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장백산-1 2018. 1. 4. 00:12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름의 이 세상)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삼계유심 三界唯心),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일 뿐이다(만법유식 萬法唯識).



-현정선원 대우선사 -



* * *



이 세상은 본래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참되고 如如하고 淸淨하여서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게 실상


(實相)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 이 세상은 본래 청정본연(淸淨本然) 하거늘, 어찌하여 


이다지도 시끄럽고 어지럽게 되었습니까?」 하니, 




스승이 대답하기를, ···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했습니다. 




「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니, 곧 일체만법이 다만 妄靈된 意識의 分別로 헛되이 지어진 것이므로 


모름지기 執着하지 말라.」고 한 것이 성교(聖敎)의 근본이건만, 지혜가 없고, 업의 뿌리가 깊은 범부


가 이 수없이 반복되는 경책(警責)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시끄럽고 고달픈 이 세간상


(世間相)을 실체(實體)로 오인하고 집착하여 벗어날 줄 모르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것은 덧없고 실답지 않아서 볼만한 것이 본래 없으며,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은 무위(無爲)이므로 본래 보는 것이 아니니, 결국 이 세상사는 진·속(眞俗) 미·오


(迷悟) 범·성(凡聖)을 가릴 것 없이, 그 모든 이름과 모습(名과 相)이 몽땅 텅~빈 이름뿐임을 철저히 


사무쳐서, 




안으로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 상대할 경계가 없으니, 허공처럼 텅 트인 법계(法界)에 


다시 무슨 일이 있겠어요? 




모름지기 지각작용(知覺作用)을 좇으면서 면전의 또렷또렷한 형상을 반연(攀緣)하고 分別하는 짓


을 당장 그만두고, 문득 회심(廻心)하여 나의 심성(心性)이 상주(常住)함을 보면 그것이 바로 <여여


한 본래 부처>(眞佛如如)이니, 다시 더 무엇을 찾고 구하고 하겠어요?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 * *


<부처님의 가르침>(聖敎)은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문(門)이 없음으로써 법문(法門)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요점은 ― 세상에서 보통 알고 있듯이― 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해서, 그 보람으로 


훗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이 전혀 잘못된 생각을 털어 내기 위한 것인데, 어찌 보면 이 말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팔만사천 법문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매사에 첫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갈수록 점점 근본에서 멀어질 터이니, 이야말로 큰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불자(佛子)들이 이 대목에서 길을 잘못 들고 있는 게 현실


이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컨대,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니, 모름지기 밖으로 내달으면서 '부처'


를 찾지 말라」고 한 말의 참뜻을 요약하면, 「마음이 있는 생령(生靈)은 다 지금 있는 이대로 '부처' 


아님이 없다」는 뜻이며, 




또한 이 '마음'이라는 것도 다만 <모든 것을 환히 아는, '앎의 성품'>이니, 예컨대, 물을 마셨을 때에 


'차다'고 알고 '뜨겁다'고 아는, 바로 그 마음이 '부처'인 겁니다. 그런 성품을 새삼스럽게 배워서 얻


어야 하겠어요? 




이것이 바로 누구에게나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영각성靈覺性)이며, 


이 영각성을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도(道)라고도 하며, '부처'라고도 하는데, 영각성 여기엔 본래 이름


이 없는 겁니다.




'부처'란 '마음'을 밝히고 근본성품을 보아서 모든 일을 끝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 하면,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세상사는 마음이 억지로 分別해서 지어낸 것임을 알아서, 이 세상만사에 집착하지 말라는 


게 바로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는 가르침의 참 뜻인 겁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그대가 그렇


다고 하면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데, 그대들은 어째서 그리도 걱정이 많은가?」


라고 한 고인이 말도 이 뜻을 밝힌 것이며,




나아가 「만법은 그대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느니라」고 했으니, 있고 없는 것까지도 


그대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달렸다면, 신통묘용(神通妙用)이 이에서 더할 게 어디 있겠어요? 




이렇게 무한량한 마음을 너무 옹색하게 만든 건 전혀 중생의 미혹(迷惑)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불법은 


학습이 아님을 명심하세요. 




* * *


「의미가 있다」고 하건, 「의미가 없다」고 하건 이와 같은 분별은 나의 소견(所見)일 뿐입니다. 


사람은 事物을 直接 볼 수가 없고, 記憶의 形態로 저장되어 있던 과거의 체험속에서 눈앞의 사물과 


비슷한 기억을 찾아내서는, 그 기억을 보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 눈 먼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는 우화가 있지 않습니까? 코끼리의 배를 만지작


거리던 소경은 한참 더듬던 끝에 <바람벽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지던 소경은<둥근 기둥 같다>고 


하거든요. 이 때, 그들이 본 것은 코끼리 자체가 아니라, 과거에 이미 체험했던 기억의 파편들 중에서 


비슷한 기억을 찾아내어, 그 기억을 보고는 말하고 있는 거예요. 




불법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이것을 상분(相分)이라고 해서, 봄(見)에 대한 사람들의 착각을 바로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모든 소견(所見)은 자기의 업식(業識)으로 투영(投影)한 <업의 그


림자> (業影)를 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옛 성현들이 이르기를, 「<참된 봄>(진견 眞見)은 봄이 없고, <참된 들음>(진문 眞聞)은 


들음이 없다」고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수행자라면,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서 생겨난 헛된 지견


(知見)에 얽매여서 <청정한 제 성품>(淸淨自性)을 어둡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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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법이 유식일 뿐입니다.(萬法唯識) 즉 일체삼라만상이 다 중생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매어있다는 말이에요. 


잘 모르겠거든 <꿈> 생각을 해 보세요. 꿈속의 모든 게, 유정(생각이 있는 것)이건 무정(생각이 없는 것)이


건 다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제 마음이 변해서 투영(投影)하는 그림자임을 알아차


리지 못하고,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제(實際)인 줄 착각하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되는 거죠. 




이 세상도 꿈과 마찬가지 에요. 이 세상이 몽땅 중생의 업식(業識)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마음 속에 투영


(投影)된 허망한 신(행동) 구(말) 의(생각 마음 의식)인 삼업(三業)의 그림자(業影)인데, 사람들이 제 


마음 속에 나타난 삼업의 그림자를 가리켜, 저 바깥에 있는 경계라고 보는 바람에 하늘 땅 사람 삼라


만상이 마치 실제(實際)인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기를 수 천 만 년 동안 그렇게 전도된 의식


(意識)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금강경(金剛經) 말미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지요? 그냥 건성으로 들어선 안될 게송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나니,


마땅히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렇게 보아야 하느니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이 게송의 뜻만 깊이 이해해도 실체가 없는 허망항 이 세상 일체 존재에서 홀연히 벗어나, 금강과 같은 


'본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게 금강경의 요지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온갖 법이 따라서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면 온갖 법이 따라서 사라진다>(心生種


種法生 心滅種種法滅 심생종종법생 심멸종종법멸)고 했으니, 이 세상이라는 게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다만 사람의 한 찰나 한 생각 마음에 매어 있음을 알 터인데, 다시 무엇을 망설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