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사람, 그 본성, 운명

장백산-1 2015. 6. 28. 02:13

 

 

 

 

 

 

 

 

 

 

 

 

 

 
사람, 그 본성,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 월뽈라 라훌라 스님
 


석가모니부처님은 사람에 대해, 사람의 本性과 運命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멍 하나 뚫린 멍에가 茫茫大海에 던저져 바람따라 이리저리 떠다니고,

애꾸눈 거북이가 있어 일천년에 한번씩 하늘을 보려 물위로 오른다고 해보자.

애꾸눈 거북이가 이 멍에 구멍을 통해 머리를 디밀어 쉬면서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물론  여기에 수학적인 확률이 0은 아니겠지만, 고대 불교 경전에 따르면

人間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이것은 불가능하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엄청난 同時發生的인 事件이란 말이다.
사람의 지위에  대하여 이처럼  중차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人間의

몸을 받기란  정말 어렵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가장 얻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기에 世上 全切에서 사람의 지위는 唯一無二하다. 불교에 따르면 사람의 위치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 가장 높다. 그 존재들에서 神과 梵天도 除外되지 않는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天神과 梵天보다도 人間의 位置를  훨씬 높게 올려 놓았다.
이들이 한 동안은 인간 보다 더  안락하고 즐거운 삶을 살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적이고 늘

그러한 높은 價値에 대한 드높은 理想을 성취할 가능성은 엄청난 것이다. 


빨리 경전인 <<이띠부따까Itivuttaka>>(如是如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한 天神이 天上界에서 善業이 다해서 떨어지게  되자, 다른 천신들이 그 주위에 모여서  위로하며 말했다.
'잘 가게나,  오! 친구여, 그래서 人間의 몸을 받게나, 그 人間界가 바로  (진짜) 天上이라네.
' 부처님은 아주 明白히 人間世界를 天神들의 天上世界보다도 훨씬 나은 곳으로 여기고 있다.


天神들의 王인 帝釋天(Sakka)이 한번은 그의  마차꾼인 마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오랜  기간 동한 節制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훌륭한 스님들께 경배하겠다.
만약에  좋은 일에 종사하고, 가족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부양하는 존경받을  만한 우바새(재가 신자)가

있으면, 오! 마탈리야, 나는 그 분들께 (또한) 경배하겠노라.'


초기의 불교 문헌이나 여러  경전에 보면 天神들과 梵天이 사람인 석가모니처님의 수행원과 제자로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들은 絶望的이고 危險한 瞬間에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제자들 앞에  나타나 忠考와

案內를 해주고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 문헌에서는  오히려 天神들이 智慧와 精神的 水準에서
人間보다 훨씬 낮은 존재로 취급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다.  이러한  사례를 비추어 佛敎의  觀點에서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은 그 어떤 天神보다 훨씬 높고,그래서 그는 모든 天神들과 梵天으로부터 尊敬 받는다

는 事實을 알 수 있다.


종교 창시자들 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은 (만약 그를  종교의 창시자라 할수 있다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純粹하고  소박하게, 人間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않은 유일한 스승이었다.
다른 스승들은 神이거나, 사람모양을 한 神의 化身이거나, 神의 性靈을 傳達하는 者였다.
사람, 오로지 사람만이 부처(佛/覺者)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지극히 뛰어난'(殊勝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부처님은 사람됨이 너무나 完碧했기 때문에 후대에는 '超人'으로 神格化 되었다.
누구든지 바라고 노력한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潛在性을 스스로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는 人間의 運命을 支配하는 어떠한 存在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사람은 그 자신의 業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분명히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自己 業의 支配者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삶이 다른 존재의 결정에 따른다면, 세상은 사실 살아 볼 가치가 없다.
그런 의존한다는 관념은 인간성을 비굴하게 만들며, 모든 존엄성과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부심은

모두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존재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지만, 그것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들을 

없애 버리거나 착취할 수있는 權利가 附與되었다는 意味는 아니다.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단지 한 種일 뿐이고, 그 다른 것과는 단지 백지 한장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인류를  위하는 만큼이나 모든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존중하여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각자가 자신의 人格을 발전시키고 자기의 解脫에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에게는 자기 노력으로써 모든 束縛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能力이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말했다. '그 대들은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如來, 석가모니부처는 다만  선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석가모니부처님이 '救援者'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涅槃으로 가는 길을 發見하여

人間들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 스스로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第子들에게 完全한 自由를 許容한 것은 自己 責任의 原則에서 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aparinibbana-sutta>>(大般涅槃經)에서 부처님은 결코 僧伽(승가)를

統制할 生覺을 하지 않으며, 또한 승가가 그에게 依持하는 것을 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석가모니부처님, 如來의 가르침 속에는 秘密스러운  敎理가 없어서, 스승의  주먹(師拳) 속에 감춘 비밀,
또는 다른 말로 하자면 '옷  소매에 감춘' 비밀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전통이라 해서, 또는 종교에서 

그리 말했다 해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로지 이해하여 스스로 확신했을 때만 받아들여야 한다


불교는 카스트나 인간 사회의 어떠한 階級 差別도 認定하지 않았다. 모든 人間은 同等하게 태어났다.
誕生 自體에 優劣 條件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빨리  원전의 여러 經(sutta)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은 그 당시에 印度에 만연하던  바라문교의 카스트제도에 단호히 비난하고 공격하였다.


