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정부의 잘한 정책

[기고]S형에게--총리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의 글

장백산-1 2010. 7. 14. 10:56

[기고]S형에게 - 사찰 피해자 김종익의 글
번호 182431 글쓴이 경향신문 조회 2324 등록일 2010-7-13 20:01 누리1028 톡톡0


S형에게
(경향신문 / 김종익 / 2010-07-13)


S형,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네요. 올해는 해마다 당신의 기일에 올리던 술잔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왜냐고 묻지는 마세요. 당신이 계신 곳에서는 인간세상의 아귀지옥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하니 당신의 혼백이 제가 겪고 있는 일을 알고 계시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던 20대 중반 무렵, 출가를 준비하던 제게 당신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을 써주시며 세상의 동행을 권하셨지요. 그런 당신은 망년지교의 아름다운 노년을 함께 하자던 약속과는 달리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리고 남겨진 저는 통치자의 덕성에 해를 입혔다며 국정의 최고기구인 국무총리실에서 제 삶을 뭉개버린 후,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참혹한 일을 겪으면서 당신을 조금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요즘 새삼 통치자의 참된 덕성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2천 년도 더 전에 진나라 재상 이사(李斯)는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아 그 높이를 이루었고, 큰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까지 포용하여 깊이와 넓이를 이루었다”며, 진시황제의 정치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며 통치자의 참된 덕성이 어떤 것인지 말했습니다.

 

S형, 저는 총리실 민간인 사찰이라는 국가기관의 불법 행위로 삶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국가기관의 불법 행위는 명백한 사실로 드러나 있지만,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집권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상처 입은 국민을 향해 우리 편이 아니라고 잔인한 발길질을 해대고 있습니다.

 

그들은 10년 전에 사망한 아우까지 불러내 망자를 욕보이고, 제가 읽은 책을 들먹이며 색칠 놀이를 즐기며 저를 국민이 아닌 능멸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국가기구의 불법으로 상처 입은 백성에게 이토록 잔인한 행위를 하는 것이 ‘정치’인가에 저는 참혹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국민의 4대 의무를 게을리 한 적이 없는 국민을 국민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당신들의 정치는 본질이 무엇이냐고.

 

저는 좋은 정치란, 법치에 앞서 예(禮)로 다스려지는 것을 지향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는 법 이전에 언어나 문자를 빌지 않고 인간 사회를 규율하는 자연의 이치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국민의 삶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겠다는 공약으로 국민의 일꾼이 된 이들이 국민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이 패륜적 상황을 목격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바늘 하나 설 수 있는 관용조차 없는 집권여당의 옹색한 품에서 만백성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는 화해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정치란, 다름을 포용하여 자신의 덕성을 넓혀가는 것이라는 생각과는 너무 다르게, 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정치 행위가 풍겨내는 공포에서 저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S형, 통치자의 덕성을 해치는 사람들은 바로 이들 집권여당의 국회의원들이 아닐까요. 그들은 통치자와 소통을 원하는 국민의 아우성을 막아버리고 컨테이너 박스로 성을 쌓아 세상으로 흘러야 할 통치자의 덕성을 그 좁은 성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국가기구의 폭력으로 눈물을 흘리는 백성에게 서슴없이 칼질을 해대어 그것이 마치 통치자의 뜻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S형, 저는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운 국운에도 여전히 당파 이익에 몰두하는 세도정치가에 분개하여 도끼를 짊어지고 통치자께 상소를 올렸던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억합니다. 저도 선생의 흉내를 내어,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치가 아니라 저처럼 못난 국민이라도 품어주는 탕평의 정치를 베푸시라고 통치자께 간청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S형,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배은과 망덕을 넘어서 인륜을 아랑곳하지 않는 패륜을 마주할 때마다, 20년의 나이 차를 넘어 망년지교를 허락했던 당신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리움이 사무칠 때는 훌쩍 당신 곁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살아만 있어 달라’는 아내의 간절한 애원에 멈칫거리며, 이렇게 가고 없는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제 처지의 궁박함을 나무라지는 마세요.

 

여름이 깊어가는 산 위의 당신 묘소에는 제철에 피어난 들꽃이 한창이겠지요. 저는 가만히 소망합니다. 하늘이 높고 맑은 날, 시원한 바람까지 살랑 불어오는 날, 당신께 맑은 술 한 잔 올리면서 이 땅을 떠나겠다는 작별인사가 아니라 당신이 계신 이 땅에 기대어 살겠노라는 말씀을 드릴 수 있기를.


2010년 여름 어느 날, SDH 인형(仁兄)께 김종익 삼가 드림

 

김종익 / 전 KB한마음 대표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31813175&code=99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