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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희망,미래,SYK글로벌 김윤종 회장

장백산-1 2009. 9. 5. 10:13

[CEO 창업 스토리] 타계 35주년 최종건 SK그룹 창업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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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종 SYK글로벌 회장 겸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작성자: food501 추천: 0건 조회: 7 등록일: 2009-08-17
김윤종 SYK글로벌 회장(60)의 ‘위기의 한국 변해야 산다’ 강연이 최근 CEO들 사이에서 매우 화제다.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김윤종 회장이 미국에서 두 번이나 성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기업과 CEO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조언해 주는 게 강의의 핵심이다.

3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2년 전 영구 귀국해 현재 SYK글로벌 회장 겸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중인 김윤종 회장은 ‘아메리칸드림’의 대표주자. 99년 자신이 창업해 대표로 있던 자일랜을 프랑스 알카텔사에 20억달러(1달러 1000원 계산 시 2조원)에 매각하면서 벤처 신화가 된 인물이다. 당시 자일랜에 근무했던 직원 등 100명 이상이 백만장자가 됐다.

김윤종 회장은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단 한마디로 ‘미국에서 창업한 것’으로 꼽는다.

학연, 지연이 먹히지 않고 뇌물, 접대가 없는 미국 기업문화는 오로지 실력만을 요구한다. 이는 달랑 실력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김 회장이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 ‘주주 가치 보호’를 기치로 내거는 기업문화 역시 김 회장을 성공으로 이끈 요인 중 하나다. 주주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은 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의 힘이 막강하다. 전문가 군단으로 이뤄진 이들 사외이사는 대주주 CEO도 실적이 형편없으면 언제든지 해임시킬 수 있다. 때문에 대주주 CEO라 할지라도 늘 긴장하며 좋은 실적을 내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다.

20억달러에 회사 매각한 벤처 신화

“한국에 와서 여러 기업을 둘러보며 느낀 것은 한국 기업문화가 미국 기업문화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학연, 지연으로 얽혀 있는가 하면 대주주 CEO는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더군요. 이걸 단순히 일개 기업의 문제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개별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곧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니까요. 이런 기업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더 큰 발전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 않았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는 중국도 인도도 베트남도 없었어요. 이제 우리와 경쟁할 국가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지금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정말 미래가 없을지도 몰라요.”

김 회장 강의를 들은 수많은 CEO가 그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부터 변화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그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인생 스토리는 그야말로 ‘인간극장’ 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정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다. 이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재학하던 시절, 온 가족이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보겠다며 이민을 갔다. 김 회장은 혼자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마쳤다. 대학 졸업 후 김 회장도 미국행을 선택한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뤄보겠다는 열망 하나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야간대학원에 입학한 것. 전공은 컴퓨터통신이었다. 낮에는 자동차부품 도매상에서 8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3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군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방위산업체에 취직한다. 엔지니어만 1000명이 넘는 대기업. 아메리칸드림의 시작이라고 기뻐했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9시 출근, 5시 퇴근을 칼같이 지키는 직장 분위기에서 신입 엔지니어가 할 만한 일은 심부름 등 허드렛일 정도였다. 작은 회사더라도 맘껏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자 생각한 김 회장은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중소기업으로 옮겼다. 그는 “전업이 내 인생의 전환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광섬유를 이용해 데이터를 보내는 통신회사가 김 회장이 새로 취직한 곳. 구리선이 막 광섬유로 대체되기 시작하던 시기라 일감이 많았다. 새로운 기업에서 책임연구원을 맡은 김 회장은 연구개발뿐 아니라 영업, 애프터서비스(AS), 기획 등 수많은 분야의 일을 섭렵해 나갔다. 중소기업 특성상 자신이 맡은 일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김 회장에게 기회가 됐다. 1인 다(多)역을 하면서 회사의 ABC를 알게 된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밑천 삼아 창업을 결심한다.

84년 3명의 투자자로부터 10만달러를 투자받아 광섬유 통신 회사 ‘파이버먹스’를 설립한 것. 지인의 차고가 사무실 겸 연구소였다. 혼자서 차고에서 먹고 자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1년 만에 시제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작정 이전 회사 전문경영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분의 20%를 줄 테니 영업을 맡아 달라 부탁했다. 경영을 해본 인물이 합류하면서 회사는 일사천리로 굴러갔다. 사업계획서가 만들어지고 투자가 성사됐다. 영업이 본격화되면서 매출도 급증했다. 5년 만에 매출액 5000만달러 회사가 만들어졌다. 91년 ADC텔레콤에서 파이버먹스를 사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김 회장은 5400만달러에 회사를 매각했고, 투자자들은 25배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첫 번째 창업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두 번째는 더욱 잘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김 회장은 93년 컴퓨터 네트워크 업체 자일랜을 창업했다. 김 사장의 첫 번째 성공을 지켜본 투자자들이 500만달러를 모아줬다. 이처럼 돈이 좀 있는 가운데 시작한 관계로 좀 더 많은 인재를 데려와 더욱 안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진입장벽이 높은 제품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덕분에 회사는 급성장을 거듭했고, 96년 나스닥에 순조롭게 입성할 수 있었다.

사회 환원에서 제2 인생 찾아

“그러나 이때부터 너무 힘들었다”는 게 김 회장의 토로다.

“나스닥 상장 전까지 매출액이 급상승한 기업이다 보니 주주들은 당연히 매번 그런 급성장곡선이 그려질 것이라 기대하더군요. 조금이라도 성장률이 떨어지면 바로 주가가 하락했어요. 스톡옵션을 바라보고 우리 회사에 모여든 인재들과 주가 상승을 기대하며 자일랜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들 기대에 부응하려다 보니, 정말 하루 24시간 개인생활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일에 매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커지니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일이 맘처럼 진척되지 않을 때가 점점 많아지더라고요. 거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게 아닌가 괴로워할 즈음 운 좋게도 알카텔사가 자일랜을 사고 싶다고 나선 거예요. 99년 알카텔에 자일랜을 20억달러에 매각하면서 투자자들에게 100배의 이익을 돌려줄 수 있었습니다.”

당시 20억달러에 회사를 매각한 스토리는 세계 정보통신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이슈가 됐다.

두 번의 성공을 경험한 김 회장은 이후 인생행로를 확 틀어버렸다. 경영일선에서 은퇴하는 대신 엔젤투자자와 사회사업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 미국에서 생활하며 기업가의 주요 책무 중 하나가 사회공헌임을 늘 새기고 살아온 덕분이다.

99년 ‘스티브김(김 회장의 미국 이름)재단’을 설립하고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스티브김재단은 현재 서강대에 자리잡은 ‘꿈·희망·미래재단’의 전신. 현재 국내 장학생 약 200명, 중국 교포 장학생 400여명이 이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지원받고 있다. 미국 시민권자라는 조건 덕분에 수월하게 북한 동포 돕기에도 나설 수 있었다. 라선려객회사에 매년 7만~8만달러를 지원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경제특구로 지정된 나진에서 청진 등 각 지역으로 나가는 버스를 운영하는 업체다. 이외 나진에 위치한 선박수리공장, 빵공장, 비료공장 등을 지원하는 사업도 수년째 계속해 오고 있다. 꿈·희망·미래재단이 사회사업가로서의 삶의 기반이라면, SYK글로벌은 엔젤투자자로서의 삶의 바탕이다. SYK글로벌은 현재 20여개 회사에 투자를 단행한 상태다.

[김소연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05호(09.05.13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