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스님의 치유적 불교읽기] 5. 고성제 ②
고제 핵심은 고통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
깨달음으로 가는 계기 삼아 당당히 맞서야
지난 호에서 우리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이 바로 고통을 알아차리는 일임을 알았다. 고통을 알아차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 몸에 대한 자각훈련이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아프다고 표현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마음은 마음자체로 아픔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자신의 아픔을 몸으로 드러낸다. 그것이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이유다. 그런데 마음은 약하다. 자신의 아픔을 몸에 떠넘기고, 몸이 아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두려워서 몸으로부터 도망을 가버린다. 그러면 몸은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마음에게 알리면서 마음이 뭔가 조치를 취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면 마음은 불안해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몸의 호소를 무시하고 더욱 더 멀리 도망을 가버린다. 도망의 끝자락에는 정신병, 자살, 살인이 있고 그 중간에 불안, 우울, 공포 등 무수한 종류의 심리적 증상들이 있다.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극단에는 살인이 있고 스스로를 탓하는 극단에는 자살이 있다.
마음이 아플 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의 반응을 주시하면 거기서 우리는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반응은 마음의 병의 정도에 따라서 심장이 막히고 죄여오는 고통일수도 있고, 살갗이 아프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호흡이 불규칙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가벼운 두통정도 일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유를 잃은 마음이 몸의 그러한 상태를 알아차려도 기꺼이 돌보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도망가고 싶어 한다. 마음은 여전히 변명할 구실을 찾게 된다. 사실 그러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전을 배우고 법문을 듣고 여러 가지 불공의식과 봉사활동, 절 수행, 명상 등의 수단을 통해서 마음을 정화시키려고 애쓴다.
‘능엄경’에서 부처님과 아난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마음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생멸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마음의 작용을 몸을 통해서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몸은 마음의 고통을 알아차릴 수 있는 홈그라운드다. 마음의 고통은 반드시 몸의 고통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통하는 순간, 몸의 반응을 자각하게 되면 거기서 우리는 마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고통하는 마음의 모양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아파하는 몸을 통해서 그 마음의 모양을 바꾸고, 치유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우리가 사성제의 고제를 “삶은 괴로움이다”고 했을 때 그것을 듣고 단번에 “맞아” 하고 삶의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연민심을 일으키고 문득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삶이 왜 괴로움이냐, 감사함이다”, “삶은 선물이다”, “삶은 가치의 실현이다” 등등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고제는 자칫 개념적 논쟁에 휘말리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성제는 무용지물일수도 있다.
고제의 핵심은 고통의 순간에 고통의 존재를 알아차리는데 있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들이 삶의 귀중한 뭔가를 망각하고 있을 때, 그것을 상기시켜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또한 우리들이 삶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항상 그릇된 길의 길목에 서서 우리를 지켜주고 정신세계를 한층 더 증장시키는데 필요한 절대적 요소다. 그래서 고통을 성스러운 진리의 길이라 명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통을 통해서 기쁨, 깨달음을 발견해가는 길이기에 성스러운 길인지도 모른다. 고통을 피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는 길은 없다. 고통을 마주보고 고통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성장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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