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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3강

장백산-1 2014. 12. 24. 13:51

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3강  |영상법문 녹취록

무위행 |2014.12.24. 10:37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41   


1. 네 반갑습니다!

아! 요즘 그 가을 하늘이, 아! 여름 때 하늘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아주 투명하고, 야! 가을 하늘이 이렇게 

파랗게 참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하루하루 늘 느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地球라는 그 行星이, 야!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데 정말 이렇게 잠시 고개 돌려서 하늘을 보고 숲을 바라보고 하면 정말 이렇

게 감동을 우리에게 언제나 선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언제나 우리에게 선물을 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이 한 生을 살면서 삶의 이 아름다움, 이 大自然의 선물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늘 곁에 두지 

못하고, 늘 언제나 있는 것인데 곁에 두지 못하고, 머릿속의 삶, 생각속 삶, 환상의 삶을 사느라고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지근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 앞에 드러나 있는 백퍼센트 完全하게 이렇게 이 경이롭게 드러나 있는 이 

세상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는 이 머릿속의 生覺으로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生覺 속의 헛된 虛妄

한 人生을 사느라고 이 진짜 人生을 포기하고 사는 거거든요. 근데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 삶은 

진짜 경이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데, 아무 문제가 없는 法界라고 말 할 수 있는 그야말로 眞理 그대로

의 아름다운 世上인데, 이 分別 煩惱 妄相 속에, 虛妄한 生覺 속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삶은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恒常 是非 分別 比較 判斷 解釋으로 삶을 혼돈으로 

몰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진짜 삶,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걷어차 버리고, 머릿

속에서 生覺으로 만들어 놓은 이 虛妄한 허구적인 환상의 삶을 살고있는 것이 참 얼마나 虛妄한 人生인

가? 이런 것들을 요즘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보면서도 더없이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2. 지난 시간에 『법성게』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좀 부연을 

하면 ‘眞性’이라는 참된 性稟은 아주 깊고도 미묘해서 不守自性隨緣成이다. 自性을 따르지 않고 연을 따

라 이룬다. 이 말은 진성은 심심해서 극미묘하다. 그래서 자성을 따르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룰 뿐이다. 이 

말에 대해서 本來性稟이라는 것은, 本來, 이제 性稟이라는 것은 事實은 없죠. 本來性稟이라는 것에 이름 

붙이고자 하니까 그냥 本來性稟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그게 딱 定해진 어떤 모양을 가지거나, 특

성을 가지거나, 특색을 가진 우리가 어떤 잡을 수 있는 뭔가가 아니다. 그러니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어

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自性을 따르지 않는다고 한 거죠. 自性이 없으니까 自性을 따를 뭔가가 없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固定된 自性이라는 게 없으니까  텅~비어있으니까, 텅~비어 있으니까, 空하니까,

自性이라는 것이 텅~비어 있으니까  내 自性을 固執할 어떤 理由도 없는 겁니다. 내 自性을 固執할 理由

가 없고, 固執할 만한 自性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緣을 따라 이루는 길밖에 없다.

 

우주법계의 因緣에 따라서 그냥 나투는 것 밖에 없다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런 인연이 오면 이런 인연을 

나투고, 저런 인연이 오면 저런 인연을 비춰주고,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인데 그렇게 無窮無盡한 

因緣으로 나타낼 수 있는, ‘나타낸다’ 이 말을 불교에서는 ‘나툰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나툰다.’ 이렇게 

나툴 수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自性이 미리 定해져 있으면 나툴 수가 없습니다. 自性이 定해져 있지 않

고 텅~비어있기 때문에 완전히 텅~비어 있어서 그 속에 무엇이든지 담아 비춰줄 수가 있잖아요.

 

근데 내가 꽉~찬 뭔가를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 더 담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텅~비어있어

야지만 그 무엇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고 담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뭐 우리가 좀 알기 쉽게 표현

을 한다면 이 텅~비어있는, 텅~빈 眞性 自性 法性의 그 世界를 텅~비어있다 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야

말로 뭐랄까 완전히 텅~비어있지만 無限한 可能性으로 가득 차 있는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無限

한 可能性으로 가득 차 있는 이런 어떤 상태인 겁니다. 그게 이제 텅~비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상태인 거

죠. 그러다보니까 이 緣을 따라 이루어진 이 世上 모든 것은 固定된 實體가 아니죠. 그냥 因緣 따라 잠시 

잠깐 그림자(幻影)으로 나타난 것일 뿐 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진짜배긴 아닌 거죠. 그렇지만 그 진

짜배기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야아! 緣을 따라 나툰 건데 그게 뭐가 진짜냐 그런다고 하면 우리는 돈 벌 필요도 없고, 먹을 필요도 

없고 한 대 뺨을 한 대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아야 되겠죠.  근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緣을 따라 나

타나 있는 나투고 있는 이 現實世界, 이 生生한 現實, 이 삶을 우리는 살 수 밖에 없고, 이런 生生한 現實을 

사는 것을 通해서 깨달음, 진리를 터득하는 거지, 생생한 현실을 거부하고 또 다른 깨달음만을 얻겠다는 

것 이게 불교가 아닙니다. 그 깨달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 生生한 현실의 緣을 따라 이루어져 있는, 나투

어져 있는, 이 보이고 들리고 맛보아지는 모든 現實 自體를 通해서, 이 現實 自體가 바로 眞理인 것이지,

이것을 거부하고 따로 갈 수 있는 곳이 진리가 아니다.


3. 그래서 事實은 이 現實을 놓아두고 따로 어디 절에 出家하거나 이것 또한 하나의 定해진 性稟이 아닌 

거예요. 쉽게 말해서, 깨달음은 스님에게만 있다, 뭐 남자에게만 있다, 이건 그냥 방편으로 그냥, 그냥 이

렇게 했던 말이지 진짜 참 自性의 자리에서는, 진짜 이 깨달음의 자리에서는 一切 分別이 없는데, 남자다 

여자다 나다, 너다 라는 一切 分別이 없는데, 거기에 무슨 뭐 남녀가 있고, 승속이 있고, 이런 게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냥 참 性稟 그 자리에서는 아무런 差別도 없이, 아무런 分別도 있을 수가 없는 거

죠. 그러니까 따로 이 現實을 버리고 事實은 出家할 필요까지도 굳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 本質에서 본

다면 뭐~ 고요히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眞性은 아주 깊고도 미묘하다고 했는데, 그 아주 本來的이라고

도 했단 말이에요. 本來 寂滅이고 고요한 性稟을 찾아서 無門關을 들어가서, 뭐라 그랬죠? 그 3년 동안 

그 무문관에서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있거나, 아니면 말을, 이것 또한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 '묵언' 이렇게 

써 붙여놓고, 몇 년 동안 말을 안 하거나 이것 또한 하나의 方便입니다.

 

그걸 하면 다 훌륭하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건 하나의 方便일 뿐입니다. 뭣 하러, 사실은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이 生生한 現實을 버리고 어떤 外的인, 어떤 寂滅이 있는 곳을 애써서 찾아갈 필요가 사실은 

없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寂滅의 자리로 그대로 말하고 生覺하고 行動하면서 同時에 말도 하지 않고 

生覺도 하지 않고 行動도 하지 않는다 라는 그 理致를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걸 딱 끊어버리고 또 다른 

행복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 瞬間 이 자리에 드러나 있는 건데 지금 이 자리

를 버리고 또 다른 곳을 찾아 가려는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眞理를 거부하고 또 다른 걸 찾으려고 

하는 妄想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 현실로 나투어져 있는 인연 

따라 나투어 있는 이 현실세계를 아름답게 꽃 피울 줄 알아야 됩니다.


