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름의 이 세상)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삼계유심 三界唯心),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일 뿐이다(만법유식 萬法唯識).
-현정선원 대우선사 -
* * *
이것은 세속에서의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의 논쟁 차원을 넘지 못하는 질문이군요. 이런 내용
은 본 문답 코너에서 다룰 명제가 아닙니다.
유물론자가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물체'가 근본이고, '마음'은 그 물체에 의지해서만 기능(機能)한다.
따라서 물체만이 참되고, 마음은 허망한 것이다」
유심론자가 말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당신이 주장하는 그 유물론도 '마음'으로 고찰해서 주장하는 것
이니,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나의 주장은 허망한 것이니 믿을 게 못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꼴이니,
이야말로 전형적인 자가당착이 아닌가?」 ···
이런 논쟁은 세속의 말 많은 논객들에게 맡기세요. 고인은 말합니다. 「마음이 나면 만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만법이 멸한다」··· 이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있습니까?
마음이 아니면 유물론이니, 유심론이니 하는 따위의 논의가 어떻게 세워지겠어요?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萬物의 根本인 영각성(靈覺性)>은 마음(心), 意識, 生覺도 아니고 物質도 아니면서 能히 모든 因緣에
感應하여 마음 의식 생각도 나투고 물체도 나투되, 마치 빈 골짜기가 소리 따라 메아리를 뱉어내듯이
그렇게 내는 것이니, 이 <앎의 성품>인 영성(靈性)을 세간법을 따라 <마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
靈性거기엔 본래 일체의 '이름'도 '형상'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眞理)를 밝히는 데 뜻을 두었거든 모름지기 世間法을 배우지 말 것이며, 세간법을 앞세워 진리에
접근하려고 하는 헛된 시도를 그쳐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
으니, 될 일이 아니지 않겠어요?
* * *
혼돈(混沌)이 꿰맨 자국도 없이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나뉘었으되 일찍이 <둘>인 적이 없고, 합해도
<하나>가 아니니, 과연 이것이 무엇일까요?
고불(古佛)의 法이 본래 일여(一如)하여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건만, 미혹한 중생이 <연생(緣生)이
무생(無生)인 도리>를 알지 못하고 헛되이 면전에서 있음(有)을 취하여 이것을 고유의 성품을 가진
실체로 오인하여 분별하고 집착하면서부터 피차(彼此) 자타(自他) 내외(內外) 등의 망령된 생각이
미혹의 두꺼운 구름이 되어 중생의 마음을 가리게 된 겁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거든 꿈 생각을 해 보세요. 꿈속에 나타난 온갖 사물은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막론하고 그것이 모두 마음이 變해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엔 꿈 속 이 모두가 <제 마음>인 줄 알지 못하고, 저 바깥에 각기 고유의
성품을 가진 실체로 존재하면서 <나>와 상대하고 있는 <남>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것들과 어울리면
서 한바탕 꿈 판을 엮어내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다가 문득 꿈에서 깨면 이것이 본래 '한 마음'일 뿐이요, 결코 따로따로였던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계합(契合)이니, 명합(冥合)이니 하고 이름짓지만, 본래 <둘>이었던 적이 없
었으니 지금에 다시 <하나>가 되는 일도 있을 수 없고, 결국 허공이 허공에 합하듯이, 천지가 온통
<나> 혼자 뿐임을 알게 되면 이것이 바로 상주불변(常住不變)의 법성신(法性身)이 드러나는 순간이요,
비로소 <참 나>가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요컨대, 면전엔 진실로 한 法도 없음을 알아서, 유심(唯心)의 도리를 철저히 사무치는 일, 이것이야말로
성교(聖敎)의 요체(要諦)임을 명심하고, 망령되이 지각작용(知覺作用)을 좇으면서 밖으로 내닫는 일은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 * *
<마음뿐인 도리>(唯心)를 깨치면 이 세상의 온갖 잡다한 일들이 ― 그것이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마땅한 일이건 마땅찮은 일이건 막론하고 ― 모두 <참 마음>(眞心)의 거울에 비친 망념(妄念)의 그림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다시 무엇을 가릴 게 있겠어요?