유명한 싱할라 시 끼브실루미나의 作家는 모든 외부적 대상을 바라보는 눈은 눈 그 自體를

바라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보려하는 사람의 경우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 自身의 本性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人間의 生覺 解釋 判斷과 知識이 얼마나 소용이 될까?


이 疑問은 有史 이래 人類의 思想에 대해  연구하는 모든 사람이 부딛히는 障碍物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모든 종교들이 사람이 고쳐질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 同意한다. 
人間의 本性을 이 世上의 어떤 變化에도 불구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여 恒常 똑같다는

大衆의 認識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本性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變化와 같은

두루 널린 變化의 法則에 從屬된다. 그러나 人間의 本性을 背景에서 分離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심리분석학자들은 특정한 사회적 환경이 특정한 종류의 정신 질환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사회적 변화는 정신 질환의 형성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준다.


動物의 本性은 얕고 단순한 반면에 人間의 本성은 깊고 복합적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동의할 것이다.
人間의 本性을 生覺하면 生覺할 수록 우리는 점점 더 그 혼란이 그릇되어 뒤범벅 될 때가지 그 문제에

뒤얽히게 된다.


우빠니샤드Upanishad에는 'Aham Brahm smi', 그리고 'Tat tvam asi'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나는  브라흐마이다', '그것은 그대일세'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브라흐마 그 自體이다'라고 看做하고 있다.
이와 反對로 어떤 종교는 인간은 原罪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佛敎는 가운데 길(中道)을  택한다. 사람은 브라흐마도 아니며, 罪를 안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基本的으로 사람의 本性은 中立이다. 즉, 善하지도 惡하지도 않다. 만약 바른 길을 따라나가면

부처도 된다. 그러나 만약 退行한다면 점점 더 낮은 곳으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 경전에서 人間을 네  개의 部類로 나누는 것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즉,  地獄 같은 사람, 餓鬼 같은 사람, 畜生 같은  사람, 人間다운 사람이다.
모든 사람은 이번 生에서 이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앙굿따라-니까야>>(增支部)에는 두 개의 중요하고 필수적인 經이 있는데,
이 경전들은 人間의 本性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지침을 주고 있다.

 

그 하나를 보면 Pabhassaram ida  bhikkhave citta , ta  ca kho  gantukehi upekkilesehi upakkili  a .
(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純粹하다. 그러나 이것은 外部의 煩惱에 의해서 더러워진다.)

 

그리고 다른 경에는 Pabhassaram ida  bhikkhave citta , ta  ca kho  gantukehi upekkilesehi

vippamutta . (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순수하다. 그리고 이것은 외부의 번뇌로부터 自由스럽다.)


이 두 개의 經이 가리키는 것은 '마음의 本性은 根本的으로 純粹하다. 그러나 외부의 煩惱에 의해서

더러워지며 또한 이러한 煩惱에서 自由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 두 경에서 언급한 'citta'(마음)의  개념과 大乘 敎理인 如來藏(Tath gata-garbha) 사이에
현저한 一致性이 있다는 것은 교훈적이다. citta'(마음)는 빨리어인 'pabhassara'(눈부시도록 청정한)와

의미가 相通한다. 그리고 'Tathagata-garbha'는 산스크리트어 'prabhasvara'에 대응된다.


如來藏은 'citta'(마음)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本性이 純粹하지만 外部的 煩惱에 의해서 더러워진다.
'만약 人間의 本性이 本來부터 純粹하지  못하고 根本的으로 잘못되어 있다면,
마음의 本性을 지극히 순수한 상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된다.
어떻게 그 本性이  순수하지 못한 것이 순수함으로 발전할 수 있겠는가?
그 發展이란 필연적으로 그 진짜 本性이 成長하는 것인데 本性이 不純하다면 순수함으로 발전되겠는가?
反面에 사람의 本性이 完全하다면 더 이상  改善시킬 여지가 없게 된다.


위의 경에서 보듯이 불교가 취하는 입장은 사람의 본성을 中立에 두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외부적 자극에 影響을 받는가 하면 또한 이로부터 自由로울 수도 있고 더나아가 完全해 질 수도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네 삶은 명백히 외부적인  힘과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자신의 향상을  위해 반드시 수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 할 수도 있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아는 지혜로운 이는  마음이 수양될 것이지만, 이것을 모르는 자는 어떠한 발전도 기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生成에 대한 불교철학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 아라한의 경지에서는 어떠한 외부적 영향이나 번뇌가 마음을 물들게 할 수 없다.
모든 외부적 힘에 대해 마음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운명의 의미를 벗어날 수 없는, 숙명 또는 神의 예정이란 의미로서 취한다면,
불교 교리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낼 수가 없다. 비록 業이 있고, 우리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이전의 業에

의하여 영향을 받겠지만, 이것은 미리 定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전의 業의 노예라는 생각은

게으른 통속적인 생각으로서, 말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사람을 어쩔  수 없는 業의 奴隸로 만드는, 정해진 운명같은 것은  없다.
사람은 自己  業의 創造者이다. 자유를 올바른 길을 따라가는데 사용하면, 자신의 지혜와 노력에 의해서

業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데 아주  중요한 네 가지 요소로서 
1)좋은 친교, 2)좋은 배움, 3)올바른 인식, 4)바른 행동을 강조한 이유이다.