4. 직장인은 직장인 대로 주부는 주부 대로 아이들은 아이 대로, 돈을 버는 사람은 돈을 버는 사람 대로,

사업가는 사업가 대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 대로, 저마다 自己에게 주어진 삶의 狀況 

속에서 隨緣性을, 연을 따라 이룬 자신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우린 이 세상에 기여하고, 이 세상에 뭐랄

까 이 빛을 뿜어내고,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일부가 온전히 되었을 때, 그것은 이 세

상 전체가 되는 겁니다. 이 우주 전체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다운 진리를 꽃 피운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

다운 법계의 진리를 꽃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自己로써 피어난 自身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불교를 계속 공부를 해보니까 불교가 좋구나. 내가 이 불법을 공부해야지. 내가 

직장도 그만두고 자식도 내버리고 출가를 해야 되겠구나 하는 이것만이 眞理라고 生覺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저마다 자기다운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지, 남들은 저렇게 하니까 참 좋구나. 나는 왜 저렇게 안 될까 하

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남들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그들를 쫒아가지 못해 답답해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못나면 못난 대로,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대로, 그냥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緣을 따라 이룬 이것 自體는 하나의 ‘一眞法界’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의 

진실한 법계, 진리의 세계로써 나의 삶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 지금 일진법계인 이 연을 따라 이룬 

이 현실세계를 거부하고 또 다른 眞理를 찾는다? 그런 것, 그런 眞理는 따로 없단 말이죠. 그래서 이제 

이러한 참된 진실을 알아야 되는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꽃 피우고 있는 우리 삶의 어떤 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어떤 뭐 바라는 것들이 있을 수 있겠죠. 自己다운, 自己를 가슴 뛰게 하는 뭔가가 

누구나 있단 말이죠. 자기다운 자기의 가슴을 뛰게하는 그게 나다운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길

인 겁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돈을 벌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고, 또 학

생들에게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 싶거나, 자식을 정말 잘 키우는 어머니, 아버지가 되고 싶거나, 나름

대로의 自身의 어떤 삶의 方式이 있는데,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서 그것을 무조건 다 포기해야 되느냐?

뭐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단 말이죠.

 

그래서 自己다운 삶의 방식으로 꿈을 피울 수 있습니다. 다만 過度한 執着과 慾心을 가지지 않은 채로. 

과도한 집착과 욕심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隨緣性으로써 꽃 피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가능합

니다. 남들은, 야! 저 사람은 원래 돈도 있고, 원래 능력도 있으니까, 백도 있으니까, 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지만 나는 능력도, 돈도, 백도 없으니까, 저 자리에 못 올라간다?  이거는 정말 어마어마한 虛妄한 

妄想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 내 경쟁자인 A라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그 사람은 회사에서 사장님이 든든한 백

이기도 하고, 집에 벌어 놓은 돈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고, 정치인에서부터 온갖 백이 많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없다. 그래서 저 사람은 나보다 잘 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이건 엄청난 錯覺입

니다. 왜 엄청난 錯覺이냐 하면은 그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힘을 가진들 그 사람과 나는 참性稟 자리에서

는 아무런 差異도 아무런 差別도 없습니다 分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우리의 삶의 텅~빈 본바탕

은 그 本來, 本來의 자리거든요. 모든 존재의 텅~빈 본바탕은 본래 진성의 자리이지 겉에 드러난 이 현상 

세계가 아닙니다. 겉에 드러나 現象世界가 아무리 잘 난들, 요즘 언론 뉴스 같은 것 보면 금방 알잖습니까?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그 요즘 말로 한 방에 훅 가데요. 뭐 한방에 그냥, 뭐, 그냥, 확 가버리면,

아무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아무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뭐 백이 있고, 뭐가 있다?

이거는 아무런 그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힘이 아니다.

내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내 意識이 드러난 虛妄한 夢 幻 泡 影 露 電일 뿐인데,

바깥에 있는 허망한 게 나에게 든든한 백이다? 이건 진짜 백이 아니란 말이죠.

더 든든한 내 안에 분명한 中心이 내 안에 分明한 힘의 源泉이 내 안에 있는데

이 自稼發電所가 언제나 내 안에 있는데 바깥에 있는 발전소에서 언제나 전기를 끌어와야지만

전기가 나는 줄 알고 계속 이 발전소, 저 발전소 쫓아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줄을 대려고 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란 말이죠, 우리는.

 

내 안에 딱! 이 結合을 하게 되면, 내 안에 자가발전소가 온 우주 전체와 連結돼 있기 때문에,

우주법계 전체와 連結돼 있기 때문에. 뭐 가지고서? 마음 가지고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一切唯心造, 마음 하나 가지고서 어떻게 隨緣性을 할 건지, 내 인생에 인연을 따를 건지를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도 될 수 있고, 뭐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으면

그것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단 그 바램이 純粹했을 때, 個人的인 欲望과 慾心과 執着이 아니었을 때,

그것은 더 이루어지기 싶고, 또 이 개인적인 집착과 욕망이 아닌 사람이라면 그 무엇을 원하든

돼도 상관없고 안 돼도 상관없겠죠. 왜냐하면 내 原來 願力 自體가 利他的인 마음이었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기 때문에, 아상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千億을 벌겠다. 괜찮단 말입니다.

 

다만 벌면 좋고, 못 벌면 말고. 벌면 그것가지고 이웃과 나누고 정말 힘든 사람과 나누고 정말 필요한 곳에

내가 함께 나눠 쓰면 되니까 그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안 벌어진다? 그럼 그건 상관없죠. 그 千億은

空虛한 건데 虛妄한 건데 거기에 뭐 내 목숨 건 것도 아니고 다만 내 因緣이 事業家이니까

나는 사업을, 사업이 내 인연이니까. 이걸 내가 기업을 할 꺼면 한 번 잘 해보자 하고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

그렇게 원을 세울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러나 이 隨緣性, 이 因緣을 따라서 이룬 모든 것은 固定된 實體가 아니 虛妄한 것이기 때문에

虛妄한 執着을 할 필요가 없다라는 걸 알고 하는 겁니다. 알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실패가 없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사업에 성공하겠다. 그러나 성공 못 하면 그냥 말고죠. 안 해도 괜찮은 거니까.

아! 그것은 내 인연이 아니구나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겠다 그러다 아니면, 아! 내 인연이 아니구나. 난 여기까진, 요까진 아닌가보구나!

그럼 딴 사람이 그 일을 해야 되면 그 사람에게 양보할 수도 있고. 이렇게 살면 연을 따라 삶을 살지언정

그리고 원력을 세우고 뭔가 꿈을 펼치고, 뭔가 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쫓아가고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그 일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그러나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은 거예요.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했을 때 내 가슴이 뛰고 내가 열정이 넘치고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겁지 않습니까?

