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십이연기 각 지분을 통해 본 열반 해탈 방법

장백산-1 2015. 8. 30. 16:22

 

 

 

십이연기 각 지분을 통해 본 수행법 - 십이연기(3)|불교기본 교리강좌         

법상 ㅣ 2015.08.30. 12:56 http://cafe.daum.net/truenature/KKTo/52       

 

 



 

 

십이연기 각 지분을 통해 본 핵심 수행법

 

이상에서처럼 우리는 괴로움(苦)이 왜 생겨났는지를 순차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원인이 열 두가지

연결고리의 지분에서 기인함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십이연기의 어느 한 지분을 消滅시킨다면 그 다음의

지분이 연이어 消滅되고, 결국 노사와 우비고뇌라는 모든 괴로움이 消滅될 것이다. 즉 십이연기의 12가

지분들은 각각 그것 자체로써 消滅해야 할 괴로움의 원인이며, 그 지분 중에서  어느 한 가지 지분을

消滅시키더라도 결국은 老死라는 窮極的 괴로움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교를 공부하다보면 불교교리와 실천수행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며, 모두 다 핵심 가르침

이라고 하니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핵심 가르침이고 실천인지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어떤 경전에서

는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 불교의 요체라고 하고, 또 다른 경전에서는 집착만 버리면 열반에 이른다고 하고,

또 어떤 스님들은 애욕이야말로 끊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며, 또 어떤 가르침에서는 업장만 소멸

하면 열반에 이른다고 말한다. 또한 분별심만 타파하면 된다고도 하고, 느낌을 잘 관찰하기만 해도 된다고도

하며, 육근관찰을 통해 육근이 청정해지면 그것이 바로 궁극의 경지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불교는 핵심이 많은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진짜 핵심일까? 왜 이렇게 경전마다,

스님들마다 다 중요하다고 하는 내용이 다른 것일까? 더욱이 실천적인 부분에서는 더욱 헷갈린다.

악업을 닦거나, 업장 소멸이 가장 중요한지, 분별심의 타파가 더 중요한지, 육근관찰이 중요한지,

수념처라는 느낌관찰이 중요한지, 애욕의 타파가 중요한지, 무집착의 실천이 중요한지 그 누구도

이것 하나만이 최고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십이연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에 의하면,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소멸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특정한 지분만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지분을 소멸하게 될지라도 결

국에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각각의 지분이 모두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도 소멸되는 연기적인 상의상관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이것만이 최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수행을 해도 좋고, 저 수행을 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 모든 다양한 수행법이 모두 다 고통의 소멸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고의 소멸이라는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12연기의 각 지분에서 말하고 있는 ‘고의 소멸’을 위한 실천수행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無明’의 지분에서는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다. 아마도 많은 불자들

이라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명을 타파하고 지혜를 드러내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무명의 타파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대승경전의 시초인 반야경에서는 반야

지혜를 닦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핵심임을 설하고 있다. 반야바라밀다, 즉 智慧의 完成이야말로 반야경

의 최고의 목적인 것이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무명을 타파하여 ‘명(明)’ 卽 밝은 智慧를 드러

내는데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연등을 달고, 인등을 켜며, 불전에 촛불을 밝히는 모든 행위가 무명을

타파하고 밝은 지혜의 등불을 켠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

에서는 무명의 타파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 된다.

 


두 번째 ‘行’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業의 淨化와 業障消滅, 선업의 증장과 악업의 소멸에 있다. 業이

完全히 消滅되면 그것이 곧 涅槃이다. 더 이상 태어날 原因이 없어진 것이다. 많은 스님들은 설법할 때

‘업장소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금강경]에도 能淨業障分에서, 能히 業障을 깨끗이 맑혀서 消滅

하는 것에 대해 설하고 있으며, 진언수행에도 관세음보살 滅業障眞言과 지장보살 滅淨業다라니가 있다.

그만큼 불교의 실천에서 업장소멸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業의 消滅이 곧 모든 괴로

움의 소멸이라는 십이연기의 行의 支分에 기인한다. 초기불교의 중요한 수행법의 모음인 삼십칠조도품

중에는 四正勤이 있다. 사정근은 모든 악업을 끊어 없애고 모든 선업을 키우기 위해 정진하는 수행을 의

미한다. 사정근의 첫째는 律義團으로 아직 생기지 않은 악업을 끊기 위해 힘쓰는 것이며, 斷斷은 이미

생긴 악업을 끊기 위해 힘쓰는 것이고, 隨護斷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드러내기 위해 힘쓰는 것이며,

修斷은 이미 생긴 선업을 잘 키우기 위해 힘쓰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정근은 곧 업을

잘 다스리기 위한 수행법인 것이다.

