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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과연 용산참사같은 일이???

장백산-1 2009. 1. 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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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도 과연 용산 참사같은 일이?
번호 15111  글쓴이 Crete (Crete)  조회 631  누리 294 (348/54)  등록일 2009-1-30 07:17 대문 26 추천


루드로 학살 사건을 통해 미국이 배운 교훈
(서프라이즈 / Crete / 2009-01-30)



미국에서도 과연 이번 용산 참사 같은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일단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전에 미국에서 경찰관에 대한 인상이나 공권력을 대하는 일반 시민들의 분위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네요. 미국에 와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경찰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공권력이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제가 처음 미국에 발을 디딘 곳이 NIH라는 연구소가 있는 메릴랜드주입니다. 박사급 연구원만 수천 명이 상주하는 곳이니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의사선생님이나 치과선생님들 그리고 약대나 수의대, 농대, 자연대 출신의 박사들이 오셔서 연구를 하셨죠.


거기 있을 때 옆에서 봤던 사건 한 가지를 소개하죠. 한국 사람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음주운전인데… 미국까지 오셔서 겁도 없이(?) 한국 식당에서 소주를 몇 잔 걸친 뒤 몇 대의 차에 올라타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중 순찰 중인 미국 경찰에게 걸린 겁니다. 이 양반들이 한국에 있을 때, 의사선생님이라고 대우 받던(?) 시절을 추억하며 한국식으로 미국 경찰에게 엉겼던 겁니다. 운전면허증 달라고 하면 왜 달라고 하며 버티고, 검문을 하는데 차 밖으로 나와 따지려고 하고… 금상첨화라고 해야 할까요? 뒤따라 오던 일행들이 검문 중인 순찰차 뒤에 차례대로 차를 대고는 우르르 차 밖으로 나와 검문 중인 경찰에게 무슨 일이냐고 다가와 빙 둘러싸고…


기겁을 한 경찰이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하고 근방의 순찰차들이 거의 떼거지로 총출동을 해서 이들을 모두 검문하고… 한밤중에 락빌 인근에서 쌩쑈가 벌어졌죠. 결국 음주 운전을 한 모 대학 출신의 치과 선생님은 수갑을 차고 바로 경찰서로 직행했고 나중에 꽤나 큰돈을 쓰고 변호사를 사서 오랜 기간 동안 고생을 하셨죠. 물론 본인과 식구들은 NIH를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셨고요.


한마디로 미국에선 한국식으로 경찰에게 개기면(?) 뼈도 추릴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런 문화가, 즉 단순히 물리력으로 억누르는 걸로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공권력의 권위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이 되었는지 미국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드로 학살 (Ludlow massacre)☜


1800년대말과 1900년대 초의 노동현장이라는 것이 다들 아시겠지만 열악하기 짝이 없었죠.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루 8시간 노동 같은 소리는 꿈 같은 얘기였고 또 어린 아이들이 탄광에서 일하는 것도 흔하디 흔한 일이었습니다.

 USA --- Child labor in U.S. coal mine. Photo, ca. 1903. 출처

애들도 탄광 막장에 저렇게 나와 일하는 판국이니 전체적인 노동자들의 상태야 지금과는 비교가 불가능하죠. 그렇기는 한데 제목에 언급한 '루드로 학살사건☜'이 벌어진 콜로라도의 경우 당시 일상적인 노동자들의 고달픈 현장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즉 1890년대와 1910년대 사이에 미국 전국 평균 탄광 노동자 사망률의 2~3.5배 정도인 매년 6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죠. 그렇지 않아도 탄광에서 많이 죽어나가는 판국인데 다른 지역보다 엄청나게 더 많은 수가 죽어나가니 상대적인 불안감도 컸을 것이고… 거기에 추가로 꽤나 지저분한 일이 벌어지곤 했죠.


