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뭐라 규정할 수 없어

장백산-1 2015. 6. 28. 17:48

 

 

 

 

   22. 空  - (中)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뭐라 규정할 수 없어

2015년 06월 22일 (월) 16:37:15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소리를 들으면 시끄럽다고 分別해서 느낀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를 가르고 分別하는 명료하고 뚜렷한 基準은 없다.

 

 예전에는 ‘和音’이라고 불리는 소리, 즉 ‘音樂的 소리’와 和音 아닌 소리, 즉 非音樂的 소리가 음정

같은 槪念에 의해 명료하고 뚜렷하게 區別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초기 ‘현대음악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 Varèse)는 망치질 하는 소리나 사이렌소리도 음악적 소리로 사용하고, 소닉 유스(Sonic

Youth)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같은 록그룹은 한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음’

을 연주한다. 놀라운 것은 그런 소음을 사용한 노래에 大衆들이 대대적인 열광과 지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소음으로 가득 찬 소닉 유스의 ‘틴에이지 라이옷(Teenage Riot)’은 대단한 상업적 성공

을 거둔 곡이다.

 

그렇기에 이젠 音樂的 소리와 非音樂的 소리가 따로 分離되어 있다는 生覺은 세상을 모르는 소리가

되었다. 모든 소리가 音樂的 소리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는 소리

없는 沈默마저 音樂的 소리의 일부임을 보여주었다.

 

 

 

 


일상에서 듣는 모든 소리는 空氣의  波動이 만들어낸 것


因緣 따라서 악기소리도 되고  때론 소음이 될 수 있지만


소리의 本質은 空氣의 波動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소리가 아름답다고 할 순 없고, 모든 소리가 바로 音樂的 소리는 아니다. 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아름다운 소리를 여전히 區別하고 音樂的 소리 안에서도 좋은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마저

分別한다. 어떤 音樂的 소리가 아름다운 소리인가 아닌가는 하는 分別의 基準은 그 소리가 만나게 되는

緣起的 條件에 依해서 規定된다. 심지어 똑같은 소리도 어떤 때는 아름답게 들리고 어떤 때는 시끄럽게

들린다. 가령 힘들고 지친 이에겐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멋진 클래식音樂도 단지 시끄럽고 不便한 소리

지나지 않는다.

 

모든 소리가 音樂的 소리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波動 周波數의 소리도 音樂的 소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卽 모든 소리가 音樂的 소리가 될 潛在的인 性質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고, 音樂的 소리로 規定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모든 소리가 緣起的 條件을 떠나서 아무런 規定性을 갖지 않은 狀態에 대해 하는

말이다. 反對로 緣起的 條件에 따라 지금 音樂으로 연주되고 있는 저 소리도 시끄러운 소음이 될 수 있음을,

그런 潛在性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소리의 空性을 본다 함은 이런 事實을 보는 것일 게다. 따라서 이런

次元에서의 소리에는 아름다움도 추함도, 깨끗한 소리와 더러운 소리라는 어떤 分別 區別도 없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소리, 혹은 空氣의 波動 그 自體만 있을 뿐이다. 純粹潛在性의 世界, 空의 世界에는 깨끗

함  더러움이라는 分別이 없다(不垢不淨)함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無規定性의 소리 그 自體, 그것은 空氣가 에너지波動을 갖게 될 潛在性 自體에 속한

것이다. 個個의 소리가 갖는 소리와 다른 次元에서 모든 規定可能性을 갖는 이러한 소리 自體, 空氣가 波動

될 수 있는 能力 自體는 모든 소리의 ‘根本’이고 ‘바탕’이라는 점에서 소리의 ‘체(體)’라고 할 수 있다.

各各의 소리는 이런 體로서의 소리 自體, 純粹潛在性으로서의 소리, 波動化 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 自體가

特定한 緣起的 條件에 依持해 特定한 波動을 얻게 되고, 그런 波動이 이웃한 다른 波動이나 소리가 들려지는

緣起的 條件 등과 만나면서 이런저런 소리로서 區分되고 分別되고 規定되게 되는 것이다.

 

具體的인 소리들은 緣起的 條件에 따라, 가령 音樂堂인가 禪房인가, 講演場인가 圖書館인가에 따라서

늘어나고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그런 소리가 될 수 있는 본바탕 純粹潛在性으로서의 소리 自體, 波動化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 自體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을 것이다(不增不減).

 

심지어 아무것도 연주되지 않고, 말하거나 우는 動物이 모두 滅種한 시대라고 해도, 波動이 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 自體, 모든 소리가 될 수 있는 텅~빈 본바탕 純粹潛在性으로서의 소리 自體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反對로 신디사이저 같은 電子 裝備를 통해 새로운 소리를 무수히 만들어낸다고 해서, 波動이

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 自體가  따로 새로 생겨나거나 늘어난 것은 아니다.

 


個個의 소리는, 우리가 發聲을 하거나 듣고 있거나, 연주를 하거나 자고 있을 때처럼, 條件에 따라 발생하

기도 하고 消滅하기도 하겠지만, 純粹潛在性의 次元에서 모든 소리가 될 수 있는 소리 自體는 發生하지도

않으며 消滅하지도 않는다(不生不滅). 만약 어떤 特定 波動 周波數의 소리로 發生했다면, 그것은 피아노

소리, 클랙션 소리 등 特定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 소리는 波動이 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 自體, 純粹

潛在性으로서의 소리 自體는 아니다. 그 소리는 그냥 하나의 소리일 뿐이다. 그 소리는 波動이 사라져

周波數가 0이 되면 사라지고 들리지 않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소리가 될 空氣의 波動하는 能力 自體,

潛在性 自體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純粹潛在性으로서의 소리 自體, 소리의 體, 波動化 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 自體는 特定한 소리가 生滅

하는 바탕에 있으면서 特定한 그 소리의 生滅을 可能하게 하지만, 純粹潛在性으로서의 소리 自體, 모든

소리의 體, 波動化 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 自體, 그 自體는 生滅하지 않는다. 生滅하지 않는 그 空性으로

因해서 事實은 바로 그 生滅하는 소리가 만들어지고 變化되며 분별되어서들리는 것이다. 소리가 存在

하는 곳이면 어디나 存在하는 것이 바로 不生不滅의 소리 自體, 波動이 될 수 있는 空氣의 能力(잠재성)

自體이기 때문이다.