 


세 번째 ‘識’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분별심의 타파’에 있다. 식은 ‘알음알이’, ‘분별심’을 의미한다.

스님들의 설법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바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설법이다.

사찰에 가면 일주문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고 하여 ‘이 문 안으로 들어오는 자

는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고 쓰여 있다. 이는 [전등록]의 평전보안 선사의 법문으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등 많은 스님들의 가르침에서 인용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처럼 식의 타파, 즉

분별심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불법수행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어 오고 있다. 승찬대사는 [신심명]

에서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고 하여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분별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 좋다거나 싫다는 분별심만 일으키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해질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分別心을 여의는 것이야말로 곧 깨달음의 길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唯識思想에서도 전식득지(轉識得智)

라고 하여, 우리의 사량 분별심인 식을 지혜로 바꾸는 것을 중요한 실천으로 삼고 있다.

 


네 번째 ‘名色’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이름과 형색’, 혹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데 있다. 名色은 認識의 對相을 뜻하니, 인식의 대상에, 특히 바깥 대상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의미

한다. 자기 안에 중심을 세우고, 바깥 대상에 끄달리지 말라는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오랜 법문이다.

名色은 곧 五蘊이며 六境이라고 할 수도 있다. 五蘊이 實體가 아닌 無我인 줄 알고, 바깥 境界인 六境이

곧 六塵으로 티끌 같은 것인 줄 안다면 명색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이름과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형색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행인에게 중요한 실천수행이다. [금강경]에서는 ‘여래는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라고 설한다’거나, ‘가히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삼십이상이 아니며 그 이름이 삼십이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실상은 곧 실상이 아니므로 실상이라고 여래는 설하셨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나니 다만

 이름이 중생인 것이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과 형색이라는 것은 다만 이름 지은 것일 뿐 실체가

아님을 무수히 설하고 계신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가르침 또한 색이라는 것이 곧 空임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명색이란 이름이 명색일 뿐 실체가 아님을 깨달을 때 명색의 지분이 소멸되어 곧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六入’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六根淸淨과 六根觀察에 있다. 앞서 六根에서 설명한 것처럼

육근청정은 육근을 잘 조복받고, 수호하며, 잘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六根을 通해 六境을 接

할 때 分別이 介入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육근이 청정하면 눈을 통해서 

대상을 보더라도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며, 귀로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 좋고 싫은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듣게 되기 때문에 보고 들리는 경계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근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눈-귀-코-혀-몸-마음(眼根. 耳根, 鼻根, 舌根, 身根, 意根)을 잘 觀察함으로써

육근이라는 감각기관들을 通해서 어떤 對相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觸’은 단순한 육근과 육경, 육식의 접촉이 아니라, 이 세 가지 界域 즉, 眼界, 耳界, 鼻界, 舌界,

身界, 意界와  色界, 聲界, 香界, 味界, 觸界, 法界와 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인 18

界가 합쳐져서 接觸하게됨으로써 ‘무언가가 있다는 意識/認識’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즉 우리

의 生覺 마음 意識이 이 世上 모든 것, 一切法을 실질적이고도 실체적으로 ‘있다’고 여기는 실체론이 觸에

起因하는 것이다. 이 燭의 지분은 이러한 實體論을 打破할 것을 설하고 있다. 觸의 지분이 소멸하게 되면,

우리들의 생각 마음 의식은 觸을 통해 생겨나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실체론, 즉 허망한 착하는 생각 마음

의식을 타파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모든 存在의 非實體性과, 五蘊無我, 五蘊皆空, 一切皆空, 空과 緣起,

緣起空性, 無常性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五蘊이라는 存在는 實際로 實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十八界

因緣, 즉 緣起的인 條件에 따라서 觸함에 의해서 일어난 緣起的인 存在일 뿐이며, 그렇기에 五蘊이라

는 存在(色-受-想-行-識)는 無我性이고, 非實體性인 緣起的 空性임을 의미한다. 이 觸의 지분으로 인해

실체론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모든 쟁론들이 타파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운명론이나 우연론, 신의설

등을 삼종외도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이 모든 존재에 대한 설들이 ‘있다’라는 생각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

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이연기 중에서 觸의 지분은 모든 實體論的 思惟方式을 打破하고, 오온, 일체법,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물리적 정신적인 현상들이 모두 다 緣起的無我性, 無常性, 緣起的非實體性, 緣起

的空性의 존재들임을 밝혀 드러내 주고 있다.

