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장백산-1 2018. 1. 4. 00:19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름의 이 세상)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삼계유심 三界唯心),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일 뿐이다(만법유식 萬法唯識).


-현정선원 대우선사 -



* * *


제 입으로 <마음 뿐>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옳은 지견>과 <삿된 지견>을 分別하고, <활짝 트임>과 


<콱 막힘>을 가리니, 참 딱한 일이군요. ― 그러고 보면 딱할 일도 없겠군요 ― <마음의 성품>(心性)은 


스스로 온전하여 작용이 없으면서, 다만 인연에 감응하여 온갖 형상(形相)을 꿈처럼 幻처럼 나투는 것


이므로, 따라서 움직임 없는 <본래 성품>(本性)에 依持하여 드러나는 모든 현전상(現前相)은 미·오(迷


悟) 염·정(染淨) 간에 자체성(自體性)이 없어서, 오직 <참된 하나>를 여의지 않는 겁니다. 




<신령한 앎>(靈知)은 본래 스스로 환히 알므로, 수행자가 새삼 알아내고 밝히고 할 것이 없는 겁니다. 




그저 마음이 <있다>고 하면 있고, 마음이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니, 온갖 <그렇고> <그렇지 않음>


이 전혀 나의 한 생각에 매었거늘 다시 허망한 바깥 경계에 마음을 뺏길 일이 무엇이겠어요? 




일체가 <마음뿐임> 즉, 삼계유심, 만법유식임을 철저히 사무쳐서, 그저 한 순간이라도 조작 없는 마음


에 맡겨서 순히 흐를 수만 있다면, 곧장 해탈의 땅을 밟을 것이니, 모름지기 아무리 수승한 지견이 생


겼더라도 돌보지 말고, 곧장 <생각 없는 무심정>(無思無心定)에 드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 *


설사 의근(意根)이 완전히 둘러빠지고, 세간의 흐름을 남김 없이 끊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본분납자(本分衲子)의 행리(行履)할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 지혜'는 일찍이 문턱을 넘은 일이 없


으며, 따라서 학인이 보고 듣고 읽고 하면서, 또는 체험을 통해서 얻은 일체의 알음알이는 '둘째 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인이 자기의 공부에 대해 말합니다. 「 저는 알았습니다. 즉 안으로는 나(生)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는 


온갖 법진(法塵)이 제 성품이 없어서, 티끌 만한 한 법도 상대할 만한 법이 없음을 저는 알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내외명철(內外明徹)하여 시방삼세(十方三世)에 걸릴 것이 없는 적멸 속에서, 쉬고 쉬고 또 


쉬어서 쉬었다는 생각도 쉬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을 들은 명안종사(明眼宗師)는 일언지하에 잘라 말합니다. 「 그대가 얻은 적멸


(寂滅)은 진정한 <구경의 적멸>이 아니요, 그대가 쉬었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쉼>(正休)이 아니니라」 




「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 깨닫기 전엔 시끄러웠다가 깨닫고 난 다음에야 적멸해졌다면 그것은 생멸법일 뿐 아니라, 


<시끄러운 때>와 <적멸한 때>에 시간의 옮김이 있음이니,  이는 무시지문(無時智門)을 어김이요, 




또한 <쉬었다>고 말하는 것도 만약 그것이 일승보살이라면, <쉬지 못함>도 보지 않고 


<쉬지 못하는 자>도 보지 않으며, 또한 <쉬게 된 것>도 보지 않고 <쉬게 된 자>도 보지 않게 되어서, 




비로소 <일찍이 문턱을 넘은 일이 없는 '참 지혜'>의 비춤 없는 비춤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바야흐로 비로소 <조금은 쉬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이 문답을 잘 깨달아 살펴서, 모름지기 <신령한 근원>을 등지고 허망한 지견놀이에 침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 <안 바>(所知)가 있고, <얻은 바>(所得)가 있음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니라」고 거듭거듭 경책하신 바이니, 제대로된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 * *


'마음'은 남(生)이 없고, 말은 끝내 불요의(不了義)이니, 만약 학인이 '생각'과 '말'을 여의지 못한다면, 


즉 정식(情識)으로 헤아리고 더듬는 것으로는 결코 진리에 상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쳐야 


합니다. 




만법이 인연생기(因緣生起)라,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도무지 주재자(主宰者)가 없는 가운데, 이 육신의 


허망한 인연 때문에 온갖 바람이 생기고, 그 바람이 빌미가 되어서 끊임없는 의증(疑症)이 생기는 거예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치면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안팎이 명철(明徹)하여, 천지간에 티끌 하나 걸릴 


게 없는, 그야말로 <하나의 참된 법계>(一眞法界) 뿐인데 다시 무엇이 남아 있어서 마음에 그림자를 드


리우겠어요?




따라서 마음이니 경계니 하는 것은 다 정량(情量)으로 나툰 바요, 나아가서 <주(住)함이 있음>과 <주함이


없음>, <믿음>과 <믿지 않음>, 깨달음과 미혹함, 나아가서 ― <있음>과 <없음> 등이 모두가 정량으로 헛


되이 分別한 빈 이름뿐인지라, 전혀 실다운 법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는 정혜력(定慧力))>으로써만이 감당할 바요, 생사법(生死法)이나, 인과법(因果法)


을 좇으면서 정식으로 헤아림은 전혀 본분납자의 행리(行履)가 아니니, 마땅히 신구의(身口意)에 의탁


함이 없이 <작용이 없는 지혜>(無作智)에 잠잠히 합하는 길만이 제대로 된 수행자의 나아갈 길임을 명


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견문각지의 지각작용(知覺作用)을 좇는 자는 걸음걸음마다 귀신과 사귀


리라」고 했던 것이니, 모름지기 조작함이 없이 마음(靈覺性)으로 하여금 스스로 빛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수승한 지견이라도 한갓 허망한 정견(情見)에 불과하니, 결코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마음 둘 바


가 아닌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