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대통령 김두관

김두관 누나 김길자씨

장백산-1 2012. 7. 1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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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관 누나 김길자씨

“아이고 뭣하러 왔어, 난 정치도 모르고 평생 생선만 팔았어”

“혹시….” 생오징어를 정리하던 김길자씨(68)가 얼굴을 돌렸다. “예. 누구신지?” “경향신문 기자입니다. 김두관 지사 큰누님 맞으시죠. 여기서 40년째 생선가게를 한다고 해서….”

김씨는 좌판대로 얼굴을 돌렸고, 오징어를 만졌다. “아이고 뭣하러. 내가 뭐 아는 게 없어서. 평생 생선만 팔았고 정치도 모르고, 그냥 맘으로만 동생을 응원하는 사람이에요.”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는 서울 말투였다. 잠시 후 손을 닦으면서 허리를 펴는데 분홍색 앞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앉으세요. 동생이 책에다 그리 써놨던데. 여기서 장사한 지 40년째 맞아요. 저 책 봤어요?”

돌아가는 선풍기 옆에 김 전 지사의 자서전 <아래에서부터>가 보였다. 지난달 12일 김 전 지사의 첫 출판기념회를 보러 창원에 갔다온 뒤에 사서 보는 책이라고 했다. 돋보기를 오래 쓰는 게 불편해서 보다말다 하다보니 아직도 다 못봤다고 했다.

김두관 전 경남지사의 큰누나인 김길자씨가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시장에서 40년째 하고 있는 생선가게 좌판대 옆에 앉아 있다. 대림시장은 8월까지 문을 열고 재개발된다. | 박민규 기자


▲ 21살 때 시집 가며 고향 떠나
서울 오니 뭘 하긴 해야겠는데
남해서 자랐으니 생선 좌판 폈지요

▲ 두관이, 두수, 두 동생 보면
회사나 다니고 했으면 싶기도 해요
남자가 정치 하면 아내가 힘들어


“21살 때 고향 마을을 떠났어요. 옛날엔 다 그랬어요. 초등학교 나와서 농사짓고 밥짓고 하다가 일찍 시집간 거죠. 서울에 와서 뭘 하긴 해야겠는데, 고향이 남해 바닷가이고 보고 자란 게 생선 아니겠어요. 기회가 생겨 시장에서 좌판을 해봤는데 그 길로 놓지 못했어요.”

하늘이 잔뜩 찌푸렸던 지난 10일 오후 4시. 예고없이 불쑥 찾아간 서울 영등포구 대림시장에서 김씨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4평 남짓 될까. 한쪽에 ‘남해생선’이라고 작은 입간판이 서 있는 좌판에는 예닐곱가지 생선이 보였다. 오징어·동태·자반용 고등어·삼치·조기·조개…. 김씨는 “여기는 고급 생선은 없고 그런 고객도 없어요. 그런 것은 백화점이나 저 옆에 큰 마트 가야 있지. 여기는 서민들 동네가 돼서”라고 말했다. 생선은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아침에 물건을 떼서 용달차로 재래시장을 돌며 갖다주는 사람에게 받는다고 했다. 과거엔 남편이 도와줬는데 지금은 김씨가 물건을 받는다고 했다.

“장사는 어떠세요?”

“보는 것처럼 손님이 없어요. 하루 20명이나 되나. 올해는 더 그렇네요.”

“하루 5만원 벌이는 돼요?”

“참 무슨 말을…. 그리 안돼요. 전에 추울 때는 하루 5만원 수입이 된 적도 있고 그랬는데 여름엔 적자예요. 시장 가게들도 다 떠나고 있고요.”

김씨는 시장도 8월31일까지만 연다고 했다. 시장 터를 큰 병원에서 샀고, 지금까지 작은 가게들은 월 20만원, 큰 곳은 30만원 정도 세를 내며 살았는데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휑하게 빈 공간이 많았다. 김씨는 “대림사거리 옆이라 시장 터는 좋다. 많을 때는 상인들이 150명까지 있었지만 거의 떠나고 지금은 25명 정도 남았다. 큰 마트들이 많이 생기면서 벌이가 더 어려워졌다”며 “매달 첫째, 셋째 월요일만 쉬었는데 지금은 나갈 때까지 맘대로 하게 두고 있다. 다들 없이 사는데 생활터전을 떠나는 거라 맘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김씨는 오전 9시에 시장에 나와 좌판을 열고 오후 8시30분에 닫는다고 했다. 점심과 저녁 식사는 아는 시장 사람 몇몇이 뭘 싸오기도 하고, 밥을 해서 먹기도 한다고 했다.

좌판 그만두면 뭘 할지 물었다. “당장 할 게 없어요. 놀아야죠. 아들은 나이도 있고 다른 것 하지 말라는데…. 글쎄요, 어떻게 해야할지.”

