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금강경 대승정종분

장백산-1 2015. 8. 31. 03:37

 

 

[금강경 녹취]  제3분 대승정종분 (第 三分 大乘正宗分 ) |법상스님 영상법문 녹취록

 법우 | 2015.08.30. 14:38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322   

 

[ 善現起請分 第二 ]

 

時 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과 함께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스럽게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느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 하노니 잘 들으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그대에게 설하리라. "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이렇게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다시 말해서 쉽게 말하면

‘어떻게 人生을 살아야 됩니까?’ 그리고 또 ‘어떻게 수행을 하고 마음공부를 해야 됩니까?’

이 두 가지 질문입니다.

일반인들은 어떻게 人生을 살며 어떤 마음 가짐으로 人生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수행자들은 어떤 마음 가짐으로 마음을 닦아 가야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인데

여기에 대한 답변이 56쪽에 3분에 나옵니다. 지난주 2분 했고 3분을 같이 한번

부처님께서 어떤 답변을 해주고 계시는지를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56쪽입니다.

 

[ 大乘正宗分 第三 ]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

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분이 이 3분 대승정종분이 대승의 바른 종지 즉 금강경의 종지를 드러낸 아주 그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많은 스님들도 이 3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인용을 하고 있구요.

나머지 분들이 이 3분에 대한 어떤 부연설명이라고까지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거를 읽으니까 ‘아 이런 삶을 살아야 되는구나’ ‘부처님이 이런 답을 주셨구나’하고 답이 딱 나옵니까?

 

(아니요..)

 

안 나오죠. 보세요.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내라 하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신 거죠. 어떻게 마음을 내냐 하면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 일체중생이죠.

일체 모든 중, 그 중생을 여기에서는 구류중생이라고 해서 아홉가지로 나누어 놨습니다.

알에서 나는 것, 모태에서 나는 것, 습기에서 나는 것, 화현하여 나는 것을

태란습화,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이라고 해서 태란습화 4생이라고 해요.그래서 부처님께서는

四生의 慈父다. 태어나는 모든 종류가 이 네 가지에 한정됩니다. 이 모든 태어남이 있는 이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 그 분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부처님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먼저 이 사생을

얘기한 것이 일체 모든 태어난 생명 있는 존재들 일체 모든 중생들 이것을 얘기합니다.

 

여기 써 있는 것처럼 태생은, 우리가 아는, 우리들 같은 존재들이고

난생은 알에서 태어나는 조류 같은 것 아까 태생은 모태에서 나는 짐승들 사람

습생은 지렁이나 벌레 같은 또 화생은 원인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업력에 따라 화현하는

우리가 죽고 나서 죽고 나면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바로 지옥에 가서 화현을 하구요.

모태를 빌리지 않더라도 부모님이 없이 지옥에 가는데 뭐 부모님 지옥에 있는 부모님이 계시겠어요?

천상이나 지옥이나 모태를 빌리지 않고도 바로 화현해서 나기도 한다.

천상의 신들이나 지옥 중생들이 이렇게 화생으로 태어나죠.

 

이렇게 태란습화 4생과 또 뭐가 있냐면요. 유색 무색이라고 해서 형상의 유무에 따른 분류인데

유색은 욕계와 색계를 얘기하고 무색은 무색계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유상(有想)과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認識의 유무에 따른 분류인데

유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중생이구요. 무상은 인식작용이 없는 중생이고 비유상비무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즉 비상비비상처천에 속하는 신들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요, 그야말로 일체모든 중생을 포섭한 게 九類衆生입니다. 아홉가지로 나눈 거에요.

欲界 色界 無色界에 있는 모든 존재들, 胎卵濕化로 낳는 모든 존재들,인식이 있고 없는 모든 존재들

 

다시 말해서 즉 일체 모든 존재들을 어떻게 마음을 쓰라고 했냐 하면 이겁니다.

일체 모든 중생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다시 말하면요.무여열반은 완전한 열반의 세계 완전한 해탈 깨달음의 어떤

세계 완전한 행복의 세계를 얘기하죠. 그래서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겠다 완전히 탐진치 삼독을 소멸한

소멸해서 완전히 번뇌가 소멸된 그런 어떤 도에 들게 하겠다는 그런 맘으로 살아야 된다 이 얘기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우리는 지금까지 人生을 살면서 우리가 살아오는 삶의 방식은 뭐냐 하면

우리 중생들은 어떻게 살아 가느냐 하면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사람들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나라는 我相을 充足시키기 위한 삶을 삽니다. 나라는 게 먼저 딱 중심에 있어요.

我執과 我相이 있어서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부자가 될까?어떻게 하면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가족이 다른 가족보다 더 좋은 집에서 좋은 어떤 경제력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 우리의 모든 삶의 중심은요, 아상입니다.내가 잘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산단 말이죠.

습관적으로 아상이 탁탁 올라오는 거에요.

 

유식에서 공부했던 거처럼 우리는 意識이 있지만 제칠말나식(第七末那識)이라는 의식 차원에서는

자식이 나보다 귀하다 생각하고 아내가 나보다 귀하다고 생각하지만 차를 타고 가다가 급박한 상황에

있을 때 차를 확 돌려요. 그것은 내가 나쁜놈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우리 무의식에는 제七識에는

自我 執着識이라는게 있어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나쁜 놈이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나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자동반사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걸 보고 ‘나는 진짜 나쁜 놈이구나,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지?’하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아 지금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하고 자괴감을 느끼지 말고  이제부터는 아 미소를 보내는

겁니다. 너 또 왔구나. 我相 我執 末那識 너 또 올라왔구나.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구나.

한발 떨어져서 아상을 보는 겁니다. 나는 그냥 이 아상을 지켜보는 겁니다.

 

여러분은 아상 자체가 아니라 아상을 지켜보는 자입니다.

못된 마음이 올라올 때 자책하지 말고 너 또 왔구나 하고 미소를 보내주는 겁니다.