그것은 곧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우주법계에 희망과 꿈과 열정과 기쁨과 이 아름다운 에너지를

우주법계로 선물해주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나다운 방식으로 우주법계에 기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쁨을 느끼고 열정을 느끼고 어떤 행복할 때 그럴 때

이 가슴속 에너지는 나 혼자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와 共鳴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5.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 음~ 모르겠습니다. 지금 같으면, 지금 내가 뭐 히말라야를 가라 그러면,

지금 같으면 뭐 굳이 안가도 상관없습니다. 가도 되고 안가도 괜찮아요. 그렇게 막 뜨거운 열정으로

막 반드시 가야 되겠다 이런 건 없습니다. 이젠 히말라야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뭐, 뭐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데. 그 당시는 정말 제가 히말라야에 막, 이게 열정이 막 너무 뜨거워지는 겁니다.

그 순간. 그러니까 힘든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제가 그쪽 히말라야에 가기 전에 전문가 

분들에게 몇 가지를 물어봤어요. 안나푸르나를 올라갔다 와서 한 일주일 쉬었다가 바로 에베레스트를 

또 가고, 고쿄까지 갔다 오고 이게 가능 합니까 이랬더니, 전문 산악인 이냐 이래서, 아! 전문 산악인이 

아니다 이랬더니 불가능하다. 이거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쉬엄쉬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때 또 제 가슴이 뛰고 아무런 하나 어려움 없이 고산증세 

하나 없이 뭐 아무런 저것 없이 편안하게 그 모든 걸 다 하고 왔거든요. 이 산악인들도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때는 제 마음속에서 제가 제 스스로 알고 있었다 할까요? 제 스스로 제 안에서 아! 이것은 되는 것이구

나! 그 뭐 안 되면 마는 거니까. 안되면, 올라가다가 안되면, 내려오면 되는 거니까. 그니까 그때는 정말 

제가 가슴이 뛰고, 그 순간 한 걸음 한 걸음이 발걸음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저를 행복하고, 기쁨에 넘치고,  

정말 제 가슴속에 뭔가 아름다움같은 것들이 항상 있었고, 가득 했었거든요.

 

근데 그 瞬間, 내 혼자 히말라야 갔다 온 것이 끝나는 것이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란 말

이죠.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어떤, 나의 어떤 根源이 이끄는 그 길로 내가 집착 없이 가고 있을 때,

열정과 에너지와 기쁨을 가지고 가고 있을 때,  그 때 우린 그것을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에 기여하고 있

는 것이고, 우주법계와 함께 나누고 있는 겁니다.  갔다 와서 책을 써가지고 그걸 사람들이 읽어야지만 나

누는 것이 아니다. 그건 뭐 곁가지로, 그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죠.


6. 그래서 이것처럼 事實은 내가 바로 宇宙 全切이기 때문에 내가 기쁘고 열정이 넘칠 때, 우주, 법계, 

진리의 세계, 이 세상이 함께 기쁘고 함께 웃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린 남들에게 뭔가를 얼

마를 줘야지만 기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내가 내 중생 卽, 내 煩惱 妄想 分別心 生死心 

生滅心을 救濟할 때 宇宙法界가 함께 구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수연성(隨緣性)으로, 여러분은 

自性이 없어요.본래부터 이미 自性이 定해져있지 않았습니다. 아, 나는 원래 능력이 없으니까 요만큼 

밖에 안돼! 이런 건 잇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不守自性이니까 自性이라는 게 없으니까 自性을 지켜

서 따라갈 일이 없단 말이죠. 緣을 따라서 그냥 이루어 내는 겁니다. 언제나 이루어 낼 수 있단 말이죠.

緣을 따라 뭐든지 할 수 있다. 내가 不可能한 것이 있다 라고 生覺하는 건 내 머릿속에서 나라는 自性을 

요만큼만 限界지어 놓는 겁니다. 나는 요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야 라고. 나라는 存在를 이렇게 限定짓는 

自性이 딱! 있다 라고 마음 속에서 생각으로 制限시키는 겁니다. 本來부터 없는 自性을 내 생각으로 있

다 라고, 나는 요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限定 할 때 宇宙法界는 그냥  예스합니다. 오케이 

합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반대를 안하니까. 내가 난 요것밖에 안 됩니다 라고 限定시켜도 우주법계는 내가 

한정 시킨 그 생각 그냥 그대로 힘을 실어줍니다. 나를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으로. 반대로 나는 그 

무엇도 다 할 수 있고 그 무엇도 다 될 수 있는 사람이다고 마음을 먹으면, 생각을 하면 우주법계는 

오케이 하고 그걸 그대로 또 힘을 실어 준단 말이죠. 이 우주는 뭐든지 우주는 우주 자체적으로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말고 하는 게 없어요.

 

우주는 언제나 백프로, 언제나 백프로로 우리에게 힘들 실어주고 있는데, 그걸 내가 내 분별 번뇌 망상

으로 난 요것밖에 안되고 난 이만큼만 할 수 있고, 내가 이 망상으로 내가 제한시켜 놓은 거에 불과한 

것이 거든요 자신의 어떤 힘과 능력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나는 내가 그것을 굳이 막 뭔가 사회에 기여

를 하고,뭔가 회사를 하고, 돈을 벌고, 이런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혼자 고요히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음으로써 그래서 내가 농사지은 걸 내 가족에게 먹이고, 또 조금 더 남는다면 이웃과 함

께 나눠 먹을 수 있으면 유기농 자연농으로 해서 그렇게 자유롭게 고요하게 맘공부하면서 이러고 살고 

싶다 한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란 말입니다.

 

그것 또한 온전히 그 삶 자체로써 우주법계 전체에 기여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말이죠. 모든 삶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일이다. 立處皆眞이에요.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참된 진리의 자리라는 말입니다.

다만 내 스스로 이건 부족한 것 같고, 난 아직은 부족한 것 같고,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것 같고, 이러한 

분별 번뇌 망상이 제한하고 있을 뿐이지 그 분별 번뇌 망상만 내려 놓는다면, 지금 이 자리 이 순간 여기

에서 여러분은 더 이상 한 걸음도 더 갈 데가 없단 말이 입처개진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더 이상 갈 필요도 없고.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완성된 자리인데 어디 더 

完成되어야 된다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한다면, 아! 망상이 지금 또 쓸데 없는 일을 만들어 내고 있구나!

라는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아, 그 다 좋은데, 뭐 맘공부도 좋고, 완성된 것 다 좋은데, 내가 지금 이 하고 있는 이 사업 요것, 요것만 

성공하고 나서 내가 완성했다고 생각할께요. 요, 대학교, 아들 대학교 이 시험, 수능시험만 끝나면 내가 

그 때가서 완성할테니까, 지금 조금만 조바심 내는 것 좀 이해해주세요.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죠. 그것 

상관없이 지금 이 자리 이 순간 여기에서 본래부터 이미 완전무결하게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다. 완성되

어 있지 않고 뭔가 한 발 더 가야 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내 분별 번뇌 망상이 작용을, 작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낸다면 상관없단 말이죠. 집착이 없으니까 해도 한바가 없는 거예요.

이게 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쓰는 겁니다.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나 그러

나 성공 해도 좋고 성공 못해도 좋다. 그런 마음이니까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 애쓰지 않겠죠.


