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사의 고증
제 1편 366사의 고증
1.366사의 연원
전해지는 여러 역사서에는 366사(三百六十六事)의 연원이 배달국의 개천(開天)과 함께 시작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으로 한결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366사의 첫부분인 대시장(大始章)의 기록과 완전히 부합하고 있어 그 신빙성을 입체적으로 뒷받침한다.
[1]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의하면
“신시씨 즉 배달국 환웅천제께서 세상을 다스리신 것이 오래되었으며 치우천제, 고시, 신지, 주인 씨가 어울리어 인간의 366사를 다스리었다.”고 했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366사(事)의 기원을 환웅천제께서 개천을 하시고 배달국을 여신 시점으로 보고 있다.
이 기록은 366사를 전하고 있는 책인 성경팔리(聖經八理)의 성령장에서 366사(事)라고 명문화 한 것과 부합된다.(대시장 참조)
[2] 대야발 선생의 단기고사(檀奇古史)에 의하면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천하에 포고하시며 삼백육십육사(366사)의 신정(神政)으로 국민을 순순히 훈교(訓敎)하시니 그 덕은 천지(天地)에 비하고 그 밝은 것은
일월(日月)과 같더라. 그 교화를 받은 만민이 시월삼일(十月三日)에 환검(桓檢)을 추대하니 제일세 단제(檀帝)더라
단군조선의 제일세 단군이신 단군왕검께서 단군조선을 여시면서 먼저 삼일신고를 포고하시고 366사(事)로서 신정(神政)을 펼치셨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환웅천제의 366사를 단군조선의 단군왕검께서 계승하셨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 기록도 366사를 전하고 있는 책인 성경팔리(聖經八理)의 성령장에서 366사(事)라고 명문화한 것과 부합된다(대시장 참조)
[3] 한단고기의 삼성기(三聖記)에 의하면
“환웅께서 삼천단부를 거느리시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 오시니 이 곳을 신시라 하고 이 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셨으며 곡식과 생명과 형별과 선악을 주관하시고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모두 주관하시어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하시었다.”
[4]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인간의 360여사를 주재하시며 재세이화 하셨다.
凡主人間 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범주인간 삼백육십여사 재세이화
[5] 임아상(任雅相)의 삼일신고 전궁훈 주해
성통(性通)- 성통광명(性通光明)- 은 진성(眞性)을 통(通)하는 것이며 공완(功完)- 재세이화, 홍익인간- 은 366가지 선행을 제 것으로 하고,
366가지 음덕을 쌓아야 하며, 366가지 좋은 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면 나아가 일신(一神)을 뵈올 수 있으니 영원한 쾌락을 누리게 되니 견줄 바 없는 즐거움이 하늘과 함께 통하게 된다.
발해국(대진국)의 문적원감으로 계시던 임아상 선생이 주해 한 위의 내용은 366이라는 숫자에 집중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366이라는 숫자는 삼일신고의 총 글자수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366사의 총 조항수를 거론하고 있다.
366이란 숫자가 삼일신고와 366사에 공통적으로 쓰인 것은 같은 내용을 전달하되 그 전달 체계만 다른 것이지 366이란 숫자가 삼일신고 것과 366사 것이
다른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임아상(任雅相): 대진국(발해국)의 문적원감(文籍院監)벼슬에 있던 분으로 삼일신고를 주해하였다]
[6] 한단고기 북부여기 시조 단군 해모수
신사 20년 (B.C.220)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전 삼백육십육간(三百六十六間)을지어 천안궁(天安宮)이라 했다.
천안궁이란 곧 삼일신고의 천궁(天宮)으로서 하늘의 천궁을 땅위에 건설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또한 그 궁전의 규모가 366간이 되게 한 것은
삼일신고의 366자와 본 경전 삼백육십육사(366사)에 사용된 366수와 완전히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 비교 검토 ■
이 기록은 한단고기의 삼성기뿐만이 아니라 신시본기, 마한세가상 등에도 똑같은 내용이 있으며 366사를 360여사라고 설명하였다.