 

그 아상은 지켜보지 않으면 자기가 좋은 방식대로 계속 마음을 몰고 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심지어 심해지면 상상할 수 없는 나쁜 마음까지 써 가면서 말도 안 되는 남편을 저 보험을 막 들어놓고서

어떻게 확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는 게 바로 아상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깨어 있지 못하게 되면

아상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人生을 살아가는 바탕에는 아상과 아집이

있어요. 나만 잘되고자 하는 마음 어떻게 하면 내가 부자가 되고 내가 잘되고 할까

많은 사람들 대개 정의로운 사람들조차 또는 지혜롭고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習慣的으로 이렇게 자기 살 궁리를 먼저 하게 돼요. 예를 들어서 뭐 중요한 결정을 내리잖습니까?

국가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아니면 어떤 내가 속한 직장에서 우리 사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지

어떤 정책이 바뀌던지 국가의 어떤 정책이 바뀌던지 습관적으로 그 정책이 나한테 도움이 되나 안되느냐를

제일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냐 그런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나한테 도움이 되느나 안되느냐를 먼저 생각하지요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직장 상사가 있어요. 이 직장상사가 진급을 들어갑니다.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냐 아니냐를 

이걸 보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나랑 친한가 안친한가? 이 사람이 진급되면 나한테 도움을 줄까 안줄까?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는 거에요. 空心으로써 있는 그대로를 놓고 보는 게 아닙니다.

나랑 친한지 안 친한지가 더 중요한 어떤 결정의 기준이 돼요.

 

많은 경우에 회사에서도 나라에서도 많은 경우에 이렇게 되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지연이니 학연이니 이런 것들을 자꾸 따지는 이유가 아상 때문에 그렇습니다.

국가에서 어떤 정책을 내놨어요. 정말 많은 일반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정책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習慣的으로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될까 안될까를 먼저 생각해요.

그럼 그 연봉상한선이 어디까지지? 나와 맞춰서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 이거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나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거를 주로 생각을 하는 거에요. 습관적으로.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모든 판단은 일상에서 내리는 모든 판단 일상에서 내리는 모든 판단은

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이득이 될까?’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아상과 연결될 때는 합니다. 하다 못해 작은 거 하나조차 마찬가지

아들이 친구 하나를 데려올 때도 내가 친구 하나 사귈 때도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이거는 여러분이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라 我相의 特性입니다.

 

그 我相이 있기 때문에 나를 보호해줘요, 또 그것이 있기 때문에 그 아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生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우리는 그 我相을 經驗하기 위해서

온 거에요. 왜냐하면 아상을 경험해 봐야지만 아상을 타파해야 될 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거니까.

아상이 없는 천상세계에서만 산다면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못 깨닫는단 말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너무 이기적인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기에 ‘저놈은 해도해도 너무 한다.’ 그런 나쁜 사람을 봤거나

너무 이기적인 사람을 봤을 때 욕할 필요가 굳이 없습니다.

아 저 사람은 지금 저 단계 저 뭐랄까, 좀 낮은 수준의 단계 아상도 좀 세련되게 좀 공부 좀 하고 그러면

세련되게 돌려서 말하잖아요. 세련되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하시고 이런 분들은 아상을 겉에서는 좀 아닌 척하고

세련되게 말하시는 분들이지 사실은 내막에서는 똑같이 아상이 작동을 합니다.

 

차라리 아이들은 참 순수하죠. 여러분은 아이들이 막 자기만 좋다고 맛있는 거 있을 때 동생 안주고

혼자 먹거나 친구들한테 좋은 착한 일 안 할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막 혼을 내고

이렇게 하시지만 그럴게 혼을 내고 그럴게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나는 세련되게 표현하지만

쟤는 있는 그대로 표현할 뿐이구나 얘가 부처님이구나

그 아이들은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바로 바로 표현합니다. 그 대신 뒤끝이 없죠.

부모님한테 막 싸우면서 엄마한테 엄청 혼나고 나서도 몇 대를 얻어맞고 나서도

불과 몇 분 안 지나 가지고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와서 안기거나 자기 할 일 하거나

뜬금없이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이걸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표현 할 뿐입니다.

아이들을 보고 정말 지혜로운 선지식이구나 하고 보고 배울지언정

그거를 그냥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무어냐 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 놓으면 안돼’ ‘내려 놓을 줄 알아야 돼’

‘투명해선 안돼’ ‘자꾸 숨겨야 돼, 이 세상을 살려면’ 이걸 가르치는 있는 거에요.

물론 이것도 맞죠 세상에서 너무 드러내면 안되니까 이걸 가르치고 있는 거에요.

한편으로 이것도 맞죠.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 큰 스님들은 좀 위험합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여러분들은 깨달음을 얻은

분들과 잘 어울릴 수 없어요.이 사회에서 거부합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좋아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좀 세련되게 저 같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심하게 얘기할 것도 좀 돌려서 상처 안받게

얘기해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큰 스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은사 스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신도님들이 보든 안보든 사람들의 이목이 있든 없든 그 자리에서 바로 화내고

욕하고 뺨도 때리시고 이렇게 하시는 거죠. 당신 아상이 있으면 그렇게 못하십니다.

내가 신도님들한테 잘 보여야 된다는 아상이 있으면 내가 내 제자를 못한다고 그 자리에서 막 화를

내면서 욕을 하고 뺨을 때릴 수 있겠습니까?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도인들은 좀 위험해요.

내가 세련되게 아상을 세련되게 표현할 때 그 마음 안에는 이런 아상이 있으면서 그렇게 세련되게

표현하느냐?하고 바로 찌른단 말이죠.

 

회사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아상을 품고 있지만 좋게 좋게 얘기하고

있는데 거기서 대놓고 얘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 가까이 있고 싶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봤을 때는 이게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는 아주 어리석은 無明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전 사회가 같이 공유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좀 숨기기로 약속을 하고

사는 겁니다. 적당히 어느 정도만 비추고 적당히 우리 함께 숨기고 살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일 뿐

이지 우리 마음 가운데는 누구나 아상과 아집이 있다. 그래서 누구나 人生을 살아 가는 주된 방식이

我相을 充足하기 위한 것이고 我相을 擴大하기 위한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나 보일 건지, 조금 더 돈이 많아질건지 명예가 높아질건지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돼요. 아상이.

