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장백산-1 2018. 1. 4. 00:23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름의 이 세상)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삼계유심 三界唯心),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일 뿐이다(만법유식 萬法唯識).


-현정선원 대우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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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읠 줄 알면 法이요, 法을 알면 '부처'라」(知離卽法 知法卽佛)고 했습니다. 모든 '이름' (名)과 '모양'(相)


과 '망상'(妄想)은 이것이 범부의 살림살이이니, 이 모두가 오직 중생의 망정(妄情)의 소산임을 알아서 이


를 여읠 줄 알면 이것이 곧 '法'이라는 것이니, 




그러므로 '法'의 '본래법'(本法)은 '法'이랄 것도 없고, '法'이 아니랄 것도 없는 거예요. 따라서 '법'에 대하


여 이러쿵 저러쿵 지견을 굴리면서, 알아낸 바가 있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이 모두가 속절없이 '둘째 자리


'임을 분명히 알아서 결코 이에 머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식견(識見)도 생각 없음만 못한 것이니, 왜냐하면 공부하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수승(殊勝


)한 지견이 생겼을 때, 이에 머물러서 놓을 줄 모른다면 이 사람은 '마음'도 알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깨달


을 분수가 있겠어요?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법'이니,(卽心卽佛 卽心卽法) 결코 '마음'을 떠나서는 단 하나의 법도 없거


늘, 만약 '마음'으로 알아낸 바 법이 있고, 깨달은 바 법이 있다면, 이 사람은 '마음' 밖에서 '법'을 보는 것이


니, 어찌 법집(法執)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제일의의 유심>(第一義唯心)을 깨쳐서 한 생각에 일체를 좌단(坐斷)하면 다시 그 무슨 법이 


남아 있기에 알고 모르는 양변에서 이 쪽 저 쪽 할 일이 있겠어요? 결국 한생각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는 것이니, 문득 '마음의 근원'을 돌이킬 수 있으면 만법은 저절로 '마음


의 근원'에 귀착하여 더는 이 마음을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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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일은,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또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거기에 <행위의 주체>(行爲主體)도 없고, <수용의 주체>


(受用主體)도 없는 거예요. 




즉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작업을 지어나가는 게 아니라, 이 모두가 꿈 같고 幻 같은 '인연생기(因緣


生起)'라는 말이에요. '짖는 자'(作者)가 없는데 어떻게 '일'이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또 '받는 자'가 


없는데 누가 있어서 일의 성패에 대해 일희일비하겠어요? 




그래서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고 하는 건데, 이 '남이 없는 이치'(無生之理) 가운데서 다시 무슨 


숙명론을 운운합니까? 일체만법이 다만 허깨비처럼 낫다가 허깨비처럼 사라져서, 시종일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예요. 




이와 같이 시종 공적(空寂)한 가운데, 무명중생들은 늘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아우성치면서, 이리 저리 


헛손질 하고, 바꿔치기하고 하면서 헛되이 설치기를 쉬지 못하는 게 바로 가엾은 중생의 고달픈 살림살


이에요. 




이 몸을 <나>로 여기고 있는 한, 그래서 이 '육신의 인연' 때문에 기갈(飢渴) 한서(寒暑) 병고(病苦) 등이 


마치 꿈처럼 환처럼 있는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즉 이 世上이 몽땅 생사(生死)가 그대로 열반(涅槃)인 佛


國土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 꿈속에서 제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한 식견이 생긴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어


요? 그래서 빨리 훌쩍 꿈에서 깨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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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일승법문'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그렇게 알아들은 게 많습니까? 통틀어 '한 마음' 뿐인 '법계'


는 이미 안팎과 자타가 없어서, 알 것도 없고 모를 것도 없는 겁니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과 '이름' 있는 것이 모두가 중생의 망상으로 헛되이 지어진 것임을 알았으면, 


모름지기 기억해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 헛된 분별을 일으키면서 '마음'을 어둡히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일체만법이 오직 <참된 하나>일 뿐이어서, ― 원인과 결과, 옛과 이제, 먼저와 나중, 깨달음과 미혹함,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등의 일체의 이름과 뜻이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 원융됨을 본다면 


천지간에 다시 무엇이 있길래 장애를 이룰 일이 있겠어요? 




'진리(眞理)'는 본래 말이 없고, 알만한 것도 없고, 볼만한 것도 없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온누리에 두루


충만하여, <환과 같은 지혜>를 일으켜서 <작용 없는 작용>을 지어나감으로써 뜻에 맡겨 중생을 대현


(對現)하여 모든 함령(含靈)을 이롭게 하되 전혀 공력(功力)을 들이는 일도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수고도 


없는 게 바로 무진장(無盡藏)한 <자기의 보배>, 자가보장(自家寶藏)인데,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집안의 보배를 내팽개치고, 허망하게도 보배창고 밖으로 내달으면서 헛된 복이나 


구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성인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아무리 좋은 일도 일 없음만 못하니, 모름지기 그 '마음'을 눈동자 간직하듯 잘 보존한다면, <참된 깨달음>


은 항상 본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었는데 제가 혼자 알아차리지 못했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