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100년學'을 꿈꾸며…
(서프라이즈 / 初雪 / 2009-03-06)
지성인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망보는 자이다. - 알베르트 까뮈
내가 아는 지성인은 항상 의문을 품고 살아가는 골치 아픈 인간들이다. 사물에, 현상에, 사실관계에, 의미에, 거짓에, 또한 진실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말이다.
이 나라에는 정치만 잘못된 게 아니다. 그 소통 수준부터가 잘못된 것이며 하루에도 수많은 이슈거리를 담당하는 미디어의 왜곡질은 달리 말해 무엇하랴?
지성의 힘이라는 건 다른 게 아니다. 그저 의심하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하는 것이다. 성역이 어디 있는가? 언론이 성역인가? 그 잘난 엘리트들의 조잡한 교양머리가 성역인가? 다수결이 성역인가? 종교가 성역인가? 학자들의 권위가 성역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대들의 자존심이 성역인가?
따져 물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고민해야 하며 그런 이유로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 결국엔 자기 검열이다. 그래서 성찰이다. 합리란 바로 그런 것이다.
참여정부 들어 배신감이라는 정서가 이 사회에 만연하였다. 그래서 결국 이명박 꼴이 났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배신인가? 노무현에 대한 배신이다. 그들에게는 노무현이 친구 같은 대통령이 아니라, 자신의 입신과 욕망을 해결해줄 호구로 보였을 테니까 말이다.
잘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자존감을 걱정했다. 잘난 민주화 인사들은 그네들의 명예를 갈구했다. 잘난 학자들은 그대들의 교양을 소망했다. 잘난 정치업자들은 입신을 기다렸다. 잘난 진보주의자는 유토피아를 말하였다. 보수주의자는 체면치레를 걱정했고, 슬픈 서민들은 모가지에 힘 좀 넣어달라 연일 쌍소리를 해댔다.
모두가 쌍욕질이었다. 모두가 노무현 탓이었다. 결국에 자기 탓은 없었다. 그렇게 내뱉어 온 말이 "노무현 결국 너도 별수 없는 것이 왜 깨끗한 척 했니?" 그거 아닌가?
도대체 참여정부가 어디까지 했었어야 했나? 당신들이 사는 그 세상에, 지금처럼 천국과 지옥이 양존 하는 이 극단적인 세상 속에서 어디까지 바꾸어 주어야 했던가? 고작 5년이었다. 그 5년 동안 국민은 국민다웠나? 참여는 참여다웠나? 원로는 원로답게 처신했었나? 좌파들은 귀를 열었나? 보수들은 적개심을 풀었나? 대학생은 대학생다웠나? 한 가정에 가장은 가장다웠나? 부모는 부모답게 아이들의 교육환경에 대해 고민해봤나?
노무현 때문에 이 사회가 시끄러웠던 건가? 아니면 당신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온 건가?
민주주의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기에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분권 지향이다. 대통령 혼자 책임진다고 그 사회가 깨끗해지는 거 아니다. 이제 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그까짓 5년을 버렸던, 10년을 잃어버렸던 이제는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정분리 해줬다. 국회를 존중해줬다. 검찰 독립시켰다. 국정원까지 풀어놓았다. 언론에는 언론답게 바로 서달라 주문을 했다. 시민은 시민답게 정치적 의사를 결정해달라 부탁했다.
솔직히 말하자. 그래 노무현 5년이 지났어도 이놈의 진절머리 나는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더라. 대통령이 권력을 내주어도 결국 변한 건 없더라. 남는 게 하나도 없더라.
외환보유고 바닥에 주식이 반 토막 날 만큼, 당신들이 그렇게나 돌아가고 싶었던 지난 10년 전과 하나도 변한 게 없더라.
소통은 앞뒤로 꽉 막혀있고, 역시나 언론은 더럽게도 변절했다. 미디어는 조작질이 시작되었고, 법치는 몽둥이로 변했다.
이제는 무엇을 의심할 텐가? 당신들의 욕망을 의심할 텐가?
예로부터 이르기를 ‘팔자는 손금만 못하고, 손금은 관상만 못하며, 관상은 심상(心象)만 못하다.’라고 했다. 그래서 세상 지사 마음먹기에 따라, 그 심상을 가꾸는데 달라지기에 일체유심조라 하였다.
저마다 마음을 가꾸고 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 발짝 뒤로 서서 바라봐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그래야 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거다. 그래서 멀리 바라봐야 한다. 넓게 바라봐 주어야 한다. 결국엔 자신들을 되돌아 봐야 한다.
그런 외연적인 확장에 소통이 있다.
소통을 할지라도 공평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공평무사한 소통관계가 바로 가치 중립이다.
중용이 달리 중용인가? 어려울 것 없다. 자신을 바라볼 때라야 중용이 바로 선다.
그렇게 지도자의 중용이 바로 설 때 정치가 돌아간다.
세상 이치는 참 단순하게도 그렇게 맞물리는 것이다.
결국, 이 나라의 문제는 경제가 아닌 신뢰였던 거다.
노무현의 '100년學'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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