그런데 이 답을 여러분들이 언뜻 읽어보고 나서는 부처님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마음 공부를 해야 합니까?’

이렇게 답변한 것에 대해서 별 감흥을 못 느끼셨지만 이 얘기는 바로 이겁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아상 본위의 삶을 살았고 너희들만을 위하는 삶을 살았지만 어떻게 하면

나에게 利益이 될까 하는 삶을 살아서 나만 내 가족만 도움되자는 어떤 이기심으로 살았지만

이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지 말아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면 구류중생이라고 하는

인간만을 위한 것도 아니에요. 인간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곤충 벌레조차 천상 신들조차

일체모든 존재들을 일체모든 중생들을 ‘완전한 열반’ 즉 쉽게 말하면 그겁니다.

일체모든 중생들을 完全한 幸福에 이르게 하겠다라는 마음으로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겠다

그리고 완전한 멸도에 이르게 하겠다 완전히 행복에 이르게 하고 완전히 그들의 삼독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모든 번뇌망상을 여의게 해주겠다 그래서 그들이 모든 번뇌망상을 멸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이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라. 하고 얘기하고 계신 겁니다. 이게, 여러분, 불교의 始作이자

끝입니다. 佛敎의 目的입니다. 불교의 모든 목적이 여기서 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겁니다.

 

내가 깨닫고자 함이 아니고 일체중생을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행복에 이르게 하고 그들의

고통과 번뇌를 소멸시켜 주겠다 하는 마음이 原動力이 되어 人生을 살아갈 때 여러분은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되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되고  이 宇宙 法界를 밝히는 人生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어디까지 왔나? 지난주 어느 분이 질문하신 내용을 보니까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희뿌옇다.’ 이런 질문을 하셨던데요. 아주 아름다운 질문입니다.

내가 인생의 어디까지 왔는지를 스스로에게 자꾸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올바로 가고 있는가? 삶을 올바로 살고 있는가? 정말 지혜롭게 살고 있는가?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면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실까?

그것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돼요. 그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질문의 답변입니다. 즉, ‘내가 올바로 살아오고 있었나? 내가 잘 살았나?’ 를 보려면

내가 얼마나 利他的으로 살았는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게 하겠다고 하는 마음을 쓰면서 살았는가?

慈悲와 布施와 나눔과 사랑을 베풀면서 살았는가? 얼마만큼 또 상대방이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 이런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얼마만큼 멸해 주기 위한 마음을 냈는가? 소멸시켜 주는 멸도에 들게 하기 위한

마음을 냈는가? 이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 얼마만큼의 공부를 이 생에서 했는지

이생에 인간계 몸 받아 태어난 목적은 우주법계의 영겁이라는 무한한 시간의 어떤 굴레 속에서 잠깐

천상시계 신들이 봤을 때는 일분 일초밖에 안 되는 인간계 짧은 80년이라는 인생

우리가 생사에 관점에 빠져서 보니까 80년이 엄청난 거 같고 이게 내가 정말 실재 있는 것 같고

80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어떻게든 돈을 벌고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해야 될 것 같이 느끼지만

천상세계에서 봤을 때는 일분일초 있다가 오는 거에요. 잠깐 갔다 오는 거에요.

눈 깜짝할 새에 인간계 80년생이 지나갔단 말이죠. 여기에 뭘 그렇게 집착하고 내 것을 붙잡고

이럴 게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 돈 벌고 내 가족만 잘 살고 이런 모든 것들이 이런 모든 것들이

虛妄한 錯覺이었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한단 말이죠. 그래서 이 生에 온 目的은 그 사실을 깨닫고

내가 지금까지 절대 나라고 생각한 나라는 것이 이게 實體가 아니구나 無我를 깨닫는 겁니다.

내가 아니구나. 그러니까 집착해서 내 거로 많은 것을 내 거로 붙잡아야겠다는 欲心을 낼 필요가 없구나.

貪心을 내려 놓고,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화 내고 성 낼 필요가 없구나. 진심을 내려 놓고.

내가 이 이치를 모르는 것 이 세상 모든 것이 連結 되어 있을 뿐이지 내 몸도 잠시 잠깐 이렇게 드러난

것뿐이지. 서로 다 연결되어 있는 緣起的인 存在이기 때문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닌 그러기 때문에 상대를

사랑해 주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이구나 이 緣起와 無我와 慈悲를 깨닫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번 生에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기와 무아와 자비를 깨달을 때 우리 삶은 어떤 방식으로 바뀌겠

습니까? 자비로운 방식으로 삶이 바뀌어 집니다.

 

지혜와 무아와 연기를 깨달을 때 우리 삶의 방식은 자비로운 방식으로 바뀌게 돼요.

즉 일체중생을 구제해야 되겠구나. 많은 내 이웃들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나와 인연된 모든 사람들을 또 인연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조차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되겠구나. 그 존재들이 괴로워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 괴로움을 소멸시켜 줘야 되겠구나 이런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돼야 되는 겁니다.

금강경을 여러분이 이제부터 공부하고 계시는데 금강경을 내가 공부한 사람이야 라고 어디 가서

말하시려면  根源에서 삶의 原動力이 바뀌어야 됩니다. 나만 잘 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내 옆에, 나와 가까이 먼저 인연된 사람들을 먼저 그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들이 행복하고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내가 덜어줄 수 있을까를

내가 고민해야 됩니다. 심지어 자식에게도 우리는 이런 관점으로 대하지 않아요. 우리는.

자식이 성적을 잘 받아서 좋은 대학교 가야지만 내가 남들한테 ‘내 아들 이번에 몇 등 했어,

성적 잘 받았어’ 한마디 말할 수 있고. 친구들이 물어볼 때 어느 대학 갔어? 이러면

‘내 아들 어느 대학 갔어. 어디 취직했어.어디 취직해서 연봉도 많이 받아’ 이런 말 한마디 하고 싶고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발끈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에요.