7. 여러분! 이 世上을 진짜 變化시키는 原動力은 人爲的인 노력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공하려고 한다면 인위적인 노력이 과도하게 개입되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조금 밖에 성공을 못해요. 人爲的이지 않고 自然스러운 삶에 흐름을 탈 때 진짜 크게 될 수 있고,

강한 힘을 가지고 힘을 쓰지 않았는데 큰 힘이 작동이 되는 겁니다. 우주법계의 힘을 받아서.

인위적으로 애쓰고 힘쓰는 마음은 眞理와는 조금 어긋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제가 가슴 뛰는 열정이 히말라야에 가는 것에서 느껴졌지만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거죠.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우주, 법계가 작용을 만들어줘서 가게 됐다.

그러면 좋은 거고, 그냥 가는 겁니다. 그러다 안 되면 그만인 것이고. 그런 맘이었다면 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많은 집착이 있었다면 집착이 컷었다면 그 일은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성공하려구요,

회사, 내가 사업을 확장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있습니다. 내가 이걸 성공을 하면은 정말 내가, 야!

진짜 도약을 할 수 있는데, 내가 뭐 억대 부자에서 막 백 억대, 천 억대 부자가 될 수 있는데 하면서

집착이 딱! 개입됨과 동시에 거긴 힘이 들어가요. 야! 저 회사도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고, 이 회사도 좀 

도와줬으면 좋겠고, 이 몇 가지가 뭔가 좀 착착 맞아돌아가 줬으면 좋겠는데, 自然스럽게 안 되니까

人爲的으로 이 사람한테 가서 막 애를 써야 되고, 저 사람한테 애를 써야 되고, 인위적으로 뭔가를 막 

하니까 집착이 많이 개입되면, 인위적인데 막 두려움이 생기고 초조함이 생겨요.

 

왜냐하면 이 사람한테 가서 이 사람이 나를, 돈 얼마만 딱 보태주면, 대주면, 내가 이 회사를 딱 키울 수 

있는데. 이 사람이 해줄까, 안해줄까?  이 사람을 찾아가면서도 두근두근 거리고 겁이 나고. 왜냐하면 

이걸 해줘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 라는 집착이 있으니까. 그런데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있으

면 그 누굴 만나도 두려워 떨게 없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건데요, 뭐. 그런 마음으로 하면 거기

에 힘이 실린단 말입니다. 인위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힘이 실려요. 그리고 그럴 때는 우주법계가 

딱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거 사업을 확장해야 되는지 안해야 되는지, 이게 집착인지 욕심인지 아니면 

내 어떤 인연 따라 자연스러운 연을 따르는 것인지를 우주법계가 알기 때문에 때가 되면 신기하게도 

우주법계가 다 도와주게 되어있습니다.

 

신기하게. 이 진급한 사람들 중에 일부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어느 해는 진짜 내가 이상하게, 이상하게 

뭔가 주변 여건이 자꾸 꼬이고 꼬이더니 안 되더라. 근데 어느 핸 가는 이상하게 여기저기서 막 도와주고 

내가, 내가 별로 그냥 가만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자리에 딱 갖다 놓아주고 사람들이 도와주고 이러더

라,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더란 말이죠.


8. 그런 얘기는 뭐냐 하면, 그냥 우주법계 인연에 탁 내 맡기면 힘쓸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이 법계가 

그냥 끌어가는데. 그래서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가 뭐라 그랬냐면 수다원 이랬단 말이에요. 우주의 흐름

을 타는 단계(수다원과)라 했단 말입니다. 흐름을 타는 것, 삶의 흐름을 타게 되는 게 깨달음의 시작이에

요. 애쓰지 않고도, 힘들이지 않고도 삶이 저절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그 힘이 생긴단 말이죠.이게 바로 

隨緣成, 우리는 삶을 살고 있지만  이렇게 연을 따라 마음껏 나툴 수도 있는 겁니다. 다만 집착하지 않고 

緣을 따라 나투는 것에 마음을 내어서 나투고, 살게 되면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내 마음하나 일으키는 

것을 쫒아서 무한한 가능성이 그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다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안 돼도 상관없다. 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안 돼도 상관없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되고 좋고 안되도 좋은 거예요.

 

그렇게 緣을 따라 나투는데 ‘不守自性隨緣成’ 인데, 어떤 방식으로 나투냐 하면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 의 방식으로 나툽니다. 卽, 하나 속에 일체가 있어요. 또, 전체, 일체 속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참性稟, 法性, 眞性, 본래마음은 둘이 아니거든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그 어떤 둘로도 나눌 수 없는, 無二相이랬지 않았습니까. 法性圓融無二相. 둘로 나뉘

어진 모습이 아니다 法性은 法性이라는 것은 둘로 나뉘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하나, 그 法性이라는 하나에

서 이 우주만법 모든 것이 나왔다. 어떻게 나왔습니까? 緣을 따라 나온 거예요. 自性이 없으니까. 둘이다, 셋

이다 라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게 있으려면 그게 둘이나 셋으로 區分이 되어야죠. 자성이 있으려면 이 자성 

다르고, 저 자성 달라야 되니까. 分別의 세계죠. 分別되지 않는 世界, 깨달음의 세계, 진리의 세계는 完全히 

自性이 없고 法性이 둘로 나뉘어진 세계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세계란 말이죠.

 

그 온전한 하나의 세계니까 그 하나의 세계에서 여러분도 나오고, 저도 나오고, 나무도 나오고, 풀도 나오

고, 곤충도 나오고, 짐승도 나오고, 온 우주법계 모든 것이 法性 그 자리에서 나왔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

나 속에 一切가 담겨있는 것이죠. 全切가 곧 하나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손바닥을 

뻗으면 이 손바닥 안에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손을 보란 얘기가 아니

구요. 이 세포 하나 속에 내 한 생각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가 모두 다 담겨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나 自身을 救濟하면 宇宙法界 全切를 救濟한 겁니다. 모든 존재를 쫒아가서 구제할 필요가 굳이 없단 말

이죠.


9. 때로는, 때로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뭐 이 말은 사람에 따라서, 여러분 견해에 따라서 좀, 

그 견해의 차이가 있겠지만, 제가 말씀을 드리면, 약간 좀 정치적인 얘기 경우에 정말 참, 그 사람들이 되

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고 제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예민할 게 하나도 없는데. 보수, 진보, 

어디가 옳다, 어디가 그르다 이건 幻想입니다. 둘, 이상으로 나눈거예요. 둘로 나눈거예요. 어느 부분은 

보수가 옳을 수도 있고, 진보가 옳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는 이거는 진보적인 생각이 옳을 

수도 있고, 보수적인 생각이 옳을 수도 있죠. 어떤 하나를 정해놓고 이것만 절대적으로 옳다? 이것은 얼마

나 극단에 치우쳐 있는 생각입니까.

