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장백산-1 2018. 1. 4. 00:22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름의 이 세상)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삼계유심 三界唯心),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일 뿐이다(만법유식 萬法唯識).


-현정선원 대우선사 -



* * *


흔히 마음이 산란하게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음을 한 데 모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범부나 외도들이 항용 떨어지기 쉬운 함정이에요. 이들은 움직임과 고요함


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마음이 좀 시끄러우면 금방 이것을 찍어눌러서 


고요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명상(瞑想)이니, 심지어 참선 공부를 한다는 친구들까지 어설픈 명상의 시늉을 본뜨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생각이 <남(生)이 없는 도리>(無生法忍)를 분명히 밝혀서, 


경계를 대할 때마다 마음 속에 나타나는 그 숱한 형상(形相)들이 모두 실체가 없는 <업의 그림자>(業影)


임을 간파(看破)한다면 다시 무슨 근심하고 걱정할 일이 있겠어요? 




그러므로 유심(有心)도 무심(無心)도 다 아닌 줄 알아서 그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그 때에야 비로


소 조금은 무심해졌다고 할 수 있겠죠. 행여라도 무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애쓴다면 그것은 마치 물속의 


달그림자를 건지려고 애쓰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무슨 소용이겠어요? 




모름지기 지금 당장 문득 쉴지언정, 다시 무심이니, 무아니 하여 보다 나은 어떤 경지를 향해 일을 꾸민


다면 이것은 매우 사된 길에 떨어지는 것이니,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이 부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각별


히 삼가서 조심조심 얇은 얼음판 위를 걷듯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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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眞理)는 참으로 말이 없습니다.(이런 말도 자칫 진리를 훼손하는 결과를 나을까 걱정이군요) 따라서 


지난날의 여러 성현들이 학인들을 제접(提接)할 때 베푼 方便도 어디까지나 이 <말이나 문자로 드러내 보


일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어서 말이나 문자를 이용해서 표방한 것이므로, 그와 같은 方便의 말씀이나 


현시(示現) 가운데서 비밀한 뜻을 알아차릴 지언정, 결코 그 가운데서 어떤 묘한 식견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학인들은 대부분 이 方便의 말씀에 현혹돼서그 말속에서 묘한 이치를 찾으려고 애쓰니, 


참 딱한 일입니다. 최상승(最上乘)의 유심(唯心)의 법문에 든 이는 '깨달음'도 '미혹함'도 다만 마음의 


거울에 投映된 명암(明暗)의 자취, 그림자일 뿐임을 알아서, 그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으면, 


이런 사람을 일러 '깨달은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요약컨대, 허망을 알아보는 것이 수행이요, 참과 허망이 한 근본임을 알아서 마음이 이 쪽 저 쪽 분별


하지 않게 되면 곧 근본성품(根本性稟)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결코 유위(有爲)의 공력을 들여서 


애쓴 보람으로 얻어지는 게 깨달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깨달음'이나 '본래의 성품'이 어찌 범부의 상량(想量)의 대상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말이나 


문자로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알려고 하거나,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머리에 뿔이 


난다고 고인들은 경책했던 거예요. 




<모르는 그것>이 가장 친절합니다. 문득 모든 法을 몽땅 쉬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 쉰 자리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부처'와 조금도 다를 게 없으니, 다시 무엇을 찾고 닦고 할 일이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