피상적으로만 보면 나는 그렇지 않거든 나는 얘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만

성공할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얘를 위해서 내가 시키는 거지 나를 위해 시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걸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렇다 하면 그것이 옳다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라면

탐심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 탐심이 아니고 난 얘가 진짜 공부 잘해서 서울대 가고 좋은 데 취직하고

대그룹에 취직해야지만 얘가 행복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이 사람은 탐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치심이 있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것. 세상의 구조를 그렇게 밖에 못 보는 겁니다.

 

부자가 돼야지만 행복하다. 여러분 부자가 돼야지만 행복할까요? 돈 많은 사람이 행복할까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행복할까요? 여기 여러분, 대그룹 회장님이나 높은 자리에 있으신 분

여기 계십니까? 모르겠어요.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회장 사장님들이나 이런 분들은 여기

못 앉아 있어요. 바쁘고 할 일도 많고 내 욕망과 내가 해야 할 일에 짓눌리고 얽매여 가지고 못 와 있습니다.

지혜를 공부할 기회가 없어요, 지혜를 공부할 기회 그러면 지혜를 공부할 기회가 적절히 주어지는 게 아름

다운 일이겠습니까? 그냥 내 일.일.일에 얽매여 가지고 싸여 가지고 그렇게 살다 가는 게 아름다운 일이겠

습니까?

 

많은 옛날의 王들이 주로 短命을 많이 했죠. 워낙 비싸고 좋은 거 최상품의 음식들을 먹고먹고 또 먹고 또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욕망은 다 하고 살지 않겠어요. 그렇게 사는 것은 일직 단명하기 쉽습니다.

과도한 욕망과 과도한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中道가 좋은 것이 적절한 것이 좋지. 과도한 것을 소유하게 될 때는 반드시 반드시 집착과 욕망이 개입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탐진치 삼독심 때문에 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닥달하는 걸 보면 나의 탐진치 삼독입

니다.내가 자식을 통해서 내가 덕 보고자 하는 탐심 니가 성적을 잘 받아야 된다는 욕심 성적에 대한 욕심

진심 얘가 성적을 잘 받아오려면 이 놈이 내가 말하는 대로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공부 안 하니까 화딱지가

나고 성적이 안오르니까 화가 나고 이게 진심이죠. 그리고 얘가 공부를 해야지만 행복할 거라는 어리석은

치심 탐진치 삼독심 때문에 자식들을 망친다. 탐진치 삼독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냐 하면 아상에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탐진치 삼독이 나는거에요. 그리고 이것 또한 자식을 위한다고 생각하지만

교묘하게 그 이면을 가만히 살펴 보면 내 탐진치 삼독 그 이면에 아상과 아집이 있단 말이죠.

 

그럴진대 친척 가족 형제에게 물론 있는 그대로 자비심을 내고 삽니다. 때때로.여러분들 아마도 형제가

누가 갑자기 망해 가지고  몇천만원 몇백만원 몇억 이렇게 빚더미에 앉아 있을 때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몇천만원 내 줬을 수도 있을 것이고 힘든 사람을 그냥 아무 의도 없이 도와주기도 했을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들의 我相만 活動하는 게 아닙니다. 겉에 표면에 드러난 것은 주로 활동하는

것이 我相인데 그 根源에서는 緣起的이고 無我와 慈悲를 깨닫고자 하는 이 우주의 근원을 지탱하는

根源의 原理가 慈悲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根源의 자리와 때때로 마주하게 됩니다.

점점 더 자주 자주 根源의 자리와 接觸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고

자주 接觸하기 위해서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하는 명상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던 거죠.

 

이렇게 얘기 했더니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하세요.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절에 나오면 안 되고 명상하면 안되겠어요.

아니면, 보살님들이 그러세요. 내 남편은 절에 보내면 안되겠는데요.

내 남편 그렇지 않아도 착해 빠져 가지고 누가 힘들다고 하는 사람 있으면 다 퍼주고 도와주는데

우리도 힘든데 남들 다 퍼주면 얘가 절에 가 가지고 공부를 하면 더 퍼주는데 우린 뭐 먹고 삽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란 말이죠.

 

주는 것은 곧 받는 법 입니다. 이게 宇宙의 運行 法則이에요.

내가 끌어 모으는 것은 빼앗기는 것과 똑같은 原理입니다.

내가 주는 것은 내가 받는 것과 똑 같은 행위에요. 주는 것 받는 것이 다른 말이에요. 동의어 입니다.

다만 衆生世界에선 時間이라는 텀(간격)이 있죠.

그러나 이 宇宙法界, 眞理의 世界, 根源에는 時間도 空間도 없어요.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모든 것이 存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주는 것이 자꾸 받는 것입니다. 

이게 치심 때문에 그래요. 어리석음 마음 때문에 자꾸 주면 내가 가난해 질 거 같고 없어질 거 같고

자꾸 줘야 더 부유해지고 더 풍요로워지고 더 자꾸 주는 마음 자체가 부유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내가 기쁨을 주고 나면 웬지 기쁘잖아요? 물론 주고 나면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퍼요.

줘서 기쁜 마음은 내 깊은 내면에서 정말 眞理와 合一하는 마음이 기쁜 겁니다.

주고 나서 괜히 찝찝한 마음은 我相이 作動하는 거에요.

그래서 뭐 주고 싶을 때는 베풀고 싶을 때는 나중에 해야지 생각만 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냥 바로 저질러야 합니다 뭔가 좋은 일 하고 싶을 때는 바로 저질러야 합니다.

 

저질러라, 실천이 성불의 지름길이다. 그런단 말이죠.

내가 잠시 후에 해야지 하면 절대 못합니다. 잠시 후 시간이 지나면 자꾸 我相이 介入돼 가지고.

자꾸 좀만하지 좀만하지 하다가 못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바로 저질러 버려야 해요.

행동해서 딱 저질러 버리던가 말이라도 해서 딱 저질러 버리던가

 

이렇게 我相 本位의 삶을 살던 지금까지의 인생을 계속 살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번 生은 그냥 空 치고 저 세상으로 가는 겁니다.

그야말로 이번 生을 왜냐하면 이번 生에 사람으로 나온 理由가 제가 1학기 때 말씀 드렸는데

人間 몸을 받아 태어나는 理由가 뭐냐 하면 주로 많은 사람들이 天上 世界에서 人間世界로 내려온단

말이죠. 천상계에 있는 수 없이 많은 存在들이 서로 너도나도 인간세계로 가고 싶어 합니다.