이 기록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본 경전이 과거 배달민족의 최고 지도자들께서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펼치기 위해 직접적으로 사용하던 경전이라는
중요한 내용이 찾아진다. 즉 본 경전의 대시장(大始章)내용인 주제인간(主宰人間)이란 곧 배달민족의 이상인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뜻함을 알 수 있다.
366사를 360여사라고 한 것은 본 경전을 전하는 책 중 참전계경의 서두에 똑같이 기록되어있어 이 역사서의 내용들과 본 경전의 내용이 완전히 하나임을 알게한다.
이 여러 가지 기록들은 다음과 같은 본 경전 서두의 내용과 일치함으로서 본 경전은 역사성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본 경전을 현재 전해지는 팔리훈(八理訓), 참전계경(參佺戒經), 성경팔리(聖經八理)등에서 이름을 선택하지 않고 따로 366사(事)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역사서에서 이미 366사(事)라는 이론이 전해지므로 가장 보편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풀이∎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기록에서 366사가 한웅천제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단 단기고사는 단군왕검께서 366사로서 교화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366사(事)는 한웅천제께서 이루신 재세이화, 홍익인간과 반드시 연결된(*삼국유사에서는 재세이화만 나타나고 홍익인간이 빠져있고, 규원사화에서는 재세이화,
홍익인간이라는 단어대신 내용이 적혀있으며, 단기고사는 일월과 같이 밝은 신정으로 순교화했다는 말로 대신했다.)
◉삼백육십육사(366사)를 삼백육십육여사(366여사)라고한 기록은 같은 내용을 약간 달리 표현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 기록상의 366사와 경전으로서의 366사
한웅천제께서 태백산 밑 신단수에 내려 오셔서 인간의 삼백육십육사(366사)를 주재하시며“재세이화.
홍익인간”을 하셨다는 내용을 살펴볼때 윗 문장에서 말하는 “범주인간 삼백육십육여사(凡主人間 三百六十六餘事)”라는 내용은 본경전 대시장(大始章)의 내용인
“철인 재상 주 인간 삼백육십육사(聖靈 在上 主 人間 三百六十六事)”라는 내용과 완전히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기록에서 말하는 삼백육십육사(366사) 또는 삼백육십육여사(366여사)란 본 경전을 의미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전이 배달국 한웅천제께서 이루신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바탕이 되는 경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배달국의 도덕정치(道德政治),
철학정치(哲學政治)는 실로 366사(事)라는 경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제2편 366사가 전해진 경로
366사(事)가 전해진 경로를 분명히 밝히는 자료는 아직 구체적이진 못하다. 따라서 366사(事)라는 경전이 전해지는 경로를 따로 추적하는 방법보다는
한인, 한웅, 단군 할아버지 이래 전해진 가르침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전해졌는가 하는 것을 추적함으로서 그 가르침의 기본이 되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事),한역, 단군팔조 등이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전해졌는가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아보는 방법을 취해보자.
그리고 추적된 경로를 통하여 본 경전 366사가 전해진 경로를 알아보는 외에 배달정신의 맥이 그 동안 우리 민족과 주변 민족에게 어떠한 형태로 전해졌으며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간단히 생각해보자.
한인, 한웅, 단군할아버지이래 전해진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한역, 단군팔조 등의 가르침을 신교(神敎), 한웅도(桓雄道), 신성지도(神聖之道),
현묘지도(玄妙之道)등으로 불리며 본류에서 지류로 분파되며 분파 된 나라에 따라 다른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 범위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한 것이되, 여기서는 기록에 나타난 것만 다루었다. 분파된 나라에서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었던 간에
그 내용은 하나인 것이며 그 중심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한역, 단군팔조 등의 가르침이다.
1. 신교(神敎)의 전래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事)라는 배달민족 삼대경전 중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이미 환국(桓國)시대로부터 구전(口傳)되었다고 고증되므로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이미 9000년 전부터 전해왔다 할 수 있고, 6000년 전 한웅천제 이후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녹도문자(鹿圖文字)로 기록되었고, 이때부터 366사(事)가
가르쳐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事)의 가르침은 단군조선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이때는 전서(篆書)로 전했다했다.
