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칙
세존에게 어떤 外道가 묻되 “말 있음을 묻지 않고 말 없음을 묻지 않습니다” 하니 세존께서 양구(良久)하셨다.
이에 외도가 찬탄하되 “세존께서 대자대비하시와 저의 迷惑의 구름을 열어주셔서 저로 하여금 깨달아 듣게
하셨나이다” 하고 물러났다. 외도가 떠난 다음에 아난이 묻되 “외도가 무엇을 증득하였기에 ‘깨달아 들었다’
하나이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世上의 좋은 말(馬)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것과 같으니라”
하셨다.
염 · 송 · 어
원오근(圓悟勤)이 송했다.
말 있음과 말 없음을 묻지 않고 말하기 전에 화살을 던졌네.
양쪽을 모두 다 윽박질러 막으니 한 자루의 칼이 하늘 가에 싸늘하네.
채찍 그림자가 움직이기 전에 마을과 고을을 지나니 자비의 문이 열린 뒤이매
가파른 길이지만 걸리는 것은 없네. 하늘을 덮는 콧구멍을 뚫어야 하겠으나
누가 바람을 쫓는 千里馬인가.
현각(玄覺)이 징(徵)했다. “어디가 세존이 채찍을 든 곳인가.”
설두현이 염했다. “邪와 正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채찍 그림자 때문이다.”
운문고(雲門?)가 말했다. “사(邪)와 정(正)의 둘로 갈린 것은 분명 채찍 그림자 때문이다.”
감상
달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손가락이 없다면 어떻게 달을 볼 것인가.
채찍 그림자를 보고 달리는 馬는 분명 千里馬일 것이다. 채찍을 맞아도 달리지 못하는 말(언어)이 있다. 채찍
을 들면 달리는 말이 있고,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말이 있다.
외도의 질문에 부처님은 침묵하셨다. 말 있음과 말 없음 사이에 양자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은 沈默 뿐이다.
말을 해도 안되고, 말을 안해도 안되니 어떻게 할 것인가. 禪家에서 이를 일러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다.
말 소리 以前의 世界 또는 말 소리 以前의 瞬間, 깨달음을 證得의 한 表現이다.
이 증득의 순간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 絶對性을 상실한다. 말로써 그 온전함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외도의 질문에 부처님은 채찍을 들지 않았다. 말 없음으로 채찍을 대신하니 외도는 그 순간 말 있음과 말
없음을 뛰어넘는 자비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沈默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區別하니, 말 없음 또한 말 있음과 전혀 다른
차원의 우뢰와 같은 가르침인 것이다. 부처님의 침묵은 채찍 그림자가 움직이기 以前이니 어찌 말 있음과
말 없음으로 是非 分別을 하리오.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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