천상계는 모든 것이 인간세계보다 훨씬 즐거워요.모든 것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바로 만들어지니까

마음만 먹으면 바로 먹을 거리고 차고 집이고 뭐 금방 다 만들어진단 말이죠.

우리 이 아름다운 경치가 우리 눈으로 보면 이만큼 아름답지만 천상의 눈으로 보면 더욱 더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날마다 찬탄찬탄의 연속일 수 있어요. 그런데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前까진 그 놀라운

아름다움과 놀라운 풍족함 속에서 滿足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 富者들이 그러잖아요. 부자가 되면 맛 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하면 좋겠다 하지만

더 좋은 걸 자꾸 찾듯이, 천상세계의 수 많은 神들이 천상세계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지만

아무리 그렇게 풍족하게 살아도 깨달음이 더딘 겁니다.

여러분 저 돈 많은 부자들은 절에 와서 修行 안 하듯이

천상세계의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修行하겠다는 生覺을 못해요.

그러다 나중에 그것조차 너무 행복하니까 너무 지루하고 뭔가 깨달음이 完成되지 않으니까

뭔가 精神的인 進步가 없으니까 그 중에 이제 한 生覺 돌이켜서

뭔가 내가 정신적인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찾고 찾고 찾기를 갈구한단 말이죠.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단 말이죠. 마음을 내면 發見합니다. 이게 또 宇宙의 法則이에요.

 

마음을 내면 發見한다는 法則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스승을 찾으면 스승을 발견하고, 돈을 찾으면 돈을 발견합니다.

풍요를 찾으면 풍요를 발견합니다. 뭐든지 아무런 차별 없이 마음을 내면 발견합니다.

단 여기는 前에 말씀 드린 것처럼 執着 하면서 마음을 내면 발견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미궁으로

빠져요 그러나 執着 없이 選好하면서 뭔가 마음을 내면 발견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天上世界의 神들이 ‘뭔가 確實하게 깨닫는 方法이 없을까?’하고 마음을 내다 보니까 발견하는

겁니다. 그 길을, 그 길이 뭐냐 하면 人間世界라는 또 다른 可能性을 發見하는 겁니다.

그런데 좀 無知한 天上世界 神들은 처음에는 人間世界의 삶을 딱 보고 나서는

‘어휴, 나는 안 가야지’라고 生覺합니다. 첫 마음은. 왜냐하면 인간계는 천상계에 비해서 너무

괴롭거든요. 말 그대로 苦海 그 自體거든요. 천상세계 신들이 인간계를 보면 말도 안 되는 거 가지고

고집을 부리거든요. 예를 들어, 지네는 인간세계에서 一秒 二秒 살다 오는건데, 人間들은 80년이라

생각하고 千年 萬年 계속 살거라고 錯覺하고 사는 거에요. 인간들을 보니까.

 

잠깐 因緣 따라 만들어진 여러분 지난밤 꿈꾼 거랑 똑 같은 것인데

그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진짜인 것처럼 錯覺해 가지고 사람을 괴롭혀 가면서 내가 부자가 되려고

남들에게 해꼬지 해 가면서 짓밟고 일어나 가면서 내가 더 잘돼 보겠다고 싸우는 거죠.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천상세계에서 지켜 보니까 얼마나 어이 없고 얼마나 우습고 그러겠습니까.

저렇게 無知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니까

저들이 인간들이 진짜 나쁜 놈이라서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天上世界 神들은 肉身이 없잔습니까.

人間世界의 屬性을 통해서 이 人間 몸을 받다 보니까 몸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몸뚱아리를 나로 錯覺하는 게 人間이에요. 몸뚱아리를 나로 錯覺하다 보니까 몸에 執着하는 거에요.

고기덩어리 肉身 그것이 난 줄 알고 그것이 人間世界 特性이에요. 執着이 쉽게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배웠냐 하면 執着하는 놈은 나쁜 놈 佛敎에서는 執着하는 놈은 나쁜 놈이고

執着을 버려야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배워서 여러분들이 錯覺하고 살았어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이런 二元論이 아닙니다.

수행 잘 하는 사람은 훌륭하고 수행 못 하는 사람은 못난 놈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수행이 아직 안된 사람은 執着이 많은 사람은 단지 아직 공부를 시작한 단계에 불과한 거에요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사람이 아닌 겁니다. 다만 늦게 시작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지

나도 똑같이 걸어왔단 말이죠. 그 자리를. 그 사람을 미워하고 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人間으로 태어나 가지고는 我相이 있기 때문에

我相을 充足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그러한 노력도 있지만 이렇게 괴롭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에너지도 同時에 있게되는 겁니다. 그래서 크게 괴로워한 사람이 크게 깨닫습니다.

크게 아픔을 느낀 사람이. 절에 오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날마다 幸福하면 절에 잘 안 오죠.

뭔가 힘들고 괴로운 게 있었으니까 절에 오기 시작합니다.

하다 못해 자식이 시험이 있거나 , 남편이 진급 들어가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주로 이렇게 뭔가 일이 있을 때 절에 오기 시작한단 말이죠. 정말 힘든 일이 생겼거나

그럴 때 절에 와서 마음工夫를 시작하면서...

 

天上世界 神들은 修行을 하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죠. 그냥 편하니까.

인간세계에 있다 보니까 苦海를 건너 가려면 고해를 빨리 건너가고 싶은 마음이 든단 말이죠.

분발심이 일어난단 말이죠. 분심이 일어나고. 그러니까 이 길을 알았을 때 수행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인간세계는 천상세계에 비해서 놀랍게 修行이 빨리 일어나는 곳이고 놀랍게 福을 빨리 지을 수

있는 곳입니다. 福과 智慧가 놀랍게 增長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地球行星의 特徵입니다.

人間世界의 特徵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人間 몸 받아 태어나기가 얼만큼 어렵다고 하셨냐 하면

천상세계 신들이 수조 수억의 신들이 자원을 한단 말이죠. 인간세계로 가겠다고.

