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그게 그건 줄 --지혜(般若 반야, 空의 지혜)란 무엇일까?

장백산-1 2016. 10. 26. 15:08

그게 그건 줄    ---    참선일기    (김 홍근 저)

지혜(般若 반야, 空의 지혜)란 무엇일까? 

        

‘있는 것과 없는 것(實有와 假有)을 가려볼 줄 아는 안목’을 지혜, 반야지혜, 공의 지혜라고 定義해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있다가 없어지는 것(生滅)’과 ‘항상 있는 것(如如) 非無常’을 가려서, 가치 중심을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立場(서있는 자리)을 바꾸는 것. 

        

生滅은 衆生心, 如如는 本心이라는 말로 표현해 볼 수 있다. 중생심에 무게중심을 두고 살면, 항상 일어

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끌려 다니는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생활을 ‘종(하인)의 삶’이라고 부른다. 

귀신굴에 들어앉았다고도 말한다. 반면, 본심에 무게중심을 두고 살면, 항상 주인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굴림을 당하며 사느냐, 만물을 굴리며 사느냐. 

   

인간의 마음에는 本心의 자리와 衆生心의 자리가 있다. 전자를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자리’ 혹은 ‘주

와 객이 갈라지기 전의 마음자리’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 자리는 눈앞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다. 

반면 후자는 ‘한 생각이 일어난 후의 마음자리’이며, ‘주와 객으로 갈라진 이후의 마음자리’이다. 

   

중생심을 간택심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간택만 꺼리면 된다(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즉 주와 객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마음자리에 있기만 하면 그 상태가 道

라는 말이다. 분별 분리 망상 번뇌 이전의 마음자리 그 자리를 가장 쉽게 지적하면, ‘이뭣고’의 ‘이’이다. 

‘이뭣고’ 라는 화두를 생각 생각하다가 보면 바로 그 자리에 딱 가서 선다. 회광반조의 힘이 강한 사람에

겐 그 자리가 즉각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감지된다. 분별 분리 망상 번뇌 이전의 마음자리는 다만 언어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곳이므로, 그곳에 뭐든지 세우면 세우는 족족 즉바로 무너진다. 

   

분별 망상 분리 번뇌 생각 언어가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자리는 텅~비어 없는 듯하나, 妙하게 뭔가가 있

어서 끊임없이 흘러간다. 이것을 말로 표현한 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그 자리에 서면, 마치 흐르

는 물에 바가지를 띄워놓고 줄로 잡고 있는 듯, 입질하는 손맛이 아릿하게 감지되어온다. 그런 상태에 

익숙해지면, 이 세상에서 그것만이 언제나 여여하게 실재(real)하고, 다른 것들은 일어났다 꺼지는, 즉 

이 세상의 因緣에 따라서 잠시 잠깐 왔다 가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生滅하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들이 착각하는 바로 ‘나’이며 에고(自我意識), 즉 我相이다. 

주체나 객체나 모두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면서 흘러가며, 동시에 一切가 다 

그런 상태에 있기에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世上이 緣起되어 있다는 사실

을 깨우치는 것이다. 地水火風 4가지 원소와  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 ; 人體를 포함한 물질 사물 모양,

느낌 감정, 생각 망상 번뇌 상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심 알음알이(識) 분별의식]이라

는 5온(五蘊)이 인연에 따라 모여 있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다시 다른 물체로 결합하여 나타난다. 

   

우주삼라만상만물이 펼치는 거대한 환상의 매트릭스의 파노라마가 보이기 시작한다. 色을 보면 바로 空

을 함께 본다. 상(相)을 보면, 바로 비상(非相)도 함께 본다. 온갖 공화(空華)가 만발한 대장엄의 화엄법계!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無我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흘러가면서 인연 따라 모

였다 흩어졌다 하면서(無常) 무시무종의 무한하고 무량한 방대한 그물을 형성하고 있기에 緣起라고 한다. 

모든 사물이 그 실체가 텅~비어있는 空 때문에 緣起가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空이라고 한다. 연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色卽是空, 空卽是色이기에 中道라고도 말한다. 이 장엄한 연기의 세계에 나지도 죽지도 않

는 한 물건이 있어 사통팔달 자유자재하며 인연 따라 궁글어간다. 그것이 ‘理’다. 인간 각자가 理를 스스로 

또렷이 자각해서 주체적인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 ‘이뭣고’라는 화두에 몰입하는 삶이다.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理 그것은 항상 있다. 나의 모든 경험 이전에 있기에, ‘선험(先驗)적’인 무엇이다. 

이 理를 부처, 불성, 하나님, 하느님, 여래(여거), 진짜 나, 본래의 나, 본래면목, 신성, 성령, 전시안, 본성,

The All Seening Eye, 관세음보살 등의 많은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선험적인 것이기에, 부모로부터 

인간 몸을 받아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곳에서 ‘나’와 관련된 무엇이라도 자리 잡

으려면, 마치 허공처럼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항상 처음 그대로 있기 때문에, 나중에 생긴 것은 가까이 

가면 타버리기 때문이다. 시비 분별하는 생각을 머리를 굴리는 순간, 즉시 가려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가 붙을 수 없는 곳. 뭐든지 척 보면 전광석화처럼 바로 아는 곳.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의 삼중고를 

겪은 헬렌 켈러에게도 100%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것. 원숭이, 개, 고양이, 물고기에게도 완벽히 있는 것. 

보면 즉시 알고, 들으면 즉시 알고, 배고프면 즉시 알아서 밥 먹고, 추우면 추운 줄 즉시 알아 옷 입고, 뭐

든 척척인데, 그러나 그것을 잡으려는 순간, 가려져버리는 것. 

          

그 항상 있는 것, 혹은 없이 있는 것에 시선이 가서, 그 외의 것들은 생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집착하

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는 마음, 그것이 지혜다. 지혜가 성성(惺惺)하면 同時에 마음은 적적(寂寂)하다. 

성성적적, 적적성성의 無心으로 있다가, 사물이 오면 오는 대로 그대로 비추고, 반응해야 할 것이 있으면 

전광석화처럼 中道에 맞게 행동하는 平常心! 일상생활 속에서 수시로 평상심을 돌아보고 業識의 구름에

서 벗어나 무심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마음공부, 수행이다. 그러려면 무심의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無心의 자리, 즉 平常心 그것은 바로 눈앞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이다. 항상 새

로움이 흘러나오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샘, 그것이 本心, 본래마음, 마음의 본래성품 자리이다. 

   

돌아보면 바로 이건데,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여기에 익어지면, 사시장춘(四時長春)이 된다. 바로 이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반야지혜, 空의 지혜, 空의 성품의 지혜라고 한다. 이 空의 지혜에 눈이 떠지면, 그

동안 세상을 반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석가모니라는 젊은 왕자가 자기 아버지의 왕궁 밖으로 

나가 거지생활을 한 것. 安心한다. 이 우주, 이 세상이 바로 이것뿐이니까.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으니까. 

괜히 딴 짓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지혜란 ‘그게 그건 줄 아는 것’이다. 바로 코앞에 있는 지금 여기 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