(*한단고기 참조) 그리고 단군조선 이후에 일어난 단군조선의 후예들인 부여, 고구려, 대진국(발해)과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 뿐만 아니라 터어키, 일본 등에 까지
우리의 신교(神敎)는 전해졌음이 확인된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세계사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였던 여러 단군민족의 분파들이 세계의 정신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중하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가 2000년 또는 3000년이라면 몰라도 그 이상이라고 본다면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단군팔조교 등을 바탕으로한 우리의 신교(神敎)는 명실공히
인류역사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세계종교임을 알 수 있다.
[1]배달민족의 여러갈래에서 받아드려진 배달의 종교
부여(扶餘)에서는 대천교(代天敎)
삼한(三韓)에서는 천신교(天神敎)
고구려는 경천교(敬天敎)
신라는 숭천교(崇天敎)
발해(渤海)에서는 진종교(眞宗敎)
만주(滿洲)에서는 주신교(主神敎)
요(遼)와 금(金)에서는 배천교(拜天敎)
고려(高麗)에서는 왕검교(王儉敎)라 하였으니 동사류고(東史類考)에서는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가르침인 (其實)은 단군설교(檀君設敎)라 했다.
위의 기록에서 백제는 빠져 있지만 백제의 수사도(修士道)는 일본에 건너가 수험도(修險道)로서 명치유신 이전까지 1300년간이나 그 실체를 유지하며
일본 민족정신의 근본이 되어왔음이 밝혀졌다. 명치유신의 주체들이 수험도를 폐지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한일간의 정신적인 유대를 인위적으로
단절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1 요(遼)나라
“요태조는 만주 영주 목엽산에 사당(廟)을 세우고 동쪽을 향해 천신위(天神位)를 설(設)하고 사당의 정원(廟庭)에 박달나무(檀樹)를 심고 이름하여
‘나무중의 임금(君樹)’이라했다. 앞에는 여러 나무를 심어 보회받는 반열을 상징하고 모퉁이에 두나무를 심어 신문(神門)이라 했다. 해마다 황제와 황후가
군수(君樹)앞에 이르러서 친히 잔을 올리고 음복(飮福)하며, 군사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사당에 고하더니 이에 삼신(三神)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청우(靑牛)와 백마(白馬)로서 제(祭)를 지냈다.(遼史)
1-2 금(金)나라
금대정십이년(金大定十二年)에 백두산록에 태백산묘를 세워 태백산은 흥왕(興旺)에 땅에 있으니 단조(檀朝)를 존숭(尊崇)함이 예(禮)에 합하다하여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에 봉하고 명창십이월(明昌十二月)에 곤면(袞冕:곤룡포와 면류관)과 옥망(玉罔:임금의 얼굴을 가르는 옥으로 만든 그물)과
의장(儀仗)을 갖추고 상(上:금나라 황제)이 대안전(大安殿)에 어(御)하야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복책하였다“ 했다.(金史禮志)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대진국(발해)과 요, 금, 청, 일본 등의 종교를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관점으로만 관찰하는 신라 이래의 고정관념은
거대한 본질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대단히 협소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방법은 한족(漢族)입장을 대변 할 수는 있어도 우리 배달 민족정신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아버려 진정한 동양의 핵심정신이 빠져있는 답답한 방법인 것이다.
1-3 터어키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쓴 대진국(발해)의 대야발선생(대진국 시조 대조영의 동생)은 고구려가 망하며 유실된 단군의 역사를 정리하기위해 돌궐(突厥)
즉 터어키국까지 두 번이나 들어가서 역사를 정리할 자료를 찾아 단기고사를 썼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터어키족은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이은 대제국을 세웠던 민족으로 대진국(발해)의 대야발선생이 유실된 고구려의 서적들을 터어키국에서 찾아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를 정리 할 정도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단군의 역사와 정신을 잘 보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터어키족 이외에도 흉노, 선비, 몽고,
티벳트 등의 민족들이 같은 종교를 가졌던 민족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 금, 청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을 생각해 볼때 우리민족의 현묘지도가
유불선을 포함한다는 내용은 역사적으로도 그 뒷받침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유불선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이 부분은 철저히 연구해보아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2-1 한단고기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고려 충정왕 4년(1351년) 신묘 3월에 은밀히 직사(直使) 이강(李岡)이 명(命)을 받고 첨성단에 제사지내고 나무판에 글을 새겨 시를 남겼다.
