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When your mind is made up)
(서프라이즈 / nightowl / 2008-11-17)
밤 택시 6년차 Nightowl입니다.
3년여를 같이 일했던 교대 파트너가 집안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3개월간 휴직을 결정하였다.
"형님!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일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주간에만 근무하는 교대 파트너를 구하지 못하면 주·야간을 번갈아 근무해야 하는데, 주간근무자를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수년간 몸에 배어버린 야행성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데 있었다.
어둠이 세상을 뒤덮을 때마다 총기로 반짝이는 두 눈과 가을 하늘의 청명함처럼 맑아 오는 머리는 'Children of Darkness'만이 누려온 특권인데 단 몇 개월이나마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배차를 새로 받고 새 파트너를 배정받아 시작된 일주일간의 주간근무.
'이건 장난이 아니다!'
꽉 막힌 도로. 어딜 가나 진을 친 오토바이의 물결. 때로는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 처음 양복을 입을 때 만큼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난생처음 구입한 선글라스를 꼈다 뺏다를 수차례.
'그냥~ 봐줄 만하네. ㅋㅋ.'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똑같은 시간을 일하고도 수입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이유는, 손님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파악이 아직 덜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해만 떴다 하면 기력이 쇠잔해지는 야행성을 바꾸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나름의 진단이 더 큰 이유였다.
'그래~ 이 기회에 좀 쉬어가자!'
출근전쟁
아침 8시 50분 청담역.
아침 9시가 가까워질수록 강남의 전철역주변은 택시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긴 줄을 이루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강남 일대는 CCTV가 너무도 잘 설치되어 있어 합승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예외인 곳이 있다는 걸 주간근무 이틀 만에 찾아내었다. 바로 청담역에서 삼성역 쪽으로 향하는 코스가 그곳이었다.
지하철 입구에 늘어선 긴 줄 앞에 택시를 세우니 맨 앞 손님이 앞좌석에 탄다.
"현대백화점요."
뒤에 선 손님들이 다급하게 물어온다.
"공항터미널!", "네. 타세요."
그렇게 4명을 꽉 채웠다. 여자 셋, 남자 하나. 8시 52분. 출근도장 찍기까지 8분 남았다.
"요금은 1,500원씩 받겠습니다. 9시 안에 가셔야죠?"
빨리 가겠다는 아니, 난폭운전을 해도 양해를 바란다는 물음임과 동시에 매일같이 출근전쟁을 치르며 하필이면 오늘 내 차에 오른 손님들의 초조함을 달래주는 물음이기도 했다.
출근시간에 몰린 차량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고 있는데, 봉은사 사거리에서 신호에 딱 걸린다. 신호 떨어지기만 기다리다가는 1분 30초를 까먹는다.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겨우 차 한 대만 다닐만한 골목길을 전속력으로 통과하니 목적지 도착하기 전 좌회전 신호가 켜있다. 저 신호를 받으면 1분 이상 절약이다. 4차선에서 1차선으로 급차선변경. 황색신호와 함께 가까스로 건너왔다. 8시 56분. 손님들이 안도의 숨을 고른다.
"여기서 매일 택시 타고 출근하는데, 이렇게 빠른 택시는 처음이네요. 요금 깎아주는 택시도 처음이고요. 하하하."
맨 먼저 내리는 남자손님이 요금을 지불하며 한마디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남은 손님들이 차례대로 내리면서 인사를 잊지 않는다. 일일히 답례를 하고 시계를 보니 8시 58분. 6분 만에 6천원을 벌었다.
여러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공공연한 불법이 자행되는 현장. 난 이런 게 좋다!
낮에 만나는 사람들
밤손님만 상대하다가 낮 손님을 상대하니 뭔가 다른 점이 있다. 하루를 끝내는 것과 일과를 진행하고 있는 것의 차이가 사람들의 말과 표정 그리고 몸짓에서 묻어난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만나는 택시에서 행여나 기분 상하는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신경이 곤두선다. 손님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오가는 대화가 밤손님들보다 더 정겹고 따뜻하다.
밤에 3,500원의 요금은 별것이 아니지만 낮에 받는 3,500원은 더 없이 소중하다. 2~3만 원 손님을 허다하게 태우는 밤 근무에 비해 이런 손님을 태우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 낮에는 '티끌 모아 태산' 전략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낮 근무가 가져다주는 아기자기한 맛이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내가 지독한 야행성만 아니라면 이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요즘 택시는 어떠세요?"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고물가에 시달리는 손님들이 맨 먼저 던지는 화두는 단연 "요즘 택시는 어떠세요?"다. 낮에 만나는 손님들의 계층이 더 다양해서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질문공세에 시달리는 데 돌아가는 대답은 한결같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와~아저씬 잘하시나 보다. 다들 죽겠다는데."