자녀를 물었다. 김씨는 “딸-아들-딸”이라며 “큰딸은 시집갔고, 중간의 아들은 외국계 종묘회사에 다니고, 막내딸은 LG카드 다니다 결혼해서 남편 따라 미국에 있다”고 말했다.

“가게 하면서 아들딸 다 키워서 보람있겠어요.”

“특별히 해준 것도 없고 어떻게들 다 알아서 자리는 잡고 살아서 나는 고맙죠.”

수첩에 몇가지 적다가 “김 지사와 전화는 가끔 하세요?” 묻는데 답이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좌판 뒤 한쪽 구석에 있는 TV를 보고 있었다. 김 전 지사가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케이블TV에 나오고 있었다. 낡고 색도 선명치 않은 12인치 컬러TV였다.

“동생 얘기 나오면 재밌죠?”

“재밌기보다 걱정되죠. 누구에게 꼬투리 잡힐까봐서요. 막내(김두수 전 민주당 제2사무총장)도 그렇고 큰누나 입장에선 다들 회사 다니고 그랬으면 싶기도 해요. 배경도 없이 커서 정치한다는 게 힘들고, 남들이 뭐라 하나 맘 졸이게 되고, 정치라는 게 인기로 해야 되니까 힘들죠.”

김 지사가 화면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선 고정이었다. “두관이 동생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정치였어요. 본인도 그리 말해요.”

“아, 음료수도 없고. 아까 누가 주고 갔는데 커피 마실래요?” 김씨가 물어 그러겠다고 하니, “여기는 냉장고도 없어요”라며 생수병에 담긴 커피를 컵에 따라줬다. 냉동생선 사이에 둬서 그런지 시원한 맛이 남아 있었다.

“사실 두관이 동생과는 평소에 전화도 안 해요. 올케하고만 전화 몇 번 했어요. 입고 있는 이 옷도 올봄에 올케가 ‘아는 사람 가게 정리하는 곳에서 샀다’며 보내줬어요. 남자가 정치를 하면 안사람이 힘들어요. 두관이 동생이 재산도 없고 돈에 대한 개념도 없고 올케가 고생 많이 했어요.”

“동생이 행정자치부 장관 할 때 서울에 있었을 텐데 많이 못봤습니까?”

“예. 그때도 별로 못봤어요. 얼마 하지도 못했잖아요. (장관은 6개월29일 했다) 힘들게 한 자리였는데 펴보지도 못하고… 안쓰러웠어요. 내가 볼 때는 제 잘못보다도 핑계 만들어서 (해임)한 거였지 싶어요.”

“김 지사의 책에 큰형이 서독 광부로 가는 것을 배웅하러 서울 대림동 누나집에 갔다가 장학퀴즈에 나간 얘기가 나오던데요.”

“맞아요.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방학 때였지 싶어요. MBC방송국 견학하러 갔다가 학교장 추천서도 없고, 현장에서 출연자를 한 명 뽑는데 됐나봐요. 차인태씨가 하던 거 있잖아요. 차점자가 돼서 기뻐했죠. 아마 나중에 차점자끼리 또 붙었을 때는 점수가 처음보다 안 좋았지 싶어요.”

 

 

▲ 사람들이 서민 서민하는데
겪어보고 당해봐야 아는 거요
서민이 자랑은 아니지만

▲ 두관이 동생이 잘될지 어떨지
다들 잘살고 싶은 맘일 텐데
한 사람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김 전 지사의 어릴 때 기억이 나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 “두관이 동생이 58년 개띠예요. 남자형제가 많은데 할아버지가 호적엔 다음해에 올렸어요. 동생이 초등학교 때(4학년) 아버지가 죽고 집이 어려워져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벼농사, 보리농사 짓고 여름에 참외도 했는데, 땅 넓은 사람들이야 먹고 남아 바꿀 것도 있었지만 우리는 식구들 먹을 것도 빠듯했어요.”

옛 생각을 하는지 말을 멈춘 김씨는 잠시 뒤 “다 늙은 노인네가 뭐 아나요. 동생이 진보성향이라고 하고, 옛날에 청주에서 뭐 집회를 하다가 잡혀서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어머니와 한 번 가봤어요. 전부 하얀옷 입고 있던 기억이 난다”며 “두관이 동생이 (남해)군수 때도 관사는 주차장 만들고 1㎞ 떨어진 집에서 다녔어요. 그런 건 동생이 특별났지 싶어요. 어려서부터 상대방을 잘 받아주는 성격이고 정의감이 있어 물길을 거슬러가는 것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다른 동생들은 어떻게 사는지 물었다.

“다들 능력이 안돼 먹고살기 바빠요. 얼굴 보기도 힘들죠. 나도 가게 때문에 부모 기일 때도 남해에 많이 못갔어요. 지난번 두관이 동생 창원 출판기념회 때 모처럼 다 와서 얼굴 봤어요. 요즘엔 그나마 두관이 동생은 TV에 자주 나오니까 옆에 있는 거 같죠.”

