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장백산-1 2018. 1. 4. 00:15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름의 이 세상)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삼계유심 三界唯心),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일 뿐이다(만법유식 萬法唯識).

 

-현정선원 대우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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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진정한 의미의 출가(出家)란, 실체가 없는 이 몸과 마음으로 어떤 공덕이나 편의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이야 서툰 장사꾼의 심보지, 그걸 어떻게 참된 구

도자(求道者)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겠어요? 따라서 제대로 된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이른바 발심(發心)

이라는 말의 뜻도 세속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發心'이란, 말 그대로 「'마음'을 밝혔다」는 뜻이며, 따라서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도리>를 깨달아 

마침으로써, <삼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요>,(三界唯心)이요, <만법이 오직 유식>(萬法唯識)인 도리를 

체달하여,  「'마음밖에는 티끌만한 한 법(法)도 없어서, 구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친 사람의 마음을 일러서 "發心 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끊임 없이 <보다 나은 경지>, <보다 안정된 경지>, <보다 훌륭한 경지>를 구해

마지 않을 테니, 어느 세월에 쉴 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지금 이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거니와, 심행(心行)을 일으키면 더디니라」 

했던 겁니다. 모름지기 일승보살(一乘菩薩)은 구경(究竟)의 열반을 증득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

하게 알아야 합니다. 일승종(一乘宗)에 있어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영겁에서 영겁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이 몽땅 한 때(一時), 한 찰나이며, 고금(古今)이나 완급(緩急) 등의 모든 분별은 모두 중생의 

망상(妄想)의 소산(所産)임을 밝히는 겁니다. 

 

따라서 과정(過程)이 그대로 결과(結果)이니, 일체시 일체처에 그 어디가 '佛事' 아닌 것이 있겠어요?

더욱 분발하세요. 처처법당 사사불공(處處法堂 事事佛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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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이(心, 意, 識) 뿐 아니라, 만법은 본래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는 건데, 사람들이 만법의 실상

(實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만법을 실유(實有)로 오인하고 집착을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비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다 꿈, 환(幻)과 같은 것이어서 고정불변하는 실체

(實體)가 없다는 事實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때문에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고 한 거구요, 

 

그러니까 만법이 유식이라는 말은 이 世上의 心理的 物理的 一切 現象은 몽땅 '마음'으로 헛되이 

지어진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모름지기 철저히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요컨대, 우주만물 일체법은 본래 성품이 없는 것이므로, 보내고(遣) 나서야 비로소 없는 게 아니고, 

망상이나 번뇌나 업장 등이 본래 스스로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이렇게 주고 받는 

문답도 모두 잠꼬대와 같은 것으로서, 꿈속에서 일어나는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 각자가 모두 이 <나>를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하면서도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하는 

나라는 主體가 있다고 믿고 그런 나를 <나>라고 여기고 있으니, 참 딱한 일입니다. 환화공신(幻化空身)

허깨비가 무슨 生覺이 있고 무슨 作用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그러기에 '붓다'도 말하기를,  「화신불(化身佛)은 말하는 者가 아니다」라고 했던 겁니다. 

'화신부처(化身佛)'도 말하는 자가 아니거늘 하물며 중생이겠습니까. 

 

'법시'(法施), 즉 <법을 베풂>이란 습득(習得)해서 이미 알고 있는 식견(識見)을 말로 표현하여 

전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게 설법이라면 이 세상의 강의나 강연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요컨대, '法施'란 순수히 천진(天眞)한 본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법시이라야 참된 법시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숱한 이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치우친 이론을 깨트려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론으로써 이론을 척파하는 것일 뿐이니, 이같은 방편(方便)의 말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면 

그는 곧 방편의 말에 떨어진 사람이요, 법문을 들을 줄 모른다는 핀잔을 면키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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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마음 뿐>(唯心)이라고 하면서도 그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 살필 생각을 않으니,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이 그저 한갓 헛된 한 토막 지견으로만 떠다닐 뿐, 전혀 아무 공덕도 없으니, 참 딱한 

일입니다. 

 

요컨대, '불법'(佛法)의 요체는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므로 이 세상에는 집착할만한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뿐이에요. 즉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알건 모르건, 아픈 자가 있건 없건, 이 세상에 태

어났건 태어나지 않았건, 그 모두가 다만 중생의 정식(情識)으로 허망하게 비추어내는 ― 마치 꿈처럼 幻

처럼 말이에요 ― 실체가 없는 것일 뿐임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서, 더 이상 현혹되지 않기만 하면 당장에 

어엿한 '부처'의 출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능히 근량에 감당할만한 사람이면 모름지기 시간도 노력도 

들임이 없이 몰록 깨달아 들어가는 이 향상(向上)의 외길을 어기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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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온통 <부처 몸>이고, 모든 '존재'와 '일어나는 일'이 전부 불사(佛事)일 뿐인데, 여기서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모든 일이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현재 目前에 전개되고 있는 現象을 실재(實在)인 양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시비득실(是非得失)의 망집(妄執)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모든 法이 텅~빈 이름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계가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한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참된 출가>란 빛깔과 소리가 天地間에 가득해도 그것들을 상대로 전혀 허(虛)와 실(實)을 가릴 

게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으면 그것을 <출가(出家)>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조작을 일삼던가 대처(對處)

한다면 곧 어긋나고 맙니다. 뭣하러 쓸데없이 '황금'을 가지고 다른 '황금'과 바꾸려고 애쓰겠어요? 

 

* * *

 

<참된 이치>(진리 眞理)는 이것이 말 그대로 참되고 여여(如如)하기 때문에, ― 즉 생겼다 사라졌다, 있었

다 없었다, 알았다 몰랐다 하는 變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참되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이 이어지는 이른 바 무상(無常)한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연 따라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되풀이되는, 허망한 존재라는 사실

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여름 날, 해변 가 백사장에 어린이들이 마냥 즐겁게 뛰놀고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세요. 그들은 산도 

만들고, 길도 만들고, 다리도 만들고, 또 모래 성(城)도 만들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 때, 이들은 <없던

게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간 해가 저물어서 어린이들이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산도 집도 모래성도 다 발길로 뭉개버리

고는 <있던 게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때,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모랫벌>은 늘 본래의 모습 그대로고, 조금도 새로이 생겨나거나,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이 없다는 걸 

잘 알지 않습니까? 

 

결국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들은, 사실은 생겨난 일도 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일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데, 범부들은 이것이 실제로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집착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갖춘 사람은 종일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또렷

또렷하게 보면서도, 實際로는 먼지 티끌 하나 보는 것이 없는 겁니다. 말하자면, 있고 없는 양변(有無兩

邊)을 넘나드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거죠. 그리니, <있는 것>도 취하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없는 것

>을 취하겠어요? 함부로 허망한 지견을 굴리면서 <성스러운 뜻>(聖旨)을 어둡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