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本性 외에는 부처가 따로 없다 [달마의 本性論 3]
그대가 자신의 無心, 無分別心을 보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만약 그대가 無心을 안다면 그렇게 많은 경전들을 외울 필요가 없다. 경전을 외우는 것은 아
무런 소용이 없다. 모든 부처들이 말한 경전은 그대의 無心을 보라는 方便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無心을 보지 않고 경전만 외운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전들은 그대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외에 그대에게 어떤 것도 더 이상 주지 못한다.
佛(부처), 본성, 불성을 찾기 위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대 自身의 本來 淸淨한 마음을 보는
것이 전부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그대의 無知, 靈魂의 暗黑에서 벗
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대 存在의 根源을 自覺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시간마저 멈춘다. 갑자기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를 전체의 일부가
되게 해주는 문이 열린다. 전체의 일부는 결코 전체보다 작지 않다. 이것은 존재의 수학이다. 全切는
部分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全切 거기에 어떤 나눔 어떤 分離 分別도 不可能하다.
그대의 本性이 바로 佛(부처)다. 그리고 부처는 自由로운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근심 걱정으로
부터 自由롭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本性을 보지 않고서 하루 종일 깨달음을 찾아다니더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터득할 수 없을 것이다.
眞理, 본성, 부처는 찾을 수 있는 어떤 事物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그대가 부처, 본성, 진리를 찾아서
온종일 뛰어다녀도 그 노력은 헛수고일 뿐이다. 나는 이 말을 證明할 수 있다. 이 말은 틀림없이 달마
로부터 나온 말이다.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 그대 自身이 이 世上 全部 다다.
진리, 본성, 부처를 찾고 있는 사람 자체가 바로 그 진리, 본성, 부처라는 보물이다. 그러니 다른 어떤
것도 자기 바깥에서 찾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예수가 한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구하라, 그러면 주어질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그대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은 아름답고 시적이고 인상적이지만
眞理는 아니다. 만약 그대가 달마에게 眞理를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찾으라, 그러나 그
대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는 행위 자체가 그대를 진리인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찾으려고 애쓰는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하나이며 全切이며 부처(佛)이다. 그러니 그대가
어디로 가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두드리지 말라, 자꾸 두드리면 門은 더욱 굳게 닫힐 것이다. 그대
가 두드리는 行爲, 그것이 바로 자신의 欲望과 바람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부처, 진리, 본성의 세계
에는 어떤 欲望도, 어떤 바람도 없다. 그래서 부처, 본성, 진리의 세계는 항상 門이 활짝 열려 있다.
구하지 말라, 자꾸 그대가 구하면 그대는 계속 잃어버릴 것이다. 구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구하는 그대
에게 구하는 것을 줄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대는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그것을 갖고 있다. 자꾸 그대
바깥으로 그것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그대는 허망하게 방황할 뿐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대는
본래부터 이미 완전무결하게 그것과 영원히 항상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에게 필요한 행위는 그것을 찾지 않는 것이며, 두드리지 않는 것이며, 구하는 행위를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 자신의 本性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記憶을 되새기는 것이다.
