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이야기 여섯 번째 - 다르마(法)란 무엇인가?
앞 호에서 마음에 관한 이야기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이번 호 부터는 그런 이론 체계를 이루게 된 근본이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모든 불교 사상의 체계는 연기법(緣起法)을 모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모르면 불교를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중아함경≫에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법이 바로 연기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사상체계를 전부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緣)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다.
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상응부경전≫ 12:21)
불교에서는 이것을 ‘연기의 공식’ 또는 ‘연기의 원리’라고 한다. 싯다르타는 이 공식을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모든 사상적 전개는 이 원리로부터 나왔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먼저 이 연기 사상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먼저 위에서 첫 번째 두 번째 구절을 보자. “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는 부분이다.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자기의 문제에 대해 대결하면서 “무슨 까닭에 늙고 죽음이 있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늙고 죽음이 있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했다. 이것은 존재의 발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말미암마(緣) 생긴다” 즉 모든 존재는 직접적인 원인(因)과 간접적인 연(緣)을 통해 발생한다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는 부분이다. 이는 명상을 통해 “무엇이 없는 까닭에 늙고 죽음이 없는가? 무엇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늙고 죽음이 멸하는 가?” 하는 문제를 해결한 부분이다. 이것은 존재의 소멸을 “말미암아 멸한다” 즉 모든 존재는 연기의 이치에 따라 멸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연기의 어원을 살펴보면 빨리어 ‘paṭiccasamuppāda' 는 ‘조건으로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뜻이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으로 홀연히 또는 우연히 또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의성(相依性 ) 또는 상관성(相關性) 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또한 이 연기의 공식을 뒤집어서 말해 보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리는 다는 것으로 독립, 영원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연기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파악하기란 그리 수월치 않다.
내가 체득한 이 법은 심히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고요하고 미묘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며, 깊고 깊어서 오직 지혜로운 이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을 좋아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연기 즉 모든 존재는 원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겼다는 이치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응부경전≫ 6:1)
위의 경문을 보면 연기설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이유는 심히 깊고 미묘하여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능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첫째 이유로 말한 사상이 매우 깊다는 것은 예전과 달리 우리들은 추상적인 사색이 매우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예전보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조금만 사색해 보아도 모든 것은 연기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체험이 아닌 생각만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필요로 한다.
둘째 이유로 말한 세상 사람들의 생활 태도부분이다. 우리들은 흔히 그 도리가 진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연기의 원리가 요구하는 실천이란 욕심을 떠나는 문제, 즉 고의 멸진을 실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욕망에 빠져 있을 때에는 아무리 연기의 도리를 설해 보았자 도저히 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부처님은 설법하기를 주저하기 까지 하셨다.
현대인들은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아니 고대인들보다 훨씬 더 욕망에 민감하고, 욕망 이외의 것은 알려고도 들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지녀서는 아무리 불교를 알려고 해도 결국 인연 없는 중생이 되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 없는 불교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연기의 원리로 본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이다. 다음의 경문을 보자.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이 사실은 내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바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 )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다.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기에 이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고, 나타내고, 분별하고, 명백히 하여, ‘너희는 마땅히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상응부경전≫ 12 : 20)
이 설명을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연기의 성격이다. 그것은 절대자가 창조한 것도, 계시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며, 더구나 부처님이 발명한 도리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예로부터 이제까지 엄연히 정해진 법칙이라는 것이다. 타 종교와 확연한 차이를 두고 있는 부분이고 후대 대승불교에서의 다불사상(多佛思想)과 모든 존재가 다 성불할 수 있다는 성불사상의 모태가 되는 가르침이다.
두 번째로 부처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은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오랜 된 길’의 비유와 같이 다만 그 오랜 된 길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람에게 전하고, 그 길을 정비하여 사람들을 가게 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는 불교가 오로지 믿음만을 강조하는 종교와 달리 수행과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며 모든 존재가 다 함께 행복의 길을 가게 하는데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 중요한 경문이다.
이제 까지의 설명으로도 연기의 원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 분이 있다면 다음의 경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을 듯 하다.
사리불이여, 그것은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겠는가? 친구여, 이를테면 여기에 갈대 단이 있다고 하자. 그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그것과 같이 이것이 있음으로써 그것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것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 단도 역시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없고 보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는 것이다.(≪상응부경전≫ 12 : 67)
모든 것은 어떤 조건이 모여 한때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조건이 바뀌는 데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가변성을 지닌다. 영원한 존재는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된다. 자신의 입장이나 집단의 입장만을 절대화해서 거기에 사물을 보려고 하면, 자기 편리한 대로밖에 볼 수 없다. 모든 것은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어떤 이론이나 견해를 절대화해서 보지 않는 것 이것이 다양한 사고와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기론적인 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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