 


일곱 번째 ‘受’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느낌’과 ‘감정’을 관찰하는 사념처 수행의 두 번째 ‘수념처’

수행에 있다. 느낌에 끄달리고, 집착하게 되면 그 느낌은 곧바로 애욕과 집착으로 나아가지만,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판단 없이 관찰하게 된다면 그 느낌은 더 이상 애욕과 집착으로 나

가지 않는다. 느낌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다룸으로써, 그 느낌의 비실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수의 지분에서 중요한 수행은 이처럼 느낌관찰, 즉 수념처에 있다.

 


여덟 번째 ‘愛’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愛欲과 欲望, 渴愛의 消滅에 있다. 앞서 12연기의 지분에서

설명한 것처럼 괴로움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애욕이며, 모든 괴로움은 애욕이 根本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애욕과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수행자들의 戒律에

그토록 애욕과 갈애를 즐기지 말 것을 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분율]에는 ‘애욕은 착한 가르침

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 버린다. 애욕은 늪과 같고, 꽁꽁 묶인 밧줄과 같고, 시

퍼런 칼날과 같다. 애욕은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성난 독사를 건드리는 것과 같고, 더러

운 시궁창과 같다.’고 했다. 또한 [법구경]에서는 ‘애욕은 마치 횃불을 잡고서 바람을 거슬러 달리는 것

과 같아서 반드시 손을 태울 염려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애욕으로 얽어매어 피안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한다. 애욕은 남도 해치고 자기 자신도 해친다.’라고 함으로써 애욕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애욕과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아홉 번째 ‘取’의 지분에서는 당연히 ‘無執着’, ‘放下着’, ‘無所有’ 卽, 執着하거나 取하지 않는 수행의 실천

을 설하고 있다. 법정스님께서 무소유를 설하신 것도, 불교에서 그토록 ‘집착을 놓으라’고 하는 이유도,

선가에서 ‘방하착’을 설하는 이유도 모두 십이연기의 취의 지분에 대한 소멸을 설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

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전에서도 취착의 위험을 설하고 있다.

 

먼저 [잡아함경]에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貪心을 끊어버리기

위함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것에 성내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嗔心을 없애기 위함이다. 어리

석은 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癡心을 끊기 위함이다. 수행은 執着하지 않고 動搖하지

않는 智慧의 연마이다.’라고 했고,

 

『涅槃經』에서는 ‘집착하는 까닭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기는 까닭에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는 까닭

에 생로병사와 근심, 슬픔, 괴로움과 같은 갖가지 번뇌가 뒤따르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華嚴經』에서는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取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훗날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라고 했다. 또한 『금강경』에서는 ‘마땅히

法에도 執着하지 말고, 法 아닌 것에도 執着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如來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는 나의 法門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 했으니, 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法 아닌

것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함으로써 眞理/法 그 自體에 대해서도 집착해서는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이처

럼 불교에서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집착까지도 경계하고 있을 정도로 무집착에 대한 가르침을 중요한

실천으로 여긴다.

 


열 번째 ‘有’는 앞서 설한 行의 지분에서와 같이 業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業들이 쌓여

다음 生의 原動力이 되는 業有로 익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이 有의 지분에서

소멸할 것은 단순한 하나하나의 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業이 모이고 쌓여 結局에 다음 生에

어떻게 태어날 것인지, 어떤 존재로 태어날 것인지를 결정지을 만큼 業의 勢力이 强化되고 쌓인 業有

를 消滅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에는 욕유, 색유, 무색유가 있지만, 욕계와 색계, 무색계는 그 각각의 세계

안에 무수히 많은 무량한 세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생의 종류로 곧 태어나게 될 업유들

이 그만큼 무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마다 각자 지은 업들이 모여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가

결정되는 원인이 業有인 만큼, 이 有의 지분이야말로 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

보듯이 有의 지분 또한 소멸해야 하는 것인 만큼 불교에서는 欲有, 色有, 無色有 또한 소멸되어야 할 것

이며, 그 有를 原因으로 해서 태어나게 되는 世界인 欲界, 色界, 無色界 또한 結局에는 소멸되어야 할 것

으로 본다. 이 말은 깨달아서 붓다(覺)이 된다는 것은 곧 欲界와 色界, 無色界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佛敎의 目的은 三界와 六道 가운데 가장 좋은 하늘세계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三界와 六道