한 걸음 성큼 물러서서 法界 全切를 조망(眺望)해 보세요. 거기엔 옳은 일도 있고 그른 일도 있으며,
깨끗한 것도 있고 물든 것도 있어서, 그야말로 凡夫와 聖人이 함께 살고, 용(龍)과 뱀이 섞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雜多한 것들이 혼재(混在)하면서도 아무 충돌도 없이 한결같이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법계(法界) 즉, 眞理의 世界가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밖으로 두리번거리면서 구하는 마음>도 있고,
회심(廻心)하여 <하나의 참된 주처>(一眞住處)를 얻어서 미동도 하지 않는 마음도 있고, ···
그러나 이 모두가 오직 <한 마음> 가운데의 일이요, 결코 마음밖엔 티끌 만한 한 法도 없음이 分明하니,
이것이 바로 유심(唯心)을 말하는 근거입니다. 모름지기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어요?
* * *
부처님은 일찍이 중생을 위한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법이니>, 만약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던가,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한다면 이것은 '마음'도 모르는 사람
이거늘 어찌 '부처'를 이룰 수 있겠어요?
제일의(第一義)의 유심(唯心)을 깨치면 진실로 마음밖엔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음이 진실이니, 만법이
성품이 없고, ― 중생도 성품이 없어서 생사(生死)도 없는 겁니다. 천지가 허공처럼 텅 트여서 티끌
하나 없거늘, 어디에 중생이 있어서 병에 걸리고, 또 고치고 할 일이 있겠어요.
이에 이르면 이른 바 고인이 이르기를, 「병이 없으니 약이 필요 없다 하노라」 하는 경지입니다.
醫士도 患者도 둘 다 아직 무명(無明)에 갇혀서 <생사의 바다>(生死海)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그저 지금처럼 <사대(四大)로 된 몸>을 <사대로 된 국토>에 의지해서 사는 수 밖에 없으니, 상정(常
情)에 따라서 성의껏 진료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기필코 부처님의 큰 法에 뜻을 둔 선비라면, ― 환자의 근기를 살펴가면서, ― <몸과 입과 뜻>
(身口意)을 굴리면서 삶을 영위하는 <나>라는 주재(主宰)가 없음을 일깨워 주어서, 그로 하여금 이
<오음의 몸>(五陰身)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에서 더한 구원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러므로 모름지기 먼저 <자기 자신>을 구하는 일이 급함을 알 것입니다.
* * *
제대로 된 수행자의 공부는 가장 높은 정점(頂點)에 머물지 않고, 뜻(意)은 <그윽한 뜻>(玄義)을 머물러
두는 法이 아닙니다. 그저 <평상한 마음>(平常心)이 도(道)이니, 모름지기 마음에 수승(殊勝)한 지견이
생겼거든 얼른 보내 버리고, 결코 그에 의지하거나 머물거나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천진(天
眞)한 영성(靈性)을 어둡혀서 다시 <생사의 바다>(生死海)에 침몰하는 짓이에요.
어머니 배 밖에 나와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해서, 기억의 형태로 축적한 일체의 지견을 ― 그것이 세간법
이건 출세간법이건 막론하고 ― 몽땅 잊을 수만 있으면, 그리하여 <만겁에 변함 없는 성품>으로 하여금
스스로 빛을 방광(方光)하게 하되, 일체의 이치나 도리가 그 성품에 간여(干與)할 여지가 없게 할 수만
있다면, 부처 지혜는 바로 앞에 나타나서, 얻음도 없고 배움도 없는, 그것이 바로 '부처'인 겁니다.
* * *
一乘이건 아니건 불문하고, 구경각(究竟覺)은 학인에 의해 증득되는 게 아닙니다. 바꿔 말해서 증득되는
것은, 즉 깨달은 바가 있고, 얻은 바가 있는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름대로 수행을 하다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머리 속에서 갈구하던 이상(理想)의 경지가 헐떡임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득 어느 한 순간 화현(化現)한 망정(妄情)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믿으세요.
또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데는 일체의 有爲의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眞理는 '생각 의식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고, 몸으로 행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몸도 마음도, 나아가서 이 세계도 몽땅 빙소와해(氷消瓦解)하여, 천지간에 안팎으로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이 되어야 비로소 구경(究竟)에 상응(相應)할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 그것이 3,000 배건 10,000 배건 그것은 범부나 외도들이 유위의 공덕을 바라고 하는 망령된
행위에 불과하니, 도무지 허깨비와 같아서 實體가 없는 이 몸과 마음을 까닭 없이 수고롭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성불이니 하는 일체의 생각을 다 놓고, 놓았다는 생각마저 없어서,
이렇게 문득 <생각 없는 무심정>(無思無心定)에 들 수 있으면 道를 깨치기가 빠르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고, 유심(有心)으로 道를 구한다면 그야말로 당나귀 해가 되어도 깨칠 분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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