 

어느 한 極端에 치우쳐 있으면 상대방 진영을 내가 설득시킬 수가 없어요. 오히려 中道的인 사람이 다 허용

하니까, 다 포용하니까, 마음을 열고 있으니까, 진보와도 손을 잡을 수 있고 보수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완

전히 열려있는 그 누구와도 모든 걸 할 수 있는 그런 활짝 열려있는 존재가 되거든요. 그런데 이 얘기를 뭔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어떤 하나의 견해 같은 것을 고집하고 하는 것도 하여간 그 하나의 견해에 과도

하게 고집한다는 것은 벌써 내가 둘로 나누고 있구나. 이건 그야말로 둘로 나뉜 생각이구나. 거기에 내가 

과도하게 오염되어 있구나. 저는 우리나라에 정말 바른 스승이나, 바른 어떤 국가적인 어떤 지도자가 바른 

지혜로운 지도자가 딱 있다면, 그 사람은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보도 될 수 있고, 보수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마음이 활짝 열려있으니까. 어디 한 가지에 치우

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 수로 나뉜 모든 이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여러 수로 나뉜 사천만 명

이, 사천만 명 전원이 다 생각이 다를 수 있죠. 근데 그 생각이 결코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그 생각이 결국 

다르지 않은 거예요. 저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이 생각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보수는요 진보가 있어야만 

보수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긴 것은 짧은 게 있어야만 이게 길다 라고 할 수 있듯이,

 

얘(죽비) 혼자서 어떻게 얘를 길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전봇대 옆에 대면 짧다 라고 할 수 있고, 성냥까치 

옆에는 길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니까 얘는 짧은 게 없으면 길 수가 없어요. 짧은 게 없으면 긴 것

도 없어요. 긴게 없으면 짧은 것도 없고. 진보가 없으면 보수도 없습니다. 짧은 것과 긴 것은 결국 하납니

다. 둘이 아닌 하나예요. 서로 의존 관계에요. 서로 의존된 관계라는 것은 자비의 관계입니다. 니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바로 너고, 너가 바로 나인 관계입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관계, 자비로울 수 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동체이니까. 손바닥의 앞뒷

면과 똑같은 거예요. 길다 짧다, 선하다 악하다, 옳다 그르다, 중생이다 부처다, 이 모든 나뉨은 손바닥 앞

뒤의 관계이지 탁~나뉜 관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게 없으면 저것도 없어요. 진보가 없으면 보수도 없습

니다. 진보를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한 보수가 될 수 없고, 보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한 진보가 될 수 없

습니다. 둘이 아닌 하나기 때문에. 그런데 어쨌든 이 세상은 다 이렇게 막 다(多)로, 막 수없이 많은 걸로 

분열되어 있어요. 나눠져 있습니다.


10. 그러나 그 本質을 하나다. 이 性稟자리는 하나지만 그 性稟에서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이 사실을 이

해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이것은요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이라는 이 華嚴 思想의 표현은 

인간의 지식, 생각, 이해를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제 온갖 것들을 동원하고 온갖 비유를 들어서

‘아! 그렇구나’ 하고이해할 순 있을 거예요. 근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것을 이해했다 할지라도 ‘아! 난, 

이해했어. 아! ‘일중일체다중일’ 아! 나, 그것 이해했어,‘ 라고 생각하면 어긋납니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다만 요런 방식으로, 아! 이렇게 비유적으로 그 비유법을 이해했을 순 있겠죠.

 

그러나 本質을 이해하진 못합니다. 生覺을 가지고 있는 以上. 알음알이 분별심 가지고는 이걸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럼 그렇다고 해서 이걸 또 설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좀 이해할 수 있는, 그

래서 아마 설명을 해볼 수가 있겠죠.  여러분, 예를 들어, 이 세상은 오직 하나뿐인 法界입니다. 一眞法界

라 그랬어요. 그냥 하나의 眞實뿐이고 一眞法界 거기에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아무 일이 

없는, 그냥 그 하나뿐인 세상, 일진법계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서로 다르지 않은, 서로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서로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한 가지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고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러분, 지금 여기에서, 방석에 앉아 있습니다.그러면 편한가요? 안 편한가요? 뭐 좀 다리가 아프신 분도 

계시겠죠. 그래서 야!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야! 이거 좋은데 좀 더 길게 했으

면 좋겠다 이런 분들도 계실 것이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이 중에는 어떤 사람은 다리 아파서 막 

불편하고, 힘든 분도 계실 것이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하는 분도 계시고, 좀 더 길게 했으면 좋겠다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앉아 있는다 라는 自體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죠.

 

그냥 一眞法界입니다. 하나의, 그냥 하나의, 그냥 事實일 뿐이에요. 근데 우리 사람들은 거기에 하나의 

사실에 따라서 수없이 많은 見解로 나뉘어요. 여러분! 그, 이제 군대 가면, 여러분! 저, 아마 ’진짜 사나이

‘ 이런 거 봤으면 아마 대충 감을 잡으셨을 텐데, 예를 들면, 이 A중대와 B중대가 훈련을 합니다. 조교가 

A소대  B소대를 훈련을 시켜요. 그럼 나중에 평가를 하는데 잘하면 쉬게 해주고 못하면 기합을 주거나 

다시 훈련 계속한다 그러면 막 열심히 하겠죠.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훈련을 계속하는 와중에 잘 하는 

사람 십분 휴식 준다. 그러면 해가지고 이 팀이 딱 이겼습니다.


그러고 이 팀(진 팀)은 계속 기합을 받아야 되고, 아니면 훈련을 해야되고. 이 팀(이긴 팀)은 휴식이, 

십 분의 휴식이 주어졌다. 얼마나 달콤할까요? 그 십 분의 앉아있는 휴식이. 방석은 필요도 없고 그냥 

땅바닥에 앉아만 있어도 그 십 분이 너무나도 달콤하단 말이에요. 더구나 그 옆에 분대가 막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괜히 상대적으로 더 기쁘단 말이에요. 그런 걸 느낀단 말이죠. 그니까 가만히 앉아있다 

라는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너무나도 정말 기쁜, 충만감을 느끼는 기쁨이죠.

그러다가 누워도 된다 그러면 누워가지고 하늘을 바라보면서..여러분! 저, 제가, 저, 목사님, 신부님들

하고 우리 군종중대에서 우리 처음에 군법사로 오기 전에 훈련받습니다. 목사님 신부님들하고 함께.

 

이렇게 훈련을 하루 이렇게 막 가다가, 휴식이 주어져서 그 자리에 모두 너다 나다 할 것 없이 누워서,

그야말로 지쳐가지고 누워가지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떠가는 하늘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러다

가 목사님이, 사령부에 있는 목사님이 오셔가지고 쭈쭈바를 하나씩 가지고  위문을 하는데, 이 목사님

이 얼마나 천사같이 보이던지 막 우스갯소리로 신부님들하고 우리 스님들이 아이~ 그 저, 저 그러지 

말고  하나씩 더 달라고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장난삼아 이번 주 교회 오면 하나씩 더 주겠다고. 그러면 

안간다고 그럴꺼 아니예요? 근데 우리 스님들이 전부다 우리 교회 가겠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교회 가나, 성당 가나, 법당 가나 뭔 상관이 있느냐?  허! 허! 이렇게 우스갯소리로 얘기를 하면서,

 

'성직자들이, 수행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우스개로 또 이렇게 물어보더

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無有定法이다. 定해진 바가 없다. 어떤 불교만이 진리다? 이런 건 우리 불교에는 

없다. 어디에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어떤 것도 진리일 수 있다. 이렇게 농을 던졌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

게 동일한 상황인데, 그렇게 누워있는 상황이 길바닥에 누워있어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럴 땐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어떨 때는, 예를 들어, 어떤 한 백수가 몇 날 몇 일을 집에서 놀고, 놀고 놀다가 게임