당시에는 시간당으로 임금을 계산해 주던 것이 아니라 광부가 캐 온 석탄의 무게로 임금을 주던 시스템이었죠. 그런데 이걸 회사가 저울을 조작해서 코 묻은 임금을 착취한 겁니다. 추가로 광부들을 한군데 몰아넣고 일종의 회사 탄광촌을 만든 다음에 여기에서 판매하는 일체의 식료품을 회사가 가격을 조절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죠. 이런 일이 영세업주에 의해 저질러져도 시원찮을 판국에, 이런 식의 야비한(?) 임금 착취가 다른 기업도 아닌 당시 미국의 최고 재벌인 록펠러 집안이 운영하던 콜로라도 채광회사(Colorado Fuel & Iron Company (CF&I) ☜)에서 벌어진 겁니다. 현재의 한국으로 치자면 삼성이나 현대쯤 될 겁니다.


작업 환경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른 지역의 2~3.5배의 사망률에 이런저런 자잘한 수법으로 임금을 착취해가니 어지간히 그 지역 탄광 노동자들의 불만지수도 높았던 모양입니다. 결국 지속적인 노조 결성 움직임이 있었고, 마침내 전미탄광노조(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UMWA) ☜의 도움을 받아 파업에 돌입합니다.


이게 1913년 일인데 당시 요구 사항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참 소박(-.-;)한 것들입니다.


1. 노조를 협상 대상으로 인정할 것.
2. 임금 10% 인상에 해당하는 채탄 가격 인상
3. 하루 8시간 노동 법규 적용 요구
4. 임금에 철로 부설, 침목 작업, 잡석 제거 등에 들어간 노동도 포함할 것
5. 채탄된 석탄의 무게를 측정할 때 노동자 측 인원도 참석할 것
6. 회사 상점 이외의 다른 상점을 이용할 권리를 인정할 것
7. 콜로라도 주법률의 엄격한 준수(광산 안전 규칙 엄수, 회사 내에서만 통용되는 전표 폐지)와 구사대 폐지


이 중에 3번의 경우, 즉 하루 8시간 노동은 이미 다른 곳에서는 전미탄광노조의 노력에 의해 1898년에 실시된 반면 재벌 그룹인 록펠러의 CF&I에서는 여전히 준수되지 않고 있었죠. 그리고 7번의 요구 사항을 보면 전태일 열사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 자살한 일을 떠올릴 내용이죠. 그나마 있는 주법률이라도 좀 제대로 지키라는 거니…-.-;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구사대 폐지 요구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파업 광부들에게 'Death Special'이라고 알려진 구사대 장갑차: Wikipedia  출처☜ 

한국식으로 깡패나 용역 업체가 쇠파이프나 들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시면 곤란합니다. 바로 위에 올려놓은 사진이 당시 루드로 광산에서 활동하던 구사대의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보시면 일단 대형 세단 승용차에 장갑을 설치한 뒤에 여기다 M1895 콜트 브라우닝 기관총☜을 설치한 겁니다. 사진에 보시면 왼쪽에서 3번째 인물이 오른손으로 짚고 있는 물건이죠. 분당 450발 발사 가능하고 공냉식의 탄띠 급탄 방식의 기관총이죠. 이걸 끌고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겁주고 실제로 나중에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된 후에 사용하기도 하죠.


어찌 보면 한국식으로 각목이나 쇠파이프 들고 치고받거나 아니면 화염병 투척이 장난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만…(-.-;;)


아무튼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마자 회사는 즉시 노동자들을 회사 사택에서 추방해 버립니다. 결국 노동자들은 탄광 근처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게 되죠. 결국 1913년 여름에 시작된 이 파업은 1914년으로 넘어가며 그 추운 콜로라도 겨울 동안 파업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텐트 속에서 한겨울을 버티게 되죠.