만약 그 '運命'이란 말을 죽은 다음에  있을 일이란 의미로서 取한다면,
佛敎에서는 죽어서 끝나는 게 아니요,  涅槃을 이룰 때까지 계속된다고 말한다.


 '운명'이란 말은 사람의 窮極的인 目標를  뜻하는 것으로 취해져 야한다.
이것은 完全한 自由,  卽  涅槃/解脫의 成就이다. 여기에 연장, 응집, 열, 운동(地水火風)의 네가지

주요  요소(四大)는 있는 곳이  없다. 길이와 너비, 섬세함과 거대함, 이로움과 해로움, 이름과 형태의

槪念도 모두 消滅된다. 현세도 내세도 없고,  오지도 가지도 멈추지도 않으며, 나지도 죽지도  않고,

감각의 대상들도  찾아 볼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인연에 얽히지 않은 상태가 있다.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인연에 얽히지 않은 상태가 없다면, 
태어나고, 늙고, 조건에  따르고, 인연에 얽힌 데서 벗어남은 없다.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인연에 얽히지 않은 상태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고,  늙고, 조건에 따르고, 인연에 얽힌

데서 벗어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정적인 언어로 사용된 '모든 괴로움의 소멸'인 완전한 상태(열반)는 자기 통제, 자기 수련을

통해서 실현된다.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정화시켜서,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최대한으로 배양하여서,
그리고 "거룩한 여덟길"(八正道),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수단(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르게 마음이 깨어 있기(正念), 바른정신집중(正定)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 "거룩한 길"의 자연스런 結果로서  理想的인 佛敎社會의 槪念이 있게 된다.
그것은 필연적인 추론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거기서는 정복을 위한 파괴적인 투쟁이 포기된다. 
승리는 미움을 낳고, 패배는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정복과 패배에서 떠나 청아한 삶이

만연해 있다. 


죄없고 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박해하면 맹렬히 비난 받고,
자신을 정복한 이가 전쟁터에서 수 백만을 정복한 자보다 더 위대하게 여겨지며,
증오가 친절에 의해서, 사악함이 선에 의해서, 거짓이 진실에  의해서,
탐욕이 자선에  의해 지배되고, 다른 사람의 잘못과 실패에 관심을 갖기보다
자신의 잘못과 결점을 찾아내서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적의,  시기, 악의, 탐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끓게  하지 않으며, 자비심이  행위의 원동력이 되며,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모든 거래 관계에서 정직과 신용이 통용되고,
사람들이 절난척하거나 거만하지 않으며, 아주 작은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公平하고 사랑으로 다루어지는 社會가 불교의 理想社會 이다.


이 사회에서 한 개인이 '거룩한 이'로 評價되려면 最少한 他人에게 害가 되지 않아야 한다.
속이거나  약탈하지 않고, 흉악한 죄를 짓지 않고, 진실되고 절제하며, 부모, 아내, 형제, 자식, 형제,

자매 그리고 이웃에게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떠 넘기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거룩한 이'부를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불교가 창조하려 목표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유토피아 만은 아니다.
과거에 이러한  이상적 사회를 자기 왕국에 구현하려 노력한 王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가장 먼저 시도했던 왕은 기원전 3세기 인도의 불교  황제 아쇼카였다.
그는 역사상 유일하게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서 결코  다시 정복하기 위해 꺼내지 않았던 왕이었다.

이러한 예는  스리랑카에도 있었다. 아다개무누(78~89)와 보하라까띠사(269~291) 왕이 아쇼카왕의 

 예를 따랐으며, 중국의 아쇼카라 불리는 梁武帝(5세기)가  중국에 불교의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람의 운명에 대한 불교적 이상이 최고로 성취되는 것은 卽, 사람의 本性이 完全히 啓發되고
事物들의 연관 構造 안에서 自身의 위치가 바르게 실현는 것은 사회의 그런 이상상태의 탄생과 성장을

통하여 서다.


사람은 전 宇宙에서 唯一無二한 存在이며, 스스로가 主人이며, 그 本성이 善하지도 惡하지도 않다.
사람은  모든 束縛에서 解放될 수 있다. 그리고 善하고 惡한것, 相對的인 모든 限界들,
時間과 空間에서 完全히 自由로와  질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지성과 노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른 길"을  따라가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월뽈라 라훌라 스님>