 


空의 世界에 대해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을 말하는 까닭은 緣起的 條件을 抽象하여 純

潛在性,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본바탕(體)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처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無

限한 可能性의 場, 본바탕, 體를 이루는 領域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의 場, 본바탕, 體를 이루는 세계는 時間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따로 存在하는 別個의 原初的 소리를 찾아내는 것도 아니다. 體로서의 소리 自體가

갖는 空性이란 各各의 소리가 연주되거나 中止되거나 하는 生滅의 活動이 있는 바로 그 狀態에

하나로 存在하는 것이다. 空氣의 波動을 感知해 피리소리인지 망치소리인지를 分別해서 알아듣

는 能力이 없다면, 즉 귀에 들리는 具體的인 소리가 없다면 空氣의 波動은 그저 空氣의 흔들림

움직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 空氣의 波動은 단지 나뭇잎이나 비행기를 흔드는 振動이나

바람 같은 건 될지언정 ‘소리’로 捕捉될 순 없을 것이다. 그 경우 空氣의 波動을 소리라고 말하

는 건 無意味하거나 不可能할 것이다. 空한 소리 自體의 本性은 特定한 具體的인 소리가 없다면

空한 소리 自體의 本性은 없는 것, 卽 空性인 것이다. 生과 滅의 世界와 不生과 不滅의 世界가

둘 아닌 하나의 세계로 存在한다 함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兩者를 단지 하나라고만 할 수는 없다. 소리 自體라고 名名한 空氣의 그런 潛在性을 피리소리,

소리로 現行化된 소리와 같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소리라는 特定한 소리로 現行化된 瞬間

에도 空氣의 波動化될 수 있는 能力인 소리 自體는 同時에 存在하지만, 그 경우 그 潛在性은 북소리라는

規定性  裏面으로 물러나 存在한다. 북소리라는 規定性의 照明 뒤에 만들어지는 無規定性의 어둠 속에

머문 채 存在한다. 북소리 아닌 다른 소리가 될 可能性을 열어두는 潛在性의 世界 속에 존재한다. 純粹

潛在性으로서의 소리 自體는, 어떤 소리로도 現行化될 수 있는 規定可能性을 갖지만, 어떤 소리로도

規定될 수 없으며, 하나의 規定된 소리가 나는 瞬間 無規定性의 어둠 속으로 숨는다는 점에서 規定

不可能한 것이다. 그 規定不可能性은 어떤 소리든 될 수 있다는 規定可能性의 裏面 배경이다. 북소리로

 現行化된 規定性과, 無規定性 속에 머문 채 다른 規定可能性을 열어두며 存在하는 規定不可能性은

둘이 아닌 하나인 同時에 하나가 아닌 것이다. 요컨대 空이란 規定可能性을 갖지만 規定하는 瞬間 그

規定性 裏面, 즉 規定不可能性으로 벗어나버리는 無規定的 潛在性이다. 모든 規定性의 본바탕, 배경이다.

그렇기에 規定不可能性의 無規定的 潛在性은 말할 수 없고, 뭐라고 表現할 수 없는 것이고, 規定不可能한

것이다. 모든 規定性을 可能하게 해주는 規定不可能性이다.


 

소리에 대해서처럼 色彩에 대해서도, 形態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런저런

색채들이 칠해지고 지워지며 만들어지는 世界란, 모든 색채가 될 수 있는 빛의 潛在性으로 因해 可能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形態도 될 수 있는 線이나 面의 能力(잠재성), 하지만 어떤 形態도 아닌 無規定的

인 純粹潛在性이, 그때그때의 緣起的 條件에 따라서 이런저런 形態들을 可能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색채가 사라진다고 해도 빛의 그 能力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모든 形態가 사라진다고 해도 線이나 面의

그런 能力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빛의 波動을 色으로 捕捉할 能力이 없다면, 線의 움직임을

形態로 知覺할 能力과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色도, 形態도 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그런 能力과, 그 能力

이 捕捉하는 이런저런 色이나 形態과 더불어 存在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生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든 코끼리든, 혹은 소나무든 버들강아지든,

이런저런 規定을 갖는 生命體가 自身이 處한 緣起的인 條件에서 살아가게 하는 能力, 그 純粹潛在性이

바로 生命이고 生命力이기 때문이다. 그 純粹潛在性은 이런저런 緣起的 條件에 따라서 어떤 生命體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能力 그 自體다.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의 能力, 純粹潛在性

그런 能力은 特定한 生命體의 能力이 아니라, 生命 그 自體에 속하는 能力이다. 순수잠재성의 무한한

가능성의 능력은 사람이든 코끼리든  소나무든 버들강아지든 바위든 빛이든 소리든 바람이든 물이든

흙이든 그런 生命體와 別個로 따로 分離되어져서 存在하지 않는다. 그 生名體들과 함께 存在하며,

그런 生命體들로만 存在할 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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