 Lou Dold 촬영, 콜로라도 주립 역사회 제공.  출처☜ 'Mining Photograph☜'에서 2차 인용

이 파업과 이어진 농성과정 중에서 아주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파업 직후 노사간에 총격전을 포함한 충돌이 격화되자 콜로라도 주지사인 아몬스는 주 방위군의 출동을 명령하죠. 노동자들은 구사대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이들의 출동을 초반에는 환영했는데, 막상 이들이 출동을 하고 보니, 이 주 방위군의 사령관이 한때 노조 파괴 작업을 했던 양반이라는 것에 실망을 했고 더군다나 출동을 해서도 꽤나 회사쪽에 유리한 태도를 취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결국 1914년 3월 10일 사단이 벌어지죠.


회사 측에서 파업 노동자를 대신할 목적으로 고용한 교체 노동자 한 사람의 시신이 포브스(Forbes)라는 마을 근처의 철로에서 발견된 겁니다. 이걸 파업 노동자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판단한 주 방위군 사령관이 포브스 마을 근처에 있던 파업 노동자들의 텐트촌을 보복 공격(-.-;)하기로 한 것이죠.


여기서 잠깐…!!


이때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한 집단을 주 방위군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회사가 고용한 무장단체로 볼 것이냐 하는 논란이 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원래 출동하기는 주지사의 명령을 받은 주 방위군의 지위로 출동을 했는데, 이 일이 벌어지기 얼마 전에 콜로라도 주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주 정부 차원에서 더 이상 주 방위군을 이곳에 파견하는 걸 포기하고 철수를 결정한 거죠.


파업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대로 구사대의 폭력과 새로 파견된 주 방위군의 폭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반면에 CF&I사 측, 즉 록펠러 그룹과 주지사 측에서는 반대로 노동자들의 폭력으로 질서가 붕괴될 것을 염려해서,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하죠.


록펠러 그룹이 돈을 대서 CF&I사의 경비원들에게 주 방위군 군복을 입혀 무장단체를 구성한 겁니다.


즉 1914년 3월 10일 벌어진 루드로 학살에 동원된 병력은 어찌 보면 주 방위군이라는 공권력으로 이해되어 질 수도 있고 아니면 회사 측이 고용한 사적 무장단체로 이해될 수도 있는 거죠. 물론 파업 노동자 입장에서야 당연히 주 방위군이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이해될테지만 말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용산 참사에 동원된 용역업체 직원이란 사람들의 신분이 궁금해졌습니다. 관련 법규를 보면 행정청이 용역에게 대집행을 명하는 근거가 있기는 한데. 참조☜ 그런데 이 참조 링크를 따라가 보시면 글을 올린 '산마로'님이 주장하시는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불법 점거, 시설물 철거에 용역을 쓰는 것 역시 불법이 아닙니다. 시위 현장에 용역들이 얼씬거렸다고 해서 불법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 제8장 보칙 제83조(불법시설물의 철거) 정당한 사유 없이 공유재산을 점유하거나 이에 시설물을 설치한 때에는 「행정대집행법」 제3조 내지 제6조의 규정을 준용하여 철거 그 밖의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용산 참사에서 용역 업체 직원들의 역할에 갑론을박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논란을 정부 쪽에 유리하게 해석을 해 준다고 해도 '산마로'님의 주장처럼 용역을 쓰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한 가지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즉 이번에 동원된 용역 업체 직원이 '행정대집행법'에 근거한 '적법한 용역'이 아니라는 신분 문제이죠.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진압에 동원된 ㅎ건설은 정식 경비업체 등록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 경비업법은, 경비업자가 경비원을 배치할 경우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용산경찰서 관계자는 "ㅎ건설은 경비업체로 등록이 돼 있지 않아 신고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출처☜
 

결국 용산 참사에서 경찰의 작전을 옹호하시는 분들이 주장하는 '행정대집행법에 근거한 용역 합법론'이란 것도 이번 용산 참사에는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냥 용역 업체 복장만 입었다고 합법적인 용역 직원들이 되는 것이 아니죠. 법률이 있다는 건 그 법률이 규정한 절차를 모두 마쳐야 합법성을 취득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그냥 사설 불법 무장 단체가 경찰의 비호를 받았으며, 추가로 경찰과 합동 작전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일 뿐이란 말씀입니다.