"수입은 똑같은데 지출이 너무 늘어났다는 게 문제죠. 하루 두 팩씩 마시는 우유가 550원에서 800으로 올랐으니 500원씩 더 지출하잖아요. 이게 어디 우유뿐이겠습니까?"
"맞아요. 요즘 만원가지고 뭐 살 거라도 있나요."
"기업 살린다고 고환율 정책 폈다가 기업은커녕 서민들까지 말아먹고 있죠."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경제 살린다고 찍어줬는데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애초부터 기대조차 안 한 저 같은 사람이야 괜찮습니다마는."
"그러게 말이에요."
"경제 살린다고 감세에 규제에 종부세까지. 이래도 안되면 남은 길은 망하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는 좀 망해도 된다고 봅니다. 도무지 철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통령에, 부자 감싸는 한나라당 국회 다수 만들어주고, 사교육비에 짓눌리면서도 아이들 경쟁 조장하는 교육감 당선시키고. 뭐 할 말 있습니까? 망해야지."
여기까지 오면 손님들 대부분은 입을 닫아버린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권력 눈치 안 보면 여지없이 모가지 잘라버리고, 어디 이래서 대한민국이 발전하겠습니까? 권력에 줄대느라 정신없는 검찰 나부랭이들 보면 이 나라가 어찌 될지 참 한심합니다. 이게 심각한 문제인데요. 요즘은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겁난다니까요.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험담해도 아무 거리낌 없었던 나라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혹시 이러다 유언비어 유포죄로 불려가는 거 아냐?'라고 생각되는 나라가 되었으니 말이죠."
결론은 이겁니다.
"요즘 택시는 아무 문제 없거든요? 근데 앞으로가 문제죠. 니들이 망하든가 우리가 망하든가. 그러기 위해서 뭘 해야 하죠?"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When your mind is made up)
다시 밤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그리웠던 밤 공기였던가!
어색하게 구입했던 선글라스를 사물함 한구석에 잘 모셔놓고 다시 일주일간의 밤일(?)을 시작했다.
밤 12시 30분. 압구정동.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작별인사를 나누는 곳에 택시를 댔더니, 아리따운 20대 여자 손님이 한 손엔 케이크를 들고 다른 한 손엔 꽃다발을 안은 채 택시에 올랐다.
"아저씨. 일산요. 미터기로 가시죠?"
"그럼요. VIP 손님이신데. 일산 어디 신데요."
킨텍스 지나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란다. 4만 원짜리 손님. 이 맛에 밤일(?)이 좋다니까!
택시를 타자마자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오고 걸고. 자유로에 진입해서야 잠잠하다.
"손님! 오늘 생일이신가 봐요."
"네."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생일선물을 좀 드릴까 하는데, 요금 깎아드리기는 뭐하고. 음악선물은 어떨까 하는데요."
"음악선물요? 와~"
"뭐가 좋을까…. 그래. 이게 좋겠다."
MP3를 조작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하나 물어볼게요? 혹시 once란 영화 보신 적이 있으신지."
"영화는 못 봤는데 어디서 본 건 같아요."
"그러면 제가 잠깐 설명드릴게요. 기타 하나 달랑 들고 거리에서 노랠 하는 청년이 있는데요. 어느 날 이 사람이 부르는 노래에 매료된 한 여자가 다가옵니다. 둘 다 삶에 상처가 있는데요. 음악을 통해서 이 상처들을 치유해 나가죠. 노래에 무한한 힘과 용기를 심어주는 그녀 덕에 그는 용기를 얻고 앨범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았던 그녀와 함께 런던에 와서 첫 곡을 녹음하는데 바로 이 노래가 그 첫 곡입니다. 이 장면이 참 명장면인데요. 프로듀서가 참 촌스러운 이 사람들을 보고 처음엔 한심한 듯 쳐다보다가 노래가 시작되고 노래가 끝났을 땐 그의 음악에 절대적인 팬이 되어 버리죠.
제목은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입니다. Music Start!"
When your mind is made up - 영화 once 중에서
http://blog.daum.net/night_taxi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땐 그 남는 여운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 차창 밖으로 들려오는 매서운 바람 소리만이 이 정적을 깨운다.
"와~ 넘 좋아요. 이 영화 꼭 봐야 되겠네요."
"생일 선물이 괜찮았습니까?"
"너무 고맙습니다. 이런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다니."
"살아가시면서 많이 상처입고 하실 텐데요. 그때마다 이 음악을 기억하십시오."
한사코 미터기요금만 받겠다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한 손님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다시 한 번 생일 축하 드립니다. 안녕히 계세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
생일선물로 선사했던 노래를 다시 틀어본다.
If you want something
당신이 무언가 원한다면
and you call…. call
나를 불러주세요.
Then I `ll come running to fight
내가 힘껏 달려갈 테니
and I `ll be at your door
당신의 문에 있을 테니
When there `s nothing worth running for
아무것도 상대가 안 될 거예요.
when your mind is made up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when your mind is made up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
ⓒ nightow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