강능왕(江陵王) 우(禑)의 5년(1391년) 3월 신미년에 사자를 보내어 참성단에 제사지내도록 명을 내리고 대제학 권근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바쳤다.
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참성단에서 하늘에 바친 대제학 권근의 서고문에는 마리산이 단군이 제사지내던 곳이라는 내용과 구전지준(舊典之遵)이라는 문장과
보감명명(寶鑑明明)이라는 문장이있다. 여기서 구전(舊典)이라 함은 고려 이전의 옛날의 경전이며 참성단에서 제사지낸 서고문에 인용된 옛날의 경전은
곧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와 단군팔조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보감명명이라는 말 역시 같은 내용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고려의 조정에서도
한편으로는 불교를 내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단군 이래의 전해진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단군팔조 등의 경전이 지도층에서도 상당히 읽혔으며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으되 신하를 시켜서 제사를 지내는 정도의 규모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요(遼)와 금(金)의 경우 국가 최고 지도자가
직접 제사를 지냈지만 고려에서는 신하를 대신 보내어 제사 지냈다는 사실이다.
2-2 조선
마리산 참성단을 인조(仁朝) 17년에 개축하고 숙종(肅宗) 26년에 수축(修築)하였고 구월산(九月山)의 삼성사(三聖祠)는 한인(桓因),한웅(桓雄),단군(檀君)을
모시는 곳으로서 향인(鄕人)들이 삼성당(三聖堂)이라 하는 것을 성종(成宗) 3년 임진년에 삼성사(三聖祠)로 개칭하고 매년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영조(英朝) 41년 을유년에 신주를 넣어두는 궤(독)을 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정조(正祖)때에 삼성사를 중수(重修)하였다. (문헌비고 참조)
숭령전(崇靈殿)은 평양성 밖에 있으니 세종(世宗) 11년에 정전(正殿)과 동서행랑(東西行廊)을 시치(始置)하고 단군묘(檀君廟)라 칭하고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세조(世祖)원년 병자년에 위판(位版)을 바꾸어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 친서(親書)하고 5년 경진년에 왕자를 거느리고
서순치제(西巡致齊)하였고 영조(英祖)5년에 숭령전(崇靈殿)의 액(額-현판 또는 액자)을 봉걸(봉걸: 받들어 세움)하고 전참봉(전참봉: 숭령전을 지키는 벼슬)2인을
세워 지키고 받들게하고 도신(도신: 숭령전이 있는 곳의 신하)을 파견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문헌비고참조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고려에 이어 조선에도 한인, 한웅, 단군을 모신 삼성사에 역대왕들이 사람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숭령전(崇靈殿) 즉 한웅할아버지를
모시는 곳에도 역시 제사를 지냈고 참성단에서도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이 고려와 다른 점 중 두드러진 것은 세조(世祖)5년 경진년에 왕자를
거느리고 서순치제(西巡致祭)하였다는 기록이다. 이는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러나 세조5년 숭령전에 세조가 직접제사를 지냈지만 바로
2년전인 세조3년에 팔도관찰사에 명하여 단군이래의 모든 사서와 자료를 불태워버리는 일대폭거를 감행한바있다.)
어쨌든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으되 고려의 왕들이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낸 전통이 조선에 와서 국교가 유교가 되었음에도 변치 않고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국교(國敎)가 불교이든 유교이든 변함없이 한인, 한웅, 단군이래의 전통이 국가의 최고지도자들에 의해 잊혀지지 않았음을 말해주는것이다.
특히 조선에는 고려의 왕검교 이래 특별한 종교단체가 있었다는 흔적이 없음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이러한 사실이 있었음은 놀라운 것이다.