왠지 록펠러 그룹이 돈을 대고, 주 방위군 군복을 입은 루드로 학살 당시의 무장단체에 대한 모습과 겹치는 이미지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진도를 좀 더 나가보기로 하죠.


이 루드로 학살 사건이 당시의 비슷한 노동쟁의에 비해 더 유명해 질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에 하나가 이 학살 현장에 몇몇 사진작가가 있었다는 점이죠. 이 양반들은 주 방위군 측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사진 자료들을 남겼습니다.

 Stuart Mace 촬영, 덴버 공립 도서관 제공. 출처☜ 'Mining Photograph☜'에서 2차 인용


물론 이 사진은 루드로 학살 사건 직전에 찍은 것인지 직후에 찍은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당시 주 방위군의 모습과 무장 수준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죠.


공격이 시작되던 시점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마침 얼마 전에 죽은 아기의 장례식에 단체로 참석하느라 텐트촌은 인원이 많지 않았죠. 공격이 시작되자 파업 노동자들의 텐트촌에 주 방위군이 진입을 해서 텐트마다 불을 지릅니다. 이때 참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죠. 당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구사대나 주 방위군에게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각 텐트마다 아래와 같은 대피굴을 파 놓고 있었습니다.

 Stuart Mace 촬영, 콜로라도 주립 역사회 제공.  출처☜ 'Mining Photograph☜'에서 2차 인용


주 방위군이 텐트촌에 난입을 하자, 2명의 아녀자와 11명의 아이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갔고, 멋도 모르고 비어 있는 텐트라고 생각한 주방위군 병사들이 불을 질러 버리자 그만 그곳에서 질식해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2명의 아녀자와 11명의 아이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노동자들 눈앞에 싸그리 불 타 없어진 텐트촌과 저 대피굴 안에서 2명의 아녀자와 11명의 아이들 시신이 발견된 겁니다.


이때까지 고만고만한 노동쟁의 하나가 전 미국을 뒤집어엎는 사건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죠. 콜로라도주의 거의 모든 조직 노조들이 벌떼같이 일어납니다. 총기 사용이 애초 불가능한 한국이 아니죠. 누구나 합법적으로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미국에서 주 방위군이 파업 노동자들에게 보복하는 과정에서 2명의 아녀자와 11명의 아이들이 죽어나갔으니 전체 미국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분노와 공포는 바로 대규모 무장 투쟁이라는 파급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 파업을 지원했던 전미탄광노조야 당연히 공개적으로 총기와 탄약을 나눠주며 무장투쟁을 촉구했고 당시 노조 세력이 막강했던 철도 노조 역시 주 방위군의 루드로 수송을 거부했죠. 이런 무장 투쟁이나 실력 행사 외에도 수천 명이 참여한 항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지죠.


자~~ 이 시점에서 용산 참사와 비교를 좀 해 보자면…


당시 출동한 콜로라도 주 방위군(실제로는 록펠러 그룹이 후원한 무장단체) 병사들이 무슨 악마적인 심보를 가지고 저항 능력이 없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머리통에 총을 쏴 갈겨댄 것이 아니죠. 겁 좀 줄 목적으로 쳐들어갔고 막상 제대로(?) 싸울 남정네들이 보이지 않으니 분풀이 겸해서 텐트에 불을 싸지른 것이죠. 그런데 재수 없게(?) 그 텐트 바닥에 어린이들과 아녀자들이 숨어 있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명박 대통령이나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철거민들을 불에 태워 죽이거나 자신의 휘하 경찰특공대원을 불 태울 목적으로 작전을 시작한 건 아니겠죠. 기껏해야(?) 공권력을 앞으로 확실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결연히(-.-;) 표명하자는 일종의 과시용 작전이었을텐데…