를 넘어서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처음 태어나실 때 東西南北으로 일곱 발자국

을 걸으심으로써 六道輪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生’을 소멸하는 것이다. 生의 지분을 소멸한다는 것은 六道輪廻를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향사과라는 초기불교의 수행단계를 보면 豫流, 一來, 不還, 아라한을 설하고 있는데, 豫流는 아직 7번을

더 천상과 인간계로 왕래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단계이며, 일래는 한 번만 더 태어남을 받으면 되고,

불환에서는 더 이상 생을 받아 되돌아 올 필요가 없는 깨달음의 단계를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심으로써 더 이상 生을 받지 않는 完全한 涅槃에 이르셨다. 生을 消滅한다는 것은, 不生不滅이라는 理

致 卽, 本來 나고 죽음이 없는 理致를 깨닫는 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어리석은 意識에서는 이 몸

마음이라는 五蘊을 보고  나라는 存在가 태어났다고 生覺하며, 五蘊이 消滅될 때를 죽음이라고 生覺함으로

써 生과 死가 따로 따로 분리 분별별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思考方式에 갇혀서,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

가 아닌 生과 死라는 現象을 實體的인 實在로 여기지만, 本來 五蘊 또한 無常 無我이며, 生과 死라는 夢幻泡

影 같은 現象 같은 것 또한 固定不變하는 獨立되고 實體的인 實體로서의 生과 死가 아니라, 단지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非實體的으로 虛妄하게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夢幻泡影 같은 緣起的인 現象일 뿐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태어남을 실체적인 ‘생’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실체적인 괴로

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生의 괴로움’이라는 巨大한 幻想이 緣起하는 것이다.

 


열 두 번째는 ‘老病死’의 消滅이다. 이는 곧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고해

(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말한다. 이는 한 번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늙고 병들어 죽음이라는 괴로움을 향

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本來 태어남이 없다는 不生不滅의 理致를 안다

면, 죽음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生이라는 단지 夢幻泡影 같은 現象에 불과한 非實體

的인 幻想을 實體라고 믿고 生覺하는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 때문에 老病死라는 몽환포영 같은 현상에

불과한 비실체적인 환상이 實體的이고 直接的인 苦痛으로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처음 부처님께서 출가할 때 출가하지 말라는 정반왕에게 ‘노병사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보통 우리는 부처님은 정각을 성취함으로써 생사를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은 생과 사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면서 왜 죽었느냐’고 질문한다. 이 십이연기를 보면

그 답이 보인다.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를 깨달으심으로써 생도 멸하고, 노사도 멸하신 분이다. 卽 生이

本來부터 없고, 老病死가 本來부터 없으며, 精神的 物理的인 이 世上 모든 것 一切법 宇宙森羅萬象萬物은

서로서로 連結되고 緣起되어 나타나보이는 듯한  비실체적 것, 단지 몽환포영 같은 現象일 뿐임을 분명히

보신 것이다. 이 세상이 無我性의 존재임을 보신 것이다. 肉身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괴로워하는 理由는,

나라고 하는 固定不變하는 獨立된 實體的인 存在가 정말 實際로 ‘있다’고 生覺하고 믿기 때문에 그 實在

하고 있는 고정불변하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내가 죽는다는 生覺, 幻想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나라고 여기는 五蘊이 無我임을 깨닫고, 그렇기에 生과 老病死가 本來 없다는 事實을 깨닫게 되면

精神的 心理的 物理的인 現象일 뿐인 이 세상 모든 것이 단지 꿈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몽환포영 같은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生과 死라는 幻想에서 벗어난 진정한 깨어남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를 통해 생노병사 우비고뇌의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셨다. 그리고 그 괴로움

을 소멸하는 과정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하셨고, 그 괴로움의 원인이 12가지 지분을 원인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두 가지 지분 가운데 어느 하나의 지분만 소멸되도 다른 지분 또한 소멸될 것이며, 모든

괴로움이 소멸될 것임을 보셨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불교의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져 오면서 수많은

경전과 수행자, 스님들은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소멸시키기 위한 다양한 수행방법과 가르침을 실천해 오고

있다. 불교의 수행방법에 수많은 방편이 있고, 수많은 깨달음으로 가는 가르침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십이

연기의 12개 각각의 지분의 소멸방법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다음 장에서는 생노병사라는 4가지 괴로움과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라는 4가지

괴로움인 四苦八苦의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인

四聖諦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가격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