왜 자원하겠어요? 어차피 힘든 건 뻔하지만 천상세계에서 봤을 때 어차피 힘들어 봐야 어차피

오분 십분인데 한시간 두시간인데 그 정도 힘든 거 천상세계 신들이 감당 못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 감옥 가 가지고 일년만 살다 오면 한 백억 줄게 이러면 간단 말이죠

제가 어떤 사기치신 분을 봤거든요. 한 칠십몇억을 사기 쳤는데 그 분이 사기 쳐 가지고 그 번

돈으로 비싼 변호사를 사 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고 일년인가 밖에 징역이 안 나왔어요.

갔다 오고 나서 ‘그 돈 내 꺼’하는 사람을 봤어요. 감옥 갔다 온 사람 거지.

 

이것처럼 천상세계 신들이 봤을 때는 인간세계로 가는 게 좀 힘들지만 기가 막힌 機會인 겁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다 지원을 하는 거에요. 여러분 공무원 칠천대 일도 있고 막 이렇던데 이건

경쟁률도 아닙니다. 수백 수조대 일 정도. 무한한 어느 정도 경쟁률이겠습니까?

이 宇宙에 우리가 알고 있는 發見한 별들 銀河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 無窮無盡한 限도 끝도 없는 그 銀河 속에 어떻게 生命이 없다고 하겠어요?

수 없이 많은 그 銀河 속에 살고 있는 無數히 많은 限도 끝도 없는 生명들 天神들

이런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너도 나도 인간세계를 지원한단 말이죠.

인간세계는 그런 독특한 곳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거는 겨자씨가 저 수천미터 상공에서 탁 바늘 하나 떨어 뜨려 가지고

조그만 겨자씨를 정확히 떨구는 만큼 人間 몸 받아 태어나기는 어렵다. 즉 당첨되기가 어려운 겁니다.

너 정도면 인간세계에서 다소 힘든 일을 경험할 지라도 그만큼 크게 깨달을 수 있겠구나 하고

宇宙 法界가 보낸단 말이죠. 그렇게해서 여러 분들이 이 人間世界에 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宇宙法界의 뜻과는 다르게 많은 衆生들이 어리석게도 그냥 欲心만 부리고

이 世上과 이 肉身 이게 막 진짠줄 잘못 알고 貪嗔痴 三毒에 빠져서 물들어 살다가

그냥 自己 좋은 거만 하고 自己 利己心 我相만 늘리다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마음工夫를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미리 깨닫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觀點에서 봤을 때 貪嗔痴 三毒心이 있다고 해서 나쁜 놈은 아니에요.

 

불교공부 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라 할지라도 나쁜 놈 實力도 없고 能力도 없고 修行도 안하고

나는 修行을 해서 열심히 공부 하는 사람인데 저 사람은 공부도 안 하는 어리석은 이렇게 얕보는

그런 마음은 불교의 불자들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 삶의 構造는 알지만 그것이 나쁘거나 좋은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아요.

여러분 크게 아파하는 사람일수록 더 크게 깨칩니다.크게 아파하고 크게 挫折하고 크게 執着하니까

우리보다 한참 뒤떨어진 거 같이 느껴져요.그런데 크게 執着하고 크게 欲望하고 크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더 크게 깨달을 수 있단 말입니다. 우리보다 더 빨리.

 

그러니까 제가 지난 학기에 여러분이 저보다 빨리 부처가 될 수 있단 말 했죠.

저는 대놓고 이 옷 입고 이걸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니까 저는 스님들 사이에 그래요.

衆生들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네 가지 밖에 없는데

스님들은 중생들보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보다 더 强한 相인

중상(스님이라는 相)을 가지고 있다. 내가 스님인데 하는 相, 내가 스님인데 중생들보다 낫겠지 하는 相

이런 相을 가지고 있다고 우스개로 얘기 한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농담 삼아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먼저 깨달으시면 먼저 부처가 되시면 저를 救濟해달라고..허허허....

해 주실 겁니까? (네) 대답 안 하신 분들도 많으신데요. 이렇게 工夫 因緣을 자꾸 지어가는 거에요.

 

제가 우스개로 그냥 던지는 말이지만 여러분들이 ‘네’ 하고 대답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이 하나의 마음을 일으킴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의 發願인 거에요.

마음을 낸다는 거 마음을 내게 되면 그것은 그 마음이 現實로 언젠가는 이루어 지는 것으로

作動을 합니다. 이것이 宇宙의 法則이거든요.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單純한 얘기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지금 언뜻 이거 뭘 별 얘기 아닌 것을 이걸 뭘 대단하다고 했느냐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일인데 그것도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涅槃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이런 마음으로 살아라’ 했단 말이죠. 중생들한테.

一切衆生을 救濟하겠다는 마음 일체중생의 苦痛을 소멸시켜 주겠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런데 그렇게 살라고 하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工夫하면서 그렇게 살아요.

利他的인 마음을 가지고 살고 남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산단 말이죠.

여러분들은 열심히 사시고 공부도 하시고 수행도 하고 열심히 사십니다.

 

그런데 거의 百이면 百 어떤 誤謬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열심히 중생구제를 하는 사람은 열심히 남을 돕는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

‘난 잘 돕는 사람이야 난 이타적인 사람이야, 나는 너희들 같이 수준 낮은 사람들과는 격이 달라’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我相입니다.

 

얼굴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이 예쁘고 잘 생겼는데 재수가 없는 건 뭐냐 하면

지가 예쁘고 잘 생겼다는 걸 알 때 재수가 없잖아요. 이것처럼 분명히

나는 이타적이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중생을 구제하면서 참 잘 살고 있는데

스스로 나는 그렇다라는 相을 가지고 있으면 이게 재수 없는 거란 말이죠.

이게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誤謬입니다.