이 세상에 새로이 發見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이해에 도달하려면 그대는 스승이 필요
하다. 왜 그대는 스승이 필요한 것인가? 그대 안에 본래부터 이미 眞理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 편히
번뇌 망상 분별을 쉬면서 그대안의 진리를 인식하지 않는가? 문제는 그대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진리를
찾아서 세상을 방황했다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 마음의 고향, 자성청정심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잊고 살았
던 것이다. 그대가 그대 마음의 고향, 자상청정심의 집을 떠난 이후로 그것은 정말로 길고 긴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대가 그대 마음의 고향, 자성청정심의 집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집에 대한
그대의 기억은 마치 영화나 꿈속에서 본 것처럼 어렴풋하다. 아니면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 느낌이어서
멀리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다. 그것은 그대에게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은 그대에게 그대가 진리, 본성, 부처라는 확신을 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의
현존 때문에 어떤 꿈보다도 그것은 그대 내면에 절대적인 확신으로 떠오른다. 스승의 눈은 그대에게 그대
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도와준다. 그의 침묵으로 인해서 그대 안에서도 침묵이 일어나며, 그의 진실 덕
분에 그대 내면에서 眞實, 진리, 본성, 부처를 찾는 열망이 일기 시작한다. 달마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대에게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대 자신과의 갈등도 필요
하다. 삶과 죽음은 매우 고귀하다. 헛되이 그것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 그대를 속여 봐야 아무런 이익
도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속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거부가 되면 그들의 잠재력이 실현
될 것이라는 생각에 속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知識을 축적하는 일에, 권력을 모으고 명예를 얻는 일에
속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자나 고행자가 되면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에 속고 있다. 그러
나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본성, 진리, 부처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는 속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보석을 산처럼 쌓아 놓고 큰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그대의 눈이
열린 뒤에야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눈을 감고 있다면 무엇을 보겠는가? 그대가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대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달마의 말이 옳은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대가 궁전을
갖고 있더라도 눈을 감으면 그것은 사라진다. 그대의 세계가 그런 식으로 전부 사라진다. 아침에 그대가
눈을 뜨면 밤중에 꾸었던 모든 꿈들이 허망한 물거품처럼 사라지듯이 말이다. 그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밝은 대낮에 그대가 보는 것이 그것의 實體性 事實性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길
이 없기에 그것이 實體나 事實이 아니라는 疑心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 이
세상 이 모든 것이 꿈, 신기루,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가? 그대는 지금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진실인지 꿈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이
꿈과 다르다면 단지 그대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잠을 잘 때 꾸는 꿈속에서도 그대는 그
꿈이 결코 꿈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대에게 가장 이상한 神秘 중 하나이다. 生時에, 완전히
精神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대가 그 꿈의 實體性 事實性 여부를 疑心할 수 있다. 그러나 잠을 잘 때 꿈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 꿈이 眞實인지 아닌지를 疑心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사람의 의식은 그 꿈이 꿈,
환상, 신기루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달마는 그대에게 한 가지 예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대가 죽을 때 그대의 눈은 감겨질 것이다. 동양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다. 누군가가 죽으면 사람들은 즉시 그의 눈을 감긴다. 어렸을 때 나는 이 점이 늘
궁금했다. 왜 죽으면 눈을 감기는 것일까? 왜 그런 마지막 自由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모든 사람
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누가 죽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항상 거기에 가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내 질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왜 사람이 죽으면 그의 눈을 감기
는지 말이다. 잠을 자다가 죽지 않는 限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뜬 채로 죽는다. 죽는 순간 눈을 감는 사
람은 극히 드물다. 눈을 감는 行爲조차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대가 주먹을 쥐고 죽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주먹을 쥔 상태로 죽르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손을 펴고 죽는다.
죽은 肉身은 더 이상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을 때 죽으면 눈을 뜨고
죽은 그대로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죽은 肉身은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에 나는
많은 위대한 성자들에게 가서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매우 이
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은 어떤 경
전에도 없고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사람
이 죽을 때 눈동자는 위로 향해집니다. 죽은 사람의 눈을 보면 흰자위만 보입니다. 눈동자는 위로 향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을 무시무시하게 만듭니다. 흰자위가 공포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당
신이 잠을 잘 때도 일어나는 現象입니다. 잠을 잘 때 당신의 눈은 위로 향합니다. 그것은 눈이 休息에 들
어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죽은 사람의 눈은 完全한 休息에 들어갔고 그 눈이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시로 뜬 그 눈을 감기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보면 눈을 감기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이 그대 앞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두 눈을 뜨고
죽은 그대의 눈을 감겨주는 것은 그대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그대 앞에서 사라진
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대제국의 제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죽는 순간 그는 그의 나라를 갖고 갈
수 없습니다. 그의 지식과 그의 권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갖고 갈 수 없습니다. 그가 갖고 갈 수 있는 唯一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自身의 本性, 진리, 부처에 대한 깨어있는 의식일 뿐입이다. 그것만이 그대의 唯一
한 동반자이다. 만약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동반자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굉장한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대의 육신이 살아 있을 그때 그대에게 보이는 모든 것은 꿈이요 幻想임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죽음은 그대의 동반자 이외의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은 무엇이 실체인지를 판정해 주는
유일한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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