하지만 파업 노동자 텐트촌에 기관총을 앞세워 무력 침입했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변명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이듯이 마찬가지로 시너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화염병이 난무하는 망루에 제대로 된 진화장비 하나 없이 휴대용 소화기만 달랑(?) 들고 물대포에 의지해 쳐들어갔다면 이후 발생한 사태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루드로 학살 사건의 진행이 여기서 그냥 '노동자들의 무장 투쟁이 장기간 벌어지다 차례대로 정부군에 진압되었다~~ '라는 식으로 결론이 난다면 이번 용산 참사와 연관지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하나도 없겠죠. 그럼 한번 어떤 일이 벌어졌나 살펴볼까요?


단순한 노동쟁의 하나가 갑자기 대규모 무장 투쟁으로 변모하자 (실제로 이 무장 투쟁은 약 10일 정도 지속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우드로 윌슨☜은 연방 정부군을 파견해서 양쪽 모두를 무장해제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파견된 연방 정부군은 관련 보고를 워싱턴에 직접 하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연방 정부군은 무장 노동자들만 때려잡은 것이 아니라 회사 측이 고용한 무장 단체를 똑같이 무장해제 시켜 버립니다.


단순히 양쪽을 똑같이 무장해제시킨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후 월셔 위원회(The Commission on Industrial Relations) ☜를 통해 사건의 진상조사와 함께 회사 측의 최고 경영자인 록펠러 주니어도 청문회에 출석시켜 증언을 듣죠.


이후 1916년 12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보고서가 만들어졌고, 이 보고서를 통해 하루 8시간 노동과 아동노동 금지 등이 제안되었고 당시 노동조합이 요구하던 많은 사항들이 보고서를 통해 입법 제안이 되었죠.


이런 정부 측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졸지에 아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의 학살을 방조한 악덕 자본가로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된 록펠러 주니어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게 되죠.


물론 이 록펠러 주니어도 처음부터 그런 노력을 하던 건 아니고… 실제로 사건이 터지고 3달이 지난 1914년 6월 10일에도 다음과 같은 입장이었죠.


"이건 학살이 아닙니다. 전체 파업 노동자들의 위협에 겁 먹은 두 개의 작은 무장 단체의 절망적인 전투에서 비롯된 겁니다. … 주 정부군에 사살된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없습니다… 물론 희생자가 발생한 점은 유감입니다만, 이번 일에 거의 책임이 없는, 법과 재산을 지키려는 이들 앞에 극단적인 비난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죠.


"There was no Ludlow massacre. The engagement started as a desperate fight for life by two small squads of militia against the entire tent colony … There were no women or children shot by the authorities of the State or representatives of the operators … While this loss of life is profoundly to be regretted, it is unjust in the extreme to lay it at the door of the defenders of law and property, who were in no slightest way responsible for it." From 'American Experience: The Rockefellers' 출처☜


이러던 양반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무수한 언론의 집중적인 비난과 각종 사회운동가들의 노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되죠.


사건이 터지고 1년 반쯤 지난 1915년 9월 20일 광산 노동자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동반자입니다. 자본은 여러분들 없이 살아나갈 수 없고, 여러분 역시 자본 없이 살아나갈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자본과 노동이 함께 할 수 없다고 여러분에게 다가와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여러분의 최악의 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바로 이 광산에서 충분히 우호적으로 함께 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뉴욕에 있을 때 회사 관리자들과 여러분이 잘 지낼 수 없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We are all partners in a way. Capital can't get along without you men, and you men can't get along without capital. When anybody comes along and tells you that capital and labor can't get along together that man is your worst enemy. We are getting along friendly enough here in this mine right now, and there is no reason why you men cannot get along with the managers of my company when I am back in New York." From 'American Experience: The Rockefellers' 출처☜


물론 이런 말이 이명박 대통령이 작년 (2008년) 광우병 파동에 따른 촛불시위 때 보여 준 언행처럼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아침이슬 노래를 들으며 반성을 많이 했다고 해 놓고는 바로 시위가 좀 수그러드니 각종 관련자들을 연행하고 탄압을 하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는 달리, 최소한 이 사건 이후 록펠러 주니어는 자신이 쌓아 놓은 엄청난 부를 자선사업에 투자해서 이후 미국인들에게 록펠러 주니어라고 하면 자선사업가라는 이미지를 남기게 되었죠.