수행자들이,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은 이 誤謬를 우스개로 넘기시지만

실제 삶의 現場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極限 狀況에 極端的인 경우에 어떤 보살님하고 아들 이 두 사람이 절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기도하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 며느리가 새로 들어 왔어요.며느리는 기독교를 믿다가

하도 아우성치니까 어쩔 수 없이 아무 교회도 안 가다가 절에 한 번 두 번 나가기만 하는

며느리였는데 이 남편이 밥 먹듯이 아내한테 하는 말이 그거라는 거에요. ‘야 네가 좋은 줄 모르겠어?’

‘法門을 듣고 와서도 너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거에요.

‘넌 참 진짜 水準이 안 맞아서 같이 뭘 못하겠다고’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도 마찬가지에요. ‘야 너는 기도를 안 해서 그래’

‘기도도 안하고 절에도 안가고 수행도 안 해본 애가 그러니까 너가 이렇게 밖에 자식을 못 기르는 거야.’

하면서 자신들은 修行을 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들이고, 수행도 안 한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집에 왜

들어왔는지를 모르겠다 하면서

 

그래서 이 며느리가 오랫동안 십년 이십년 오랫동안 불교를 증오하면서 불교를 미워하면서

불교공부해 봤자 저런 사람들이 되겠구나 불교공부하면 저렇게 되는 거구나.하고 불교에

마음을 딱 닫고 지낸 겁니다. 마음을 닫고 지내다가 당신이 한 오십이 넘고 되다 보니까

이제 불교공부를 하다가 저한테 그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런 놈들 그런 놈이 내 남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다 보니까 그 마음이 뭔지 알겠다.

남편이 그 때 뭐에 빠져 있었는지도 알겠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거였구나

남편이 이 앞에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이 수 없이 많은 衆生들을 濟度했지만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는 事實.

 

렇기 때문에 내가 제도했지만 제도했다는 相을 내면 안 된다는 事實 그 事實을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 남편이. 道가 좀 깊지 못했던 것일 뿐이지, 우리 남편도 열심히 열심히 그 단계를 오르고 있던

사람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는 거죠.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아무리 해도 내가 이만큼 제도했다 내가 이만큼 보시했다는 相을 내는

마음을 내면 마음工夫와는 아주 멀어집니다. 相을 내지 않으면 宇宙法界의 놀라운 無窮無盡한 償을

받게 되는데 내가 내 스스로 償을 받겠다고 내 입으로 얘기해 버리면 거기서 벌써 福을 까먹고 끝나는

거에요. 예를 들어, 정말 힘든 누군가를 위해서 그냥 남 몰래 힘든 소년 소녀 가장을 보고 그 가장에게

가 가지고 그냥 집을 하나 만들어 줬거나 아니면 내가 장학금을 줬거나 학비를 대줬거나 이렇게 했는데

해준 것까지는 딱 좋은데 그러고 나서 내가 相없이 布施해야지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도 몰라

주니까 입이 근질근질하고 누군가가 좀 알아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주는 거지. 어떻게 좀 누가 알아주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이런 마음이 자꾸 든단 말이죠.

그런데다 남들이 나한테 利己的이다라고 한두마디 하고 나면 더 발끈 해 가지고

‘야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고 더 얘기하기 쉽고 이런 마음이 드는 게 我相의 屬性이기 때문에

그 자체도 나쁘다 얘기 할 순 없겠지만 그런 마음의 相이 드는 것을 우리가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觀察하고 아, 이렇게 我相이 또 올라오는구나 하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잘했어도 잘한 것을 덮어 놨을 때는 정말 宇宙法界로부터 그 償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받는 償은 想像할 수 없는 요 뒤에 이제 나오는데요.

四維上下虛空 즉, 온 宇宙法界 全切를 칠보 금은보화로써 잔뜩 갖다가 布施하는 것보다

더 큰 功德을 받게 된다는 거죠. 相 없이 布施 하게 됐을 때는 또 法을 보시하게 됐을 때는..

그런데 相을 내게 되면 내가 일부러 야 사실 나 이러이러한 보시를 했어 이렇게 좋은 일을 했어

얘기함과 同時에 이미 벌써 지은 福德을 다 까먹어 버리니까 그 功德을 거기서 다 받아 버리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남들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뒤늦게 저 사람이 이렇게 했구나 이걸 알게 될 때는

그 사람 참 대단해 보이죠. 그런데 자기 입으로 계속 여기 가서 저기 가서 내가 좋은 일 했다 자꾸

얘기하는 사람 보면대단해 보입니까? 별로 안 대단해 보이죠.

실제 이 사람은 대단한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아요. 이게 我相입니다.

我相을 자꾸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면 그것은 벌써 복덕 공덕을 다 까먹는 거에요.

 

그런데 몰래 아무도 모르게 했는데도 사람들이 어떻게 알게 됐다면 정말 찬탄을 받고

그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조차 없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감쪽같이 몰랐다.

그러면 거기서 끝난 걸까요? 宇宙法界가 다 보고 다 안단 말이죠.宇宙法界는 記憶하고 있다.

宇宙法界는 다 알고 다 본다(悉知悉見) 그 다음 生에 놀라운 찬탄 받을 일들이 벌어진단 말이죠.

宇宙法界 많은 사람들에게 尊敬 받고 讚歎 받는 일들이 벌어지고

내가 힘들 때 宇宙法界가 나를 도와주는 일들이 適在 適所 適時에 생길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이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그렇게 相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 相이 뭐냐?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한중생도 救濟한 바가 없다고 하느냐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다 보면

금강경에도 수도 없이 나오구요. 도대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뭐냐에 대한 내용이 책들마다 분분하게 다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의 옛날 책들을 보면 나름대로의 我相은 뭐고 人相은 뭐고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었는데요. 빨리어 경전이 번역되기 前에는 漢文本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라는 한문본 가지고만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네가지 相 이게 도대체 왜 나왔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한문 뜻만 보고 ‘이런걸거야’ 하고 해석했던 책들이 많았었습니다.