도 시들하고 뭐 할 것도 없고, 어디 가서 취직하려해도 취직도 안되고 힘들어 죽겠고, 막 부모님이 욕을 

하고 방바닥에 앉아서 하루 종일 누워있단 말이에요. 그럼 방바닥에 누워 있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죽을 

지경이란 말이란 말이죠. 아니면 그렇게 누워서 편하게 쉬고 있고 싶지만, 훈련하다 쉬면, 누우면 그렇게 

행복한 것도, 단잠을 자면 열 시간을 자라 그래도 그렇게 꿀맛 같은 잠도, 병원에 가서 한 달 두 달을 누워 

있으면 그게 행복하냔 말이에요. 그냥 앉아 있다. 앉아서 쉬고 있다. 아니면 누워 있다. 그 자체는 그냥 

하나의, 그냥 하나의 일일뿐인 겁니다. 그냥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거 일 뿐이에요.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내가, 내가 지금 환자다. 내가 지금 여기가 병원이다. 내가 지금 한 달 동안 누워 

있어. 앞으로 일 년 동안 더 누워 있어야 된다. 이런 망상이 있으면 괴롭겠죠. 누워 있는 자체가 괴로움이

겠죠. 근데 그 生覺이 딱 없을 땐 어때요? 그냥 누워 있을 뿐인 겁니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

에요. 모든 狀況이 이와 같습니다. 앉아 있는 狀況, 누워 있는 狀況, 내가 일하는 상황, 컴퓨터를 하는 상

황, 밥을 먹는 상황, 직장을 하는 상황, 앞에 차가 꽉 막혀가지고 고속도로가 꽉 막혀 있는 상황. 제가 이

를테면 어떤 법문을 들으면서 고속도로를 이렇게 간다  그럴 때는 이 법문이 너무너무 막 정말, 정말 막 

가슴을 울리는 법문을 들으면서 갈 때는  야! 이 신호 좀 막혀줬으면.

 

제가 곧 한 20분쯤 있으면 도착하는데,  야! 이거 조금만 더 막혀가지고 한 시간만 더 있으면, 딱 끝낼 수 

있는데. 그래가지고 막 더 듣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죠. 그럴 땐 차가 막히면 야아! 잘됐다 싶고, 그 막 더 

신이 난단 말이죠. 차가 막힌다라는 그 자체가 괴로운 게 아니죠. 내가 내 마음속에 언제까지 가야된다라

는 집착이 있으면 차 막히는 게 괴롭고 그 집착이 없으면 괴롭지 않을 수가 있죠.

 

11. 모든 狀況은 이와 같습니다. 좋은 狀況도 없고 나쁜 狀況도 없습니다. 여러분 人生에는 좋은 일도 벌어

지지 않습니다. 나쁜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여러분 아들이 수능시험을 봤는데 서울대를 가고 싶

었는데  심지어 지방대밖에 못 갈 성적을 받아왔다. 그럼 그냥 그거는 종이에다 동그라미 치고 이런 것밖에 

없지.그건 내가, 내 머릿속에서나 지옥같고 극락같은 것이지, 그건 그냥 하나의 성적일 뿐인 거예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그 모학교, 제가 워낙 가고 싶었던 곳에 경영학과가 있었습니다.아버님이 이제 일을 

하셨다보니까, 아! 아버님 사업 물려받으라고 해서 경영학과를 가라. 그래가지고 뭐 그러겠습니다. 저도 뭐 

큰 것 없고 그러겠습니다 그랬는데,

 

한편으로는 제가 불교학과가 너무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불교학과를 부전공을 하던가, 복수전공을 

해야 되겠다 이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 그, 그 시험을 딱 보는데요, 그 날, 그 수능을 보는 날,야아! 

제가 성적이 평소에 보던 것 보다 확 떨어져서 나온 거예요. 그래 그 경영학과에 못 가게 돼버린 겁니다. 그 

때 제가 너무 충격을 받아가지고 그 때 제 일기장에 뭐라고 썼냐면, 그 지금, 저, 저 길을 걷다보니까 시궁창

이 옆에 이렇게 있어요. 오염된 시궁창요. 저 시궁창에 빠져 죽고 싶다. 막 이렇게 썼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 

시궁창에 빠져죽고 싶을 만큼 성적이 안나왔길 다행이지.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지. 그 때 성적이 

적당히 나와가지고 제가 그 학교를 입학해서 다니고 있었으면, 지금 생각하면 제가 아찔합니다.

 

제가 어디, 어디 빌딩 안에 앉아가지고, 저 무슨 뭘 이렇게 뭐 컴퓨터 앞에 앉아가지고 맨날 일을 하고, 뭐 

이러면서 돈 때문에 막 스트레스 받으면서그러면서 살았을 껄 생각하면, 야아! 정말 아찔합니다, 정말! 그때 

수능성적 안나온 게 정말 우주법계가 부처님께서 저를 돌보셨기 때문에. 정말 부처님이 이렇게 자비로울 수

가 없어요. 그렇단 말이죠. 수능성적이랑 똑같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들이 성적이 조금 못 나왔는데 지금

은 지옥같이 괴로울 수 있겠지만, 사실은 이 아들이 그 수능성적 안나와가지고 뭐 좀 적당한데 가서 내가 뭐

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뭔가를 했다. 근데 그 분야에 뛰어난 어떤 공헌을 해서 세계를 뒤바꿀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 아이가 좋은 대학교를 갔었으면, 그 일을 못 했을 수도 있어요.

 

12.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은. 삶이라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머리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게 옳은지 그른지를 우린 알 수 없어요. 다만 내 머리로, 그냥 偏見으로, 妄想으로, 이것은 좋다 이건 나쁘다 

하는 것 뿐이지.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일어난 바가 없다. 좋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

지 않습니다. 다만 그냥 하나의 眞實한 一眞法界, 하나의 眞實된 法界만이 있을 뿐이지. 근데 이 하나의 진실

된 법계를 가지고 사람마다 저마다 다 다르게 解釋할 뿐인 겁니다. 어떤 사람은 뭐 수능 뭐 예를 들어 뭐 토

익, 토플 뭐 한 800점 나왔는데 그것가지고 죽을 것 처럼 괴로워 하고, 어떤 사람은 야아! 너무 잘 나왔다 

행복해하는 것 처럼. 저마다 똑같은 성적 가지고도 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 처럼.

 

동일한 狀況을, 동일한 이 一眞法界인 하나의 世界를, 眞實을 다 다르게 解釋하는 것 뿐이지. 백이면 백, 천

면 천, 다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그렇게 다 다른 해석에 따른 달리 다른 세계가 있는 게 아

닙니다. ’一卽一切多卽一‘ 이지. 하나의 진실밖에 없어요. 다른 세계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머

릿속의 세계에서나 다 다른 세계가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허망한 번뇌 妄想 分別을 짓지만 않는다면 언제

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온전한 아름다운 眞實한 世界, 법계, 진리의 세계, 이 현실세상, 삶인 것입

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더 한 발짝도 내디딜 곳이 없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진

실되고 참된 하나의 세계, 一眞法界이다.