에공~~~


이야기가 좀 길어진 듯 싶습니다.


루드로 학살 사건이 전체 미국을 뒤집어 놓고 대통령 지시에 따른 연방정부군까지 동원이 되고 나아가 한 사람의 재벌 기업주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고 또한 미국 정부 차원에서 수많은 노동 개혁을 이끌어 낸 과정에는 수많은 관련 노동조합원들의 헌신적인 희생이 뒤따랐고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당시 양심적인 언론의 날카로운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용산 참사를 통해 공권력의 권위 추락을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공권력의 권위는 무작정 반대자를 토끼몰이식으로 몰아 신속하게 일망타진하는 과정에서 수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최소한 이해당사자 양쪽 모두에게 겉으로라도(-.-;) 공정하게 보이고 이후 사건의 원인이 되는 각종 사회 부조리를 기간이 얼마가 걸리던 국민들이 보기에 대통령과 의회가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의 의지를 보여 준다는 신뢰가 쌓였을 때 점차적으로 공권력에 대한 권위가 살아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경찰이 경비업체로 등록되지도 않은 업체의 민간 무장 단체 수준의 깡패 집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뒷배를 봐주는 작전을 한 뒤, 이를 폭로한 야당 국회의원에게 오해가 있다는 식으로 발뺌이나 하고, 또 검찰이라는 작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살펴보는 노력조차 하고 있지 않다가 야당에 의해 사실 관계가 폭로되니 마지못해 수사에 나서는 식으로는 아무도 설득하기 힘들죠. 공권력의 권위 확립은커녕 비아냥만 듣기 십상이죠.


더구나 최소한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줘야 할 언론이 앞장서서 '법 질서 못 세우는 정부는 자격없는 정부다' (조선) 관련 링크☜라는 식으로 기사를 써 내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마당도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계층 간의 반목만 조장하는 극히 부정적인 결과나 도출될 뿐이죠.


오늘 프레시안의 보도☜를 보니 한나라당의 정책 싱크탱크인 여의도 연구소의 자체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이번 용산 참사가 경찰 잘못이라는 의견이 53% 정도인 반면에 시위자 잘못이라는 의견이 36% 정도로 나왔더군요.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사퇴해야 된다는 의견은 41%, 그냥 자리에 남아 있어야 된다는 의견은 18%. 자신들의 수족인 여의도 연구소가 조사한 결과가 이 정도로 나왔다면 제 정신인 정부나 여당이라면 좀 알아먹을 만도 할텐데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결국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많은 이들의 공분을 야기한 사건에서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넘어갈 것 같군요.


이번 저의 글은 '용산 참사도 마찬가지 사건이니 미국 루드로 학살처럼 공권력에 저항해서 무장 투쟁을 하자' 라는 주장이 아닙니다. 노동자든 기업주든, 그리고 정부든 이런 류의 사건들은 돌아가신 분들에게 애도의 심정과 남은 가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건의 진상 파악이니 뭐니 하며 이런 감정적인 면을 늦출 일이 아니죠. 하지만 이런 사건을 통해 앞으로 비슷한 부류의 참사가 재발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누가 보기에도 공평한 진상 조사와 약자들의 소외감을 덜어줄 전향적인 개혁 정책의 도입이죠. 더불어 이 일을 추진한 관련자들의 솔직한 반성과 자기 성찰이 따라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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