이제는 原典도 나오게 됐고 또 그 當時 많은 불교학이 정리가 되면서 이것이 나오게 된 이러한

용어들이 나오게 된 그 당시 時代的인 狀況들이 이제 다 파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뭔지가 구체적으로 이제

드러나게 되는데요. 쉽게 말씀 드리면

 

아상은 부처님 당시에 代表的으로 我相이라고 하는데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모두는 根源的으로는 다르지 않은

네 가지 相 모두가 하나의 我相이라는 것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아상(我相)’은 부처님 당시에 印度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때는 힌두교가 아니라 바라문교를 믿고

있었죠. 바라문을 바라문교를 믿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바라문교에서 얘기하는 '아트만'이라는

바라문교에서는 내가 죽고 나면 絶對 消滅되지 않는 '아트만'이라는 나의 實體가 있다고  

나라고 믿고 여기게 하는 어떤 個性的인 實體가 있다고 生覺해서내가 죽고나면 아트만이 다음 생으로

輪廻를 한다. 그 아트만이 계속 輪廻를 한다고 生覺한 거에요.

그 아트만은 고정된 실체다 이건 절대 깨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죽고 나면 힌두교의 책 같은 거에 보면 사람이 죽었을 때 빛 같은 아트만이 요렇게 떠올라

가지고 다른 사람 존재로 가고 다른 사람 존재로 가고 하는 그림 같은 것도 볼 수 있는데

그것처럼 아트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印度 全域에 緣起法을 설해야 하는데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설해야 되는데

인도 전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거 안에 아트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錯覺하니까

그것은 實體가 있지 않다. 그러면 나라는건 뭐냐  아트만이라는 것이 나를 구현해 내고

내가 선을 짓든 악을 짓든 아트만에서 다 記憶하고 있는 거 아니냐?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다만 因緣따라 모였다가 因緣따라 흩어지는 거 뿐이다.

하고 緣起法을 설하시는데 그걸 印度人들이 理解하기 쉽게 無我라고 설한 겁니다.

즉, 아트만은 없다 固定된 自我라는 實體는 없다 라고 설한 겁니다.

아트만 그것이 여기서 말한 我相이에요. 我相, 아트만 思想을 無我相이라고 해서 아트만은 實體가

아니다 라는 것을 부처님이 설하신 거구요.

 

또 人相이라는 것은 부파불교에서 이 금강경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백년 뒤에 부파불교가

일어나게 됐고 AD 1C BC 1C까지 부파불교가 한참이었다가 그 전후로 기원전 전후로 해서

大乘佛敎가 太動을 하고 그러면서 大乘經典이 만들어졌죠. 그 시기에 부파불교가 한참 있던 시기에

금강경이 완성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부파불교 중에 독자부라는 부파에서 부파불교가 지금

우리가 부파불교의 가르침을 지금 공부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부파불교는 너무 현학적으로 치우치다 보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수행으로 증득하려 하지 않고

논리적인 이해로만 따지려 했고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를 못해서

못한 어떤 誤謬를 범했습니다.그래서 아공법유(我空法有) 법의 실체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

알갱이로 존재하는 뭔가가 있다 라고 생각을 했고

 

독자부에서는 輪廻를 한다고 하셨는데 부처님께서 自我가 없다고 하니까 내가 없다고 하니까

내가 없는데 어떻게 輪廻를 하지 그러니까 이 독자부에서는 뭐라고 했냐면

푸드갈라(Pudgala)라는 것을 想定을 한 거에요. 輪廻의 主體인 푸드갈라가 있다.

唯識에서는 그것을 阿賴耶識(아뢰야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푸드갈라라는 윤회의 주체를 變치 않는 實體로 여긴 겁니다.

푸드갈라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윤회해서 다음 생으로 간다라고 해석을 했던 거에요.

그랬더니 이 금강경에서 人相이라는 게 그겁니다. 이 푸드갈라라는 것, 이것 또한 實體가 아니다

잘 못 된 것이다. 라고 설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人相의 의미구요.

 

또 衆生相이라는 것은 불교 내부에서 두 개로 나누는 겁니다.

菩薩과 衆生을 差別해서 불보살의 경지가 있고 중생의 경지가 있어서 불보살과 중생은 서로 다르다

差別相을 일으키는 겁니다. 나는 부처가 아니니까 나는 부처보다 못한 존재고 별볼일 없는 존재구나.

이렇게 자꾸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이런 어떤 相에 빠지는 겁니다. 내가 못났다는 相에 빠지는 거에요.

또 반면에 나는 중생이고 나는 인간인데 저 無生物들, 풀이나 自然이나 나무 한그루 이런 것들은

無生物로서 人間보다 못하다 動物들은 인간보다 못하다.

인간을 優越하게 생각하고 동식물은 아주 劣等하게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 위로 比較하거나 아래로 比較하면서 둘이 아니다라는 自覺을 하지 못한 채

위나 아래로 比較하면서 내가 잘났다거나 못났다라는 相에 빠지는 거죠

그 相에 빠지는 것을 衆生相이라고 이름 붙인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壽者相은 지바(jiva)라고 해서 자이나교 당시에 지금도 있죠.

자이나교 교주가 마하비라(Mahāvīra )는 교주가 니간타나 타풋타( Nigantha Naptaputta ) 불리는

敎主였는데 그가 자이나교를 만들었는데 자이나교에서도 지바라고 하는 아트만이라고 부르지 않고

지바라고 하는 純粹 靈魂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지바라는 순수 영혼이 우리가 죽더라도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實體로써.

 

이렇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은 전부 다 공히

‘나라고 생각을 하는 相’ 나라고 하는 相이 實體가 뭐냐? 實體가 있다라고 하는 데서 出發하는

그 당시의 불교 내적인 외적인 부파적인 혹은 브라만교적인 자이나교적인 모든 것에서 모든 사상에서

얘기하는 實體 觀念을 打破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전에서는 사상(四相)을 얘기하지 않고

구상(九相)이라고 해서 아홉가지를 얘기하기도 해요.

그것은 그 당시 나온 수 많은 實體論을 打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표적으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브라만교와 자이나교 부파불교 불교 내적인 이런 4가지 相이 이것이 代表가 되기 때문에

四相만을 얘기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 四相은 여러 분들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全部 다 我相, 나라고 生覺하는 固定된 實體를 無我라고 해서 그 無我 思想으로 고정된 실체로

여기는 四相을 打破하고자 하는 것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라는 용어구나 하고 우선 기본적인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