 

華嚴經에 보면, 그 도리천에 제석천에 어떤 이 寶宮이 있어요. 제석천의 보궁에 보면은 이 蓮꽃을 여러분 

想像하면 될 겁니다. 이 보궁 처마 하나하나에 마다 이게 보배구슬이 담겨져 있어요. 이 연꽃을 다 보배구

슬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보배구슬이 다 이 처마에 좍 이렇게 있습니다.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요. 무궁무진

하게 하늘에 보배구슬이 이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이 보배구슬이 거울처럼 아주 깨끗한 거울처럼 돼 있단 

말이죠. 여기서 이렇게 손을 한 번 딱 들면, 요 보배구슬에서 이 손을 든 게 탁 드러나지 않습니까. 근데 이 

빛, 제가 손을 들거나 아니면 빛을, 불을 하나 딱 켰습니다. 성냥불 하나를 딱 켤 때, 이 보배구슬에서 갑자

기 빛이 쫙 나는데, 여기 보배구슬에서만 빛이 납니까, 나머지 천 개 만개 수백 수천 개 있는 모든 제석천의 

인드라網처럼 되어있는 그 모든 보배구슬에서 同時에 빛이 發散되겠죠, 그죠. 나는 분명히 빛을 하나밖에 

안켰는데, 전체 모든 천개 만개 있는 모든 구슬에서 전부다 同時에 빛이 난단 말이죠. 서로 相互 浸透돼서 

다 빛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 속에 全切가 들어가 있다. 이 하나를 켰는데 全切가 다 빛이 

同時에 켜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빛이 작아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 속에 全切가 담겨 있고 全剃가 바로 

하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죠. 이 世上은 이와같이 이러한 어떤 인드라網, 제석천의 인드라網 그물코처럼

우주 전체가 서로 連結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의 불을 켤 때  다시 말해 내가 깨달음을 얻을 때 우주 전체가 함께 깨닫는다. 석가모

니 부처님께서 딱 깨닫고 봤더니 전부다가, 우주 전체가 佛(부처, 깨달아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교화할 

필요느끼지 못했던 겁니다. 眞實의 世界에서는 그렇다는 거예요.  진실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망상을 피우

니까 문제지. 근데 이 妄想 분별 번뇌은 가짜거든요. 그러니까 어차피 쟤네들이 망상피우는 게 괴롭다고 

하는 게 다 착각이고 가짜니까 내가 굳이 그 가짜까지 뭐 내가 손댈 필요가 있느냐 하고 生覺한 게 옳은 

生覺이에요. 다만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 가짜의 괴로움이지만 저렇게 虛妄한 괴로움을 錯覺하고 괴로워

하는데 그 錯覺을 좀 깨트려 줄 필요는 있겠다. 그 錯覺하고 있는 분별 망상 번뇌를 깨 줄 필요는 있겠다. 

그래서 法을 說하신 것이죠.

 

내 마음 안에서 내가, 예를 들어, 화를 한 번 냈다 이거는요, 宇宙 全切가 함께 화낸 것과 똑같습니다. 불 

하나 켜면 宇宙 全切가 불 들어 오는 것과 똑같이 量子物理學에서도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하나의 波長은 

곧 우주 전체의 모든 情報를 담고 있고, 하나의 波長이 움직일 때 우주 전체가 함께 움직인다. 非局所的이

라서 그래요. 여기서 하나의 마음이 일어날 때 우주 끝까지 그 마음이 다 傳達된단 말입니다. 인드라網 그

물코, 이 비유가 마찬가지입니다. 화엄경에서 비유한 일즉일체, 하나가 전체기 때문에 내가 화를 낼 때 

우주 전체가 함께 화를 내는 거다. 내가 어두운 마음이 연습 될 때, 우주 전체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는 것

과 똑같습니다. 내가 긍정적인 마음, 또는 밝은 마음, 지혜의 마음, 공부할 때, 여러분들이 이렇게 마음 

공부할 때, 우주 전체가 함께 마음공부하는 것과 똑같다. 하나가 곧 전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여러분은 마음공부를 함으로써 宇宙全切에 기여를 하는 겁니다.

 

13. 아! 제가 지금 生覺이 났네요. 아까 그 얘기를 하려고 그랬네. 이상한 얘기까지 했네요.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을 해요. 어떤 사람들이 그 마음공부를 하면, 수행을 하면, 뭔가 깨달음을 얻거나 뭔가 마음공부를 

하면, 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야 될 거 아닙니까?라고. 세상을 하나하나 다 바꿔가지고 

세상에 기여를 해서,  아! 스님, 지금 당신 공부가 중요합니까. 지금 이렇게 못 먹는 사람이 많고, 이렇게 

사회 부패가 많고, 부조리가 많은데, 이렇게 바꿔야 될게 천지인데 이걸 바꾸느라고 쫓아다녀서, 같이 가

서 데모도 하고 같이 가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막 얘기도 하고, 이거를 탁! 가서 해야지 그렇게 앉아

가지고 수행만 한다고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제가 그것을 해가지고 전체 모든 부조리와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다하면 당연히 하죠. 백 번 천 번 다하죠.

이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증명해주지 않았습니까?  그걸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것이 자신을 가

슴 뛰게 하면 하란말이죠. 다만 그걸 하더라도 내 마음이 온전히 淸淨해지지 못하면 그걸 하면서 괴로워요

. 그걸 하면서 그 위에 사람을 증오하고 원망하고  이 사회 부조리를 만든 그 사람에 대해서 증오심이 불탄

단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먼저 죽습니다. 내가. 왜? 그 증오하는 마음은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이 딱 청정

히 정화되지 않고서그걸 바꾸려고 한다. 이게 진실로 그것만이 옳은 일인가? 그걸 하지 말란 얘긴 아닙니다.

 

그걸 또 해서도 안 된단 얘기도 아닙니다. 할 땐 해야 된다는 겁니다. 할 땐 해야 된다. 그러나 그것만이 진

리다, 그것만이 옳다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옳은 것은 내가 내 마음을 천도시키면, 내 마음을 깨닫

게 만들면, 宇宙 全切가 함께 깨달아지고, 지금 내가 그 일을 해가지고 구제하면 한 두 명밖에 구제 못할 걸, 

내가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주 전체를 구제 할 수 있단 말입니다.

 

14. 부처님께서 王이 되지 않으면 카필라국 전체가 무너질 판인데 부처님은 무너질 것 감안하고 자식, 아내, 

부모님, 형제 다 무너질 것 감안하고  난 그래도 출가하겠다. 왜냐? 나는 진정으로 돌아와서, 너희들이 이 

생에 전쟁이 나서 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 두 번 죽은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수도 없이 죽었지 

않습니까? 그 수도 없이 죽고 사는 이 輪廻의, 이 根源的인 이 宇宙法界의, 이 틀을 뛰어 넘어서 全切를 救濟

해야지 그 社會不條理 하나가지고 요것 구제하고, 저것 구제하고,  그것이 무조건 진실이 아닐 수 있단 말이

죠. 그런데 그걸 또 하지 마라? 이 건 또 아닙니다. 뭘 또 그걸 하는 사람들은 그걸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

을 투여하는 사람도 있겠죠.

