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화사회·복지

[스크랩] [ESSAY] `지공 도사(지하철 공짜세대)`의 각오

장백산-1 2011. 3. 18. 12:56

 

[ESSAY] '지공 도사(지하철 공짜세대)'의 각오

조선일보 : 안병준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입력 : 2011.03.16 00:51

 

 

안병준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어르신 교통카드' 받은 날 아들은 축하 인사 건네는데
천안 가서 순댓국 먹고 덕수궁 무료 입장도 하루이틀이지
눈높이 낮춰 낙엽의 자세로 내가 섬길 수 있는 일 찾아야겠다"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았다. 새봄이 오는 길목 만 65세가 되는 날에. 흔히들 말하는 '지공 도사'(지하철 공짜 세대)가 된 것이다. 이 카드는 인생의 가을 또는 초겨울에 제2의 인생을 깔끔하게 잘 마무리해 보라는 배려일 터이다. 카드를 받으러 가는 날 아침, 작은아들 녀석은 "아버지 축하해요!"라고 말했다. 서글픈 느낌이 들 법했지만, 발걸음이 경쾌했다.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카드를 받고 주민자치센터 문을 나서는데 1000원 자동 구두닦이 기계가 눈에 띄었다. 구세군 희망나누미 센터에서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오른발과 왼발을 차례로 집어넣었다. 소요시간 3분. 구두의 낯짝이 제법 반들반들하다. 기계에서 미리 녹음된 처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서울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 입찰구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카드를 대었다. 잔고가 없는 카드인데 거절당하면 어찌할거나 걱정하는데 "삐~삐~"하며 소리가 두 번 났다. 숫자는 0이 찍혔다. 허벅지로 밀었더니 문이 열린다. "와! 통과다!"

시청역에 내려 다시 카드를 대었다. 현금카드를 쓸 때는 "삐~"하며 소리가 한번 났는데 이 카드는 소리가 두 번 난다. 숫자는 또 0이 찍혔다. 성공이다. 드디어 900원 또는 그 이상의 전철 공짜인생이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지고, 본의 아니게 이기적이 되고, 세대 간 갈등의 골도 깊어진다. 그래서 지난날 우리 사회의 주인공이었던 어르신들을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소설가 박완서는 이승을 떠나기 얼마 전, "이제는 편안하고 심심하게 살고 싶다. 늙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을까. 나도 이제 그 반열에 들어섰다.

선배 지공 도사들은 "천안 가서 순댓국 먹고 온천하고, 춘천도 가서 닭갈비 먹고 맘껏 쏘다녀 보라"고 말한다. 또 서울대공원은 산책로가 으뜸인데 무료입장이고, 덕수궁·경복궁·창경궁·비원·종묘·국공립박물관·국공립공원·국공립미술관도 같다고 일러준다. 서울시의 '어르신 콘서트 사업'으로 국악관현악단·무용단·합창단·오페라단·뮤지컬단·극단은 공연 전에 본 공연과 똑같이 총연습하는 드레스 리허설을 무료 관람할 수 있다는 고급정보도 흘려준다. 종로의 '허리우드클래식시네마', 서대문 로터리의 '청춘극장', 프로야구, 성북동 길상사의 실버 갤러리인 '고운님 갤러리' 등은 할인혜택이 제법이라고 귀띔해준다.

여행과 구경 그리고 식도락…. 모두 좋은 일들이다. 그러나 비생산적이다. 또한 한시적이다. 죽을 때까지 늘상 그렇게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제2의 인생을 엮을 것인가. '해현경장(解弦更張)'. 거문고의 느슨해진 줄을 어떻게 다시 단단하게 조일 것인가.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으나 /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 사람들아 /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 흐른다 (도종환의 '강').

그렇다. 시인이 노래한 대로 낮은 곳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아프고 영화롭던 세월은 망각의 강 너머로 떠나가고 있으므로. 이제 등골 휘게 열심히 했던 일들도 지워지고, 열렬하게 받았던 박수도 지워지고, 눈물도 웃음도 나 자신도 지워져 가고 있다. 한때 우리는 도도한 여울이었으나, 이제는 실개천으로 세상을 향해 조용히 속삭이면 될 일이다.

찾아보면 눈높이를 낮춰서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종교를 가진 분들은 크고 작은 봉사를 하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65년 이상을 쌓아왔던 경험과 지혜를 세상에 되돌려주는 자질구레한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낙엽의 자세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유서를 써 놓아야겠다. 오랫동안 중단했던 일기도 자주 써야겠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의 경륜을 더욱 넓게 배우기 위해 매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 한다(手不釋卷·수불석권).

시인 정호승은 자신의 시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를 풀이하면서 낙엽의 숭엄한 모성(母性)을 일깨워 준다. '해우소에 재래식 측간 냄새가 난다면 그게 어디 해우소이겠는가. 해우소가 해우소다우려면 외양의 아름다움보다는 무엇보다 인분 냄새가 나지 않아야 한다. 올가을 선암사 낙엽들은 또다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우소에 던져 스스로 서서히 썩어갈 것이다.'

그렇다. 시인 천상병이 시 '귀천(歸天)'에서 노래한 것처럼 이승은 즐거운 소풍이다. 이 화려한 봄날 내 마음은 더욱 분주해지고 있다. 나는 지금 제2의 소풍을 시작하고 있다.
출처 : 생활 · 운동 자연치유 연구소
글쓴이 : 이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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