니다.

사랑할 땐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일을 할 땐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놀땐 최선을 다해 놀고.

다 노는데 난 수행을 해야돼 다 재밌게 노는데 혼자서 수행한다고 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

나는 채식을 해야돼 남들 다 고기 맛있게 먹고 있는데 채식 혼자 조용히 하던가

아 이건 뭐 안 좋은거 환경호르몬 덩어리고 안 좋은 거야 그런 말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불교는 극단적인 채식 주의가 아닙니다. 극단적인 채식. 불교에서는 극단적인게 하나도 없어요.

因緣에 應할 뿐이지, 주는 대로 먹을 뿐이지 탁발의 精神, 구걸하는 下心의 精神은.

 

고기 먹지 말라는건 양무제가 만든거에요

스님들이 고기 안 먹는게 난 부처님을 따르지 않고 양무제를 따르겠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왜 신도님들 스님 고기 먹는다고 뭐라고 합니까? 부처님 당시도 고기 먹었단 말입니다.

주는대로 먹는게 법칙이었어요 인도는 다 고기 먹었어요. 다 당연히 먹었습니다. 

연을 따르는게 중요하지 거기에서 뭔가 내 고집을 내세우고 그럴 필요 없단 말이에요.

뭔가 定해진 實體가 있으면 그걸 따라야죠. 무조건 딴 사람 다 노(no)해도 나는 예스(yes) 해야죠

그런데 자성이 자성을 따르지 않고 인연 연을 따르란 말입니다.

남들이 노해도 분위기를 따라서 '아휴 좋습니다.' 그렇게 따라가 줄 줄도 알아야지요

 

그래서 인연을 따르게 되면 그 인연에 應해주면서 그 인연 따라 自然스럽게 사니까 괴로울 게 없어요.

물 흐르듯이 살 수 있어요. 진짜 힘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돈 많은 사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해요 야 저 사람은 쟤는 힘 있으니까 윗사람에 줄도 많고 뭔가 파워가 있으니까

쟤는 어느 보직을 받아도 요직에 가 있더라 쟤는 언제나 가도 좋은데 가고 힘있으니까 좋은 자리에 언제나 있어

쟤는 참 힘 있는 사람이야 그거 힘 있는 사람 아닙니다. 언젠간 그 힘도 그 줄도 끊어지게 돼 있어요.

진짜 힘 있는 사람은 뭐냐면  이 사람은 어따 갖다 놔도 거기서 행복하게 잘 살 사람이야

강원도 양구에 발령을 갖다 놓든 춘천에 갖다 발령을 내든 강원도 골짜기에 갖다 놓든

부산이나 호남에 갖다 놓든 어디에 갖다 놔도 거기에 즐겁게 재미 있게 살 사람이야

그러면 윗사람이 얘가 맘에 안 들어서 어디다 확 내치고 싶어요 내치고 싶은데 그런데 내쳐지지가 않는거야

어디다 내쳐도 거기서 행복하게 잘 살 사람이니까 강원도 산골짜기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면서 살고

서울에서 일 많은거 주면 내가 또 인연 따라 일 많은 거 열심히 일하면서 내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고

뭐든지 인연에 應하고 살면 괴로울 게 없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如如할 뿐이지

 

그래서 이 固定된 自性을 執着하면 괴로울 수 밖에 없어요.

나는 이래야 돼 하는 건 自性에 執着하는 거예요

난 이렇게 살아야해. 난 반드시 진급해야해 나는 반드시 잘 돼야해. 내 자식은 반드시 좋은 대학 가야해

이 모두 虛妄한 妄想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정해놓은 어떤 틀, 이대로 살아야 돼

내가 생각해 놓은 내가 만들어 놓은 나를  족쇄를 채우는 나를 괴롭게 만드는 괴로움의 울타리 일 뿐이지

그건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고정된 성품이 어디 있어요 인연따라 계속 바뀌는 걸요

어차피 우리는 다 수연성 인연 따라 바뀌고 있잖아요

아버지란 고정된 성품이 어디 있어요?

자식에겐 아버지지만 아버지에겐 자식이고, 친척도 됐다가 친구도 됐다가, 어디 밥 먹으러 가면 손님이고

회사가면 윗사람도 되었다가 아랫사람도 되었다가, 차타면 승객이고, 계속 인연 따라 바뀌는 거잖아요

물이 自己 固定된 性稟을 執着하면 되겠습니까?

집착 안 하니까 물도 되었다가 비도 되었다가 우박도 되었다가 눈도 되었다가 혈액도 되었다가

지하수도 되었다가 수증기도 되었다가 그 인연 따라 계속해서 바뀌고 바뀌는 거죠

그러니까 물은 화를 내지 않잖아요. 나는 이번엔 우박이 되고 싶은데

왜 날씨가 좋아서 내가 비가 되는 거야 하고 울지 않죠 그냥 인연 따라 내릴 뿐이지

 

화내는 건 인간들 뿐이란 말이죠!!!

妄想으로 만들어놓은 自性의 틀이 딱 定해져 있으니까 그대로 안되면 화가 난다고 生覺하는 거에요.

그래도 좋고 안그래도 좋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緣을 따르는 사람  自性이 없으니까 여러분 인생에서 반드시 이래야 해 반드시 저래야 해 하는게 없으면

인연을 따라 갈 뿐이니까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 있어서 좋고 자식이 없으면 자식이 없어서 좋고

결혼하면 결혼해서 좋고 결혼 안 하면 결혼 안 해서 좋고, 자식이 서울대 가면 가서 좋고 서울대 못 가면 못 가서 좋고

왜 서울대 가야만 좋습니까? 못 가도 좋지, 이러면 이래서 좋고 저러면 저래서 좋은 게 本質입니다

다만 이러면 안된다고 生覺하는게 헛된 내 妄想일 뿐이지

망상을 굴려서 괜히 괴로워하지 마시고 인연 따라 나투게 되면 모든 인연에 應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삶이 自由로와지는거죠 무엇이든 못할게 없고 무엇이든 고집할 것도 없고

여러분 수행자는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자유로운 사람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집니까? 固定된 執着 自性이 없어야 합니다.

 

自性이 本來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알면 그냥 연을 따를 뿐이지 과도하게 집착할게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뭐 괴로울 게 있어요? 없어요. 하면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하면 되고

중간에 하다 말게 되면 중간에 하다 말면 되고, 그래서 남들이 욕하면 욕 없어 먹음 되고

그건 그 사람 맘이니까 욕하는건 그 사람 마음이고

난 들을지 안 들을지 그것만 결정하면 되고 거기 휘둘릴지 아닐지 그거만 결정하면 되는 거죠

가난한 거 엄청난 공덕이 있습니다. 가난할려면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부자도 괜찮고 다 괜찮습니다

세상은 다 괜찮은 일만 일어나요 다 날마다 좋은 일만 일어납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하는 이유가 날마다 좋은 날이니까 날마다 좋은 날 되라고 말하는 거에요

거짓말로 부처님이 그런 얘기  하는거 아니고 날마다 해피엔딩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엔 해피엔딩밖에 없어요  매 순간순간이.

 

내가 망상으로 이건 해피엔딩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니까 괴로운 것일 뿐이죠

불수자성수연성( 不守自性隨緣成 )만 하면, 因緣을 따르기만 하면 그거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언제나 因緣 따라 自由롭게 살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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