2-3 구한말
구한말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인 오적(五敵)을 총살시키려 시도했던 나철(羅哲)선생과 이기(李汽)선생은 우리 배달정신의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나철 선생은 단군을 국조로하는 종교인 대종교를 일으킨 인물이며, 이기 선생은 제1대 단학회(檀學會)회장으로서 제2대 단학회 회장인 계연수 선생에게
그 유명한 “한단고기”를 전수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내내 존재조차 드러내지 못했던 배달정신이 나라가 망했을 때 그 지도자 두 분이 직접 매국노를 총살코져
시도했음은 참으로 많을 것을 시사한다.
2-4 일제강점기
동양의 역사에 항상 결정적인 변수였고 항상 소수로 다수를 지배하던 단군민족들에게 있어서 만주 땅은 그야말로 어머니의 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군조선은 물론 고구려, 대진국(발해), 요, 금, 청등이 모두 만주에서 일어났다. 대체로 만주를 지배한 단군민족은 그 영향력을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우리 배달민족 역사상 유래가 없는 최악의 시련기인 일제강점기에 바로 이 만주 땅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총칼을 들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흘연히
출현한 일단의 무사집단들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분들은 만주의 주인이었던 고구려의 무사들처럼 단군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이는 배달민족의 장대한 역사를 통해서도 드물게 감동적이며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이끌었던 윤세복 선생,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소속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재였던 서일(徐一)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군들이 그분들이다. 이분들은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과거 단군조선과 고구려와 대진국(발해)의 무사들의 터전인 만주일대를 종횡무진하며
당시 동양전체를 떨게 하며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무력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청산리전투 등에서 기적과 같은 전과를 기록하였다.
비록 안타깝게도 무력으로 조선을 광복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그 떳떳하고 웅장한 기재만은 과거 수나라의 수양제의 대군을 여지없이 격파하고 당나라의
당태종의 대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던 고구려의 장병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전해지는 십수권의 배달경전중의 한권인 구서(九誓)에는
배달민족의 무사(武士)들의 계율이 전해진다. 즉 “나라가 없이 내가 존재하느니, 나라가 있으면서 내가 죽겠다.”는 내용이다. 바로 이 전통이 우리 배달민족 모두의
혈관을 통해 여전히 전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배달정신을 아무리 불태우고 또 숨기려고 두텁게 덮는다 해도 반드시 그 향기가 반드시 새어나온다는 단군팔조교의 제8조의 내용 역시 현실에서 이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또 아무리 오랫동안 핍박받고 서러움을 겪어도 민족이 위급할 때면 가장 먼저 총칼을 쥐고 기꺼이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들이 바로
배달전신의 소유자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사실은 아무리 오랫동안 배달정신이 발치 되었다 해도 까마득한 오래전 시작했던 모습에서 전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 배달민족이 가장 수난을 당하던
시절에 고귀한 피로서 증명되었다.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이 사실들이 마치 전설처럼 잊혀져 가고 있는 듯해도 배달민족이 계속되는 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이며 또 잊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2]신라이후 신교의 인물들
․고려에서는 이 규보(李奎報)선생이 그리고 신라에는 영랑(永郞)과 최 치원선생이 일반에게서 잘 알려진 신교(神敎)의 인물이었다.
․조선의김시습,홍유손,정붕,정수곤,정희량,남추,서경덕,정렴,정작,정초,전우치,윤군평,남사고,박지화,이지함,유형진,장한웅,곽재우등이 신파(神派)의 내려오는
법만을 전하므로 사람들이 혹 선교(仙敎)로 오해하고 단군(檀君)이 세운 종교인 것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고했다.