 

정말,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내가 내 마음을 닦는다라는 게 뭔지. 그래서 우리가 마음 밖으로, 바깥으로 나가

는, 바깥에서 하는 모든 일들, 돈 버는 것, 뭐, 뭐 활동하는 것, 뭐 세상을 바꾸는 것, 아니면 뭐하는 것, 뭐하

는 것, 全部 다 분별 번뇌 망상일 뿐입니다. 사실은. 진짜 중요한 것은, 이 一切唯心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오직 마음 뿐입니다. 마음이 투영된 것이 이 世上이예요. 따라서 마음이 구제가 되면 우주전체가, 법계가 

구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도 구제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먼저 하려고 하면 그건 잘못이다. 그것을 

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내 마음도 구제를 어느 정도 하면서 같이하면 상관없겠죠.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 하니까. 마치 저거와 같습니다. 자기 수행이 안 된 사람이 상담사 하잖습니까? 상담사.

 

상담사 분들 제가 상담을 해보면요, 상담사분들 참 내적인 갈등이 많습니다. 하루에 열명, 스무명, 삼십명 

상담을 하는데, 그 상담하러 온 사람들이 전부 다 너무나도 큰 고질적인 괴로움을 안고 있어요. 근데다가 

말도 안 되는, 막 얘기를, 막 속을 긁어 놓은 사람들도 많구요.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런 사람들을 한 열 명, 스무 명 상대를 하니까 저녁 때가 되면 초토화가, 정신이, 의식이 막 쓰러지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담사하면 안돼요.

 

그 자신 안에 들어있는 이 닦여지지 않은 자신의 이 트라우마를 오히려 상담한다 하면서 상대방에게 더 괴

롭게 만듭니다. 투영해요. 자기 마음에 있는 닦이지 않는 어떤 성품은요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투영되게 되

어있습니다.  여려분이 뭔가 문제 있는 사람을 만나면은, 그 사람이 자기의 문제를 나에게 고스란히 투영을 

시켜서 그 사람만 만나면 힘들고 불편한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業을 내가 자꾸 받기 때문에 그

런단 말이죠.

 

그니까 자기가 천도되지 않고 자기 마음이 구제가 되지 않고 세상을 구제하겠다? 이 거 어느 게 먼저 입

니까? 먼저 이 마음을 구제하지 않고 내가 바깥에 있는 걸 먼저 구제 하겠다? 진짜 내 마음이 구제가 되

어야 되는, 이게 먼저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안팎이 없다는 차원에서는 내가 내 구제가 되는, 이 구제하

는 과정에서, 내가 어차피 끝나고 나서, 내가 모든 걸 깨닫고 나서, 그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함께 

하겠다 이러면 괜찮단 말이죠. 그것 자체가 하나의 공부과정이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래서 진짜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은 자기 마음공부가 같이 돼가면서 사회를 바꿀려고 한다면 괜찮습니

다. 그러나 혼자서 내가 세상만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 젊었을 때 막 데모도하고 

막 이러는데 나중에 가서 내 마음이 너무 허망해져가지고 세상은 바뀌지 않고 내 마음만 피폐해져서 삶

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 마음공부를 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15. 이것처럼 또 다른 어떤 비유를 든다면요, 이 호피인디언들의 창조신화에도 나온다 그럽니다. 거기는 

인제 인드라망그물코의 비유를 이렇게 얘기해요. 거미할머니가 나타나서 太初에 世上 萬物에 있는 커다

란 거미網을 連結해놓았다. 이런 식으로 이제 인디언들은 얘기를 하는 하나의 신화가 있다그래요. 즉 이 

거미할머니가 온 우주법계 전체를 사람과 사람의 마음, 물질과 물질, 온 우주 전체를 거미망으로 連結했

단 말이죠. 요즘 量子物理學으로 넘어가서 超끈이론이라는 것, 微細한 끈으로 다 宇宙法界 全切가 連結

되어 있다 라고 하듯이,

 

이 우주만물이 그러한 어떤 끈으로 連結되어있다. 상호연결성, 상의상관적인 緣起性, 이런 連結城을 이

런 식으로 표현을 했겟죠. 인드라網 그물코 같은 連結性.  이렇게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緣起的으로 相依相關的으로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위는 우주 전체가 함께하는 행위로

서로 影響을 미치고 影響을 주고 받고 하는 겁니다. 내 생각이 상대방에게 들어가고, 그 상대방의 생각이 

나에게 들어오지 않습니까? 相卽相入 한단 말이에요. 서로의 생각이 항상 卽해서 서로가 들어오고 나가

고 한단 말입니다. 投映하고. 이와 같이 이 인드라網의 世界는 本來는 一眞法界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 一眞法界가 다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인 것 같지만 전체고, 전체인 것 같지만 하나고,

그래서 이 내 마음을 구제하면 우주전체가 구제되는 겁니다. 정말 중요한 게 이게 자기 마음! 자기 마음!

그게 아니라면 부처님께서 왜 出家를 했겠습니까? 카필라성 구제하지. 카필라성에서 부자가 되어가지고, 

王이 되어가지고 나라를 통일하고  세계를 통일하는 그런 사람이 됬겠죠. 그것 하나 두 개 구제해가지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 인류역사가 증명해줍니다. 인류역사 속에 그 사회를 바꾸

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世界史 歷史를 보면요, 社會를 바꾸려는 進就的이었던 사람들이 나타나서 社會를 뒤바꿉니다. 놀라운 

힘을 가지고 뒤바꿉니다. 그런데 뒤바꾸고 나서 그 사람이 딱 王이 되었을 때 또 부패합니다. 100% 부패

합니다 대부분. 끝까지 부패 안하는 사람 찾아보세요. 거의 없어요. 거의 없습니다. 거기서 또 문제가 

발생하고. 自己意識이 完全히 깨달아지지 않고서는 어리석은 衆生心을 갖게되면 이게 조금 있을 때는 

慾心이 적은데요, 많이 가지면 慾心이 많아지거든요. 그러니 한 나라를 가졌으니 욕심이 안생기겠습니

까? 생길 수 밖에 없죠. 그러니까 나라를 가진다고 사회가 바뀌게 되는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

내 마음을, 이 마음을 구제하면 그게 바로 이 우주법계 전체를 구제하는 것이니까.

 

16. 뭐 이런 비유도 듭니다. 밥 한 공기 속에 모든 宇宙法界 모든 存在들의 노고가 담겨있다. 그 이 밥 

한 그릇 안에 모든 어떤 連結되어 있는 모든 宇宙法界 全切가 이 밥 한 공기 안에 담겨있어서 밥 한 공기

를 먹을 때, 우리는 우주법계 전체를 감사하게 내 것으로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꽃 한 송이를 볼 때, 

그 꽃 한 송이 속에서 宇宙法界, 法身부처님 全切를 親見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 우리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부처님을 親見하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대할 때 그 한 사람은 곧 우주법계 

전체를 代辨하는 존재로써 내 앞에 와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아들이라고 해서 내 맘대로 하고 내 아들에게 화를 낼 때 宇宙法界 全切를 相對로 화를 내는 겁

니다. 내가 기분 나쁜 사람에게 혼을 내고 싸울 때 우주 법계 전체를 상대로 내가 싸우고 있는 것과 똑

같다. 그건 다시 말하면, 내가 나 자신을 상대로 욕하는 것과 똑같아요. 내가 상대방을 욕할 때, 나 자신을 

대상으로 욕하는 거다. 그 사람과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돌아가서 나에게 올 수 밖에 없죠 다 

연결되어 있는 하나니까. 음~ 뭐 얘기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우선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이어서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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