김씨는 “밑에 남동생(65)은 독일에 광부로 10년 넘게 갔다가 목사 하다가 이젠 나이도 들어서 폐지나 고물을 모아 파는 업체를 한다”고 말했다.

“김 지사가 쓴 책에는 짧게 ‘사회적 기업’으로 써 있던데요.”

“별로 돈 안되는 거예요. 그 동생도 고생 많았어요. 독일 가기 전에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강원도 탄광에서 2년 일하고 독일 가서 광부를 하면서 공부도 하려 했는데 계획대로 안됐대요. 언젠가 두관이 동생이 강원도 탄광 가서 산소호흡기 쓰고 지하 갱까지 갔다 나오는 게 TV에서 나오길래 거기서 형 생각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씨는 “둘째 동생은 올해 회갑인데 회사 경비 일하다 얼마 전 그만두고 뭘 찾고 있다고 들었다”며 “셋째는 중동 건설현장에 막노동으로 갔다 와서 조그만 회사를 다닌다. 중동에서 막내(김두수) 학비를 부쳐줬다”고 덧붙였다.

“대학 간 것은 두관(경북전문대-동아대 편입)이와 두수(고려대 행정학과) 둘이에요. 큰동생은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대학 꿈을 접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초등학교·중학교가 최종 학력이었다.

“동생이 장관도 하고 지사도 했는데 덕본 거는 없었어요?”

“더러 사람들도 그런 농담을 해요. 지금까지 다들 알아서 살았고 서로 처지 다 아는데 뭐 줄 게 있어야죠. 두관이 동생도 선거 나가서 많이 떨어지고 힘들 때 나는 뭐 해준 게 없어서 미안했어요. 맘으로 응원할 밖에요. 그제 해남에서 출마선언할 때도 가게 때문에 못갔어요. 다들 나이 먹어서 동생이 잘되더라도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던 그 맘대로들 살 거요.”

김씨는 “형제들 간 다툼은 없다. 뭐 있으면 내가 맏이니까 들릴 텐데 다 그렇게 조용하게 자기 일 하면서 누구 원망할 것도 없고 주어진 대로 평범하게 살았다”고 덧붙였다.

TV에서 ‘김두관’이 들렸다. 대선을 주제로 좌담을 하는 중이었다. “하루 종일 TV 켜놓고 있겠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배우진 못했어도 요즘 생각해보면 두관이 동생 한자 이름은 잘 지은 것 같아요. 벼슬 ‘관’이잖아요.”

“동생 얼굴 보고 있으면 어떠세요?”

“늘 말 하나가 잘못돼 문제될까봐 걱정이죠. 저(TV) 속에서도 좋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시장에서도 더러 누구는 ‘김두관이 안된다’ 하고 누구는 ‘희망이 있다’고 좋게 말하기도 하고. 아직 그런가 보다 해요.”

저녁 찬거리를 사러 손님들이 오는 것을 보니 오후 6시였다. 대화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한 사람은 생오징어 1마리를 다듬어달라고 하고, 나이 든 할머니는 동태 2마리와 생오징어를 사갔다. 3000원, 5000원을 주고받았다.

중간에 오징어를 사간 주부까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가게에 온 사람은 3명이었다.

TV 속 얘기가 ‘대선주자들의 서민 정책’으로 흘렀다. 의자로 돌아오던 김씨가 TV를 향해 한마디 했다. “사람들이 서민, 서민 하는데 겪어보고 당해봐야 서민을 아는 거요. 서민이 자랑은 아니지만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동생이 어떨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잘될지 어떨지 아직은 느낌이 없어요. 내 혼자 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잘살고 설움 없이 살고픈 맘일 텐데 누구 한 사람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닐 거고.”

김씨는 신문에 쓰는 거냐고 물었다. “도지사 누나가 40년째 좌판을 하는 얘기인데 그러려고 한다”고 하자 “내가 뭐 괜히 말 잘못한 거 없는지 모르겠다”며 이내 걱정하는 얼굴이 됐다.

“지나가면서 대통령 덕 볼 수 있다고 농담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늙어서 뭐 있겠어요. 만약에 된다면 나랏일이나 잘하고 잘못된 짓 하지 않고 깨끗이 좋게

물러났으면 해요. TV 봐요. 시끄럽고 추한 얘기 많잖아요. 뭐 해준 것도 없는

큰누이지만 딴 것 바라지 않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 되기만 바라죠. 그렇게 써주세요.”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모두 들어도 좋을 얘기였다.

<이기수 선임기자 kslee@kyunghyang.com>


입력 : 2012-07-13 21:49:04수정 : 2012-07-13 22: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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