위의 인물들이 당시에 선교(仙敎) 즉 도교(道敎)의 인물로 알려지고 단군께서 세우신 신교(神敎)의 인물인지를 아는 자 드물었다는 것은, 당시에는 단군께서 세우신
신교를 내놓고 알릴 수 없었음을 말한다. 위의 인물들 중에서 전설적인 야담(野談)을 남기고 있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있음은 우리민족의 현묘지도가 비록 고려와
조선에서 국가적으로는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해도 조정에서도 은밀한 방법으로 제사를 지냈었고 특히, 민간에서는 호응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컸음을 설명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조에도 폭넓게 신교(神敎)가 전해졌지만 그것이 한인, 한웅, 단군이래의 종교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전해졌음
을 알 수 있고 그 인물들이 의외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곽재우 장군과 같이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ㅣ모두 도망간 때 의병을 일으켜 전설같은 전공을
올린 인물이 바로 신교의 인물이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단연한 현상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전통이 만주 독립군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물들에 의하여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단군팔조 등이 전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기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실은 신라이후 조선까지를 살펴볼 때 신라이후 우리의 민족종교와 그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단군팔조 등은
음지에서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왔지만 오히려 주변의 요, 금, 청, 일본 등이 배달민족의 한 갈래로서 그 전통을 지켜왔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단 이들에게 경전이 전해졌는지는 확인이 되지않는다) 그리고 과거 이들 나라를 오랑케라고 불러왔던 신라이후의 과거사가 결코 배달민족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자신과 주변 민족을 관찰 한 것이 아니라 한족(漢族)의 객체라는 관점에서 주변 민족과 우리 자신을 관찰한 것이라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 기막힌 것은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보면 오랑케 한족(漢族)이며 나머지 주변 민족은 어디까지나 한 핏줄에서 분파해나간 형제국인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도 모르고 주변 민족도 정확히 인식 못한 것이 우리와 주변국들이 갈등을 일으켰던 요인중 하나가 아니었다 생각된다.
또 현재의 관점에서 관찰해 볼 때 요와 금과 청등을 일으켜 강력한 제국을 세워 대륙을 호령하던 배달민족의 분파 세력들은 이미 그 민족자체가 공중분해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당연히 그들에게서 배달민족의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을 찾을 수 도 없다,
이들 단군민족다움을 잃었을 때, 그 민족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웃의 일본도 배달민족의 한 분파로서 그들의 신앙의 뿌리가 한웅도(桓雄道)로서 지금도 한웅상을 모시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주경전(主經典)인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이 존속하지는 않고 있다.
즉 그들은 주경전이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극히 일부 특수계급에서 비밀리에 전승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일본의 일반대중이 그들의 진정한 뿌리를 아는 것은 그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미래를 위하여 중요하다.
양국민의 의식에 진정한 상호협력을 이루어야겠다는 바탕은 오직 그들과 우리가 한 뿌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 후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동북아시아와 멀리는 우라시아대륙 전체를 호령했던 여러 배달민족의 후손들 중에서 아직까지 고유한 민족형태를 지니고 동시에 한인, 한웅, 단군이래의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민족은 우리 민족만이 남아있다. 문자 그대로 기라성 같았던 동북아의 여러 민족 중 오직 우리 뿐 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만이 남았다는 것은 한인, 한웅, 단군의 후예인 여러 민족들에게 다시 그들의 근본을 가르쳐 주고 되찾아 주어야 할 의무 또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 역시 그들의 생활 속에 베어있는 여러 관습에서 한인, 한웅, 단군이래의 가르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근본을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단군팔조 등
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도와줄 민족은 우리민족뿐인 것이다.
[3]현재 전해지는 366사(三百六十六事)의 경로
본 경전은 현재 종교계와 민간단체 등을 통하여 전래되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단군교, 대종교 등에서 전래되며 단군교에서는 단군예절팔리훈, 성경팔리, 상하, 8리훈등
으로 전하며 또는 치화경(治化經)이라고도 하며, 민간단체중 단단학회(檀檀學會)에서는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는 이름으로 전하며 대종교에서는 참전계경이라는 제목
과 팔리훈이라는 부제목을 함께 쓰고있다. (1)단군예절 교훈 팔리삼백육십육사(단군예절 교훈 팔리 삼백육십육사). 책 안에는 따로‘성경팔리 상하(聖經八理上下)’라
는 제목이 있다.
■이 책의 이름은 필자가 참고로 한 본 경전의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름이 대단히 긴 관계로 추후 이 책을 인용할때는 편의상 책안에 따로 적혀 있는 이름인
[성경팔리(聖經八理)]로 한다. 이책은 1965년 공주의 박노철(朴魯哲)님이 발간하였다한다.
(2) 팔리훈(八理訓)
대종교의 대종교요감에는 참전계경이라는 제목하에 팔리훈(八理訓)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3) 참전계경(參佺戒經)
1972년 단단학회(檀檀學會)의 [이 유립]님이 참전계경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커발한 개천각에서 펴낸 [커발한 문화사상사二]등에 실려있다.
(4) 치화경(治化經)
배달문화연구원 발간[倍達全書]에 포함
배달전서에는 천부경을 조화경, 삼일신고를 교화경으로 하여 실려 있고 역사편 등에 실려 있다. 본 경전은 치화경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추후 배달전서내의 치화경
을 인용할 때는 개천경과 구별을 하기 위하여 [倍達全書]로 한다.
(5)치화경(治化經)
[개천경(開天經)] [*송호수 교수역]에는 본 경전이외에도 천부경을 조화경, 삼일신고를 교화경으로 하여 실려 있고, 본경전의 제목은 [치화경]이라는 제목이외에
따로 [참전계경]이 사용 되어 있다. 추후 개천경내의 치화경을 인용할 때는 배달전서와 구별을 위하여 [개천경]으로 한다.
[4]현존하는 366사(事)들의 상호간 차이점
필자는 이 서로 다른 책들을 참고로 하면서 특히 한문으로 된 원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관찰 결과 한문으로 된 원문이 모두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성 자체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의 을파소 선생 이래 현재까지 오랜 세월동안 방대한 경전을 손으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어쩔 수 없는 오류가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혹은 개인적인 주관을 원문에 섞어 놓은 것도 발견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도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보편적으로 읽히기 위한 내용으로 파악된다. 즉 성경팔리의
내용에서 철(哲)을 군자(君子)로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유교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읽히기 위한 방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추후
이 경전을 연구하려는 분들을 위해, 그리고 보다 힘 덜 들이고 폭넓게 연구되기를 위해 필자가 무엇을 어떻게 정리했다는 구체적인 근거를 밝혀놓았다.
즉 한문으로 된 원문을 정리하면서 서로 다른 내용이 나타날 때마다 그 차이점을 비교검토하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모든 과정을 ■비교검토■란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제목과 문장이 크게 달라 비교검토가 불가능 할 때는 각기 다른 제목과 문장을 모두 실었다.
따라서 여러 이본간의 차이점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따로 이본들을 구하여 비교검토하는데 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검토■란을 만든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본 경전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수정을 거듭하여 원본에 가까운 내용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명제이
며 필자로서는 그 큰 작업에 부분이 되기만해도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聖經)
성경(聖經)이 무엇인가를 현대 한국인에게 물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BIBLE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배달국 이래 전해진 본경전이 성경이라고 널리 불리웠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한국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제3편 을파소(乙巴素)선생.
본 경전을 다시 편찬하여 고구려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고구려를 고구려답게 만들어 기나긴 세월동안 동북아의 거인으로 만든 장본인인 을파소 선생은 우리민족의
정치가 중 으뜸으로 꼽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분에 대한 기록을 살펴봄으로서 본 경전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자.
1. 을파소 선생에 대한 기록들
[1]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고국천왕(故國天王)이 안유(安留)를 써서 국정을 맡기려 하니 안유가 자신의 재능은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 하고, 서압록곡(西鴨綠谷)의 처사(處士) 을파소(乙巴素)
를 천거하였다. 을파소는 유류왕(儒留王->유리명제를 말함)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인데,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에 밝고,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고
학식이 넉넉하였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草野)에서 밭갈며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
서 대접하고,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삼아“일치”의 작위을 더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을파소는 자기가 받은 벼슬과 작위가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다른 어질고 유능한 이를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큰 사업을 성취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를 “신가”를 삼아서 모든 관리의 위에 있어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을파소가 한미(寒微)한 처사로서, 하루아침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비난이 자자하니 왕이 조서를 내펴 “만일 신가의 명령을 어기는 자
있으면 일족을 멸할것이다”하고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을파소는 자기를 알아주고 크게 대우해주는데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처리하였다.
상 과 벌을 신중히 하고 정령(政令)을 밝혀 나라 안이 크게 다스려져 고구려 구백년간 첫째가는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2]한단고기의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세상에 전한 것은 을파소 선생에 의해서라고 한다. 선생은 일찍이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天書)를 얻으니 이를
참전계경이라 했다.”
위의 내용에서 을파소 선생이 하늘에 기도하고 얻은 천서(天書)가 바로 역사서에 기록된 366사를 말하는 것이며, 이를 참전계경이라고 태백일사에서 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에서 을파소 선생이 백운산에서 기도하고 천서를 얻었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백운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하늘에서 천서가 느닷없이
뚝 떨어진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이 기록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신라의 최 치원 선생이 옛 비석에서 전서(篆書)로 새겨진 천부경을 한문으로 옮겨 첩으로 전한 것과 같은 유형으
로 을파소 선생이 부여나 단군 조선의 글자로 전해진 366사를 한문으로 옮긴 것을 말하고 있거나 둘째로 그 장소가 백운산으로서 백운산에 보관된 본 경전을 발견하였다
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어느 경우이던 을파소 선생이 이 경전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볼 수 는 없는 것이다.
을파소 선생이 백운산에서 기도하고 천서를 얻었다는 말은 경전을 얻기까지의 과정에서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는 내용과 한문으로의 번역과정에서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는 내용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2. 참전의 계(參佺의 戒)
한단고기에서 본 경전을 참전계경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종(宗)과 전(佺)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1)삼성기 하편에 인용된 밀기(密記)
“밀기에 이르기를 한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三神)으로서 전계(佺戒)를 써서 가르침을 베풀고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키니 선(善)을 권하고 악(惡)을 벌주는 법이 있게 되었다.” 위의 내용에서 “삼신으로서 전계를 써서 가르침을 베풀고”(三神設敎以佺戒)는 다른 기록에
서 말하는“한웅께서 인간의 366사를 주재 하셨다.”는 내용과 일치하는 바 가 있다. 즉 “밀기(密記)”에서 설명하는 전계(佺戒)는 곧 366사이며 또한 참전계경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인용된 대변경(大辯經)
대변경에서 말하기를 “신시 씨는 전(佺)으로 계(戒)를 닦고 사람을 교화하고 하늘에 제사지냈다.”고했다. 대변경에서 설명하는 신시 씨 즉 한웅천제께서 베푸신
전계(佺戒) 역시 다른 기록에서 말하는 “한웅께서 인간의 366사를 주재하셨다.”는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설명하는 내용 역시 밀기(密記)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전계(佺戒)는 곧 366사이며 참전계경 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3) 단군세개의 종(倧)과 전(佺)
“조정(朝庭)에는 종훈(宗訓)이 있고 백성에게는 전계(佺戒)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종훈(宗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같은 경전이며 전계(佺戒)은 366사와
단군팔조교, 삼륜구등의 경전임을 생각해 낼 수 있다.
(4) 참전(參佺)의 계(戒)
참전의 계란 본경전 366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수천년간 전해지는 대부분의 경전도 참전의 계라고할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여러 참전의 계중에서 366사를 대표적인 위치에 설정하여 경(經)이라 하여 참전계경이라고 말한다는 것에는 타당성이 분명히 있다.
그만큼 본 경전이 차지하는 위치가 크기 때문이다.
1)어아가(於阿歌)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에 의하면 2세단군 부루님께서 어아가(어아가)를 만들어 조상에 대하여 감사했으며 신인(神人-어아가의 내용으로 보아 배달국의 한웅천제로 보임)
이 사방을 화합하던 식을 올리니 이것이 “참전의 계”가 되었다고 했다.
2)다물흥방가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을밀선인이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연습하며 삼신(三神)을 노래하며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조의 3000명으로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사람이 모여 다물흥방가를 불렀다.
을밀선인은 일찍이 대(臺)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고 대개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을 계”로 삼아 굳세고 영광되게 하였다고 